유대칠의 대한민국철학사를 조금 읽었다. 따라서 나는 그 책의 독후감을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한국철학이란게 있어야 한다는 요청에 의해 떠오른 생각을 적으려고 할 뿐이다. 유대칠의 대한민국철학사를 다 읽지 않은게 걸려서 장정일의 소개글을 읽기는 했다.
이런 질문은 흥미롭지만 어쩌면 나를 포함한 소수의 사람에게만 그럴 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선입견을 가진 질문일 수 있다. 우선 철학이란 말 자체가 애매하다. 그래서 유대칠도 철학의 역사를 쓰는 것은 철학을 하는 것 즉 철학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한국의 역사에 의해서 창조되듯이 철학이 뭔가를 철학사를 써서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서양철학사가 서양철학이 무슨 말인가를 결정하고 한국철학은 한국철학사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정의된다. 서양철학사를 쓴 러셀도 철학을 종교와 과학 사이의 무언가라고 애매하게 말하고 있는 걸 보면 철학이 무슨 말인지가 애매해 진지는 적어도 백년이 넘었다.
사실 철학이란 말의 의미는 바뀌었다. 지금 과학이라고 불리는 것은 과거에는 자연철학이라고 불렸다. 그래서 뉴턴이 쓴 책도 그 이름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다. 게다가 사실 지금 우리가 서양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부분 고대시대때부터 있었던 것이라기 보다는 과학적 지식이 늘어나면서 그것과 종교를 포함하는 전통적 사상을 타협시키려는 노력속에서 만들어 졌다. 이원론이 윤리와 과학의 영역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고 칸트철학도 과학지식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이고 할 수 있다. 과학혁명의 시대이래 철학자들은 결국 근대사회를 비판하거나 보완하는 일에 몰두했다. 왜냐면 사람들이 적어도 프랑스혁명이래 근대사회를 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서양철학이 우리가 동양철학이라고 말하는 불교, 도교, 유교 철학과 그토록이나 다른 이유다. 동양철학은 기본적으로 전근대에 만들어 진 것이다.
유대칠이 한국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답하는 방식은 내가 이해했기로는 세가지다. 그것은 우선 조선이나 고려등 한국 역사에 나오는 나라의 철학이 아니라 지금의 대한민국의 철학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한국어와 한글로 써진 철학이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한국 민중의 아픔 즉 한국 민중의 문제에 의해서 만들어진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한국철학 만들기는 처음부터 분명한 문제를 보인다. 한국 철학이 조선 철학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서 한국철학의 연속성을 부정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한국철학을 말하는 방식을 보면 이미 한국철학이 뭔지는 그의 마음속에는 정의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의 선구가 되는 기생철학자를 말하면서 그는 조선철학은 한국철학이 아니지만 이것은 한국철학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게는 그게 서양철학의 틀로 철학이 뭔지를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서 역사를 보고서 그것의 흔적을 찾아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한국식 자본주의가 뭔지 말하겠다고 하면서 서양 자본주의를 모범으로 마음속에 가지고서 한국의 역사에서 그와 비슷한 것을 지적하며 이것이 한국 자본주의라고 말하는 식이랄까. 그런데 정말 이런게 한국 철학일까? 이건 한국의 역사를 부정하고 한국의 정신을 더더욱 서양에 종속시키는 방식이 아닐까? 한국철학이란 한글로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은 의미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건 마치 조선시대의 한시는 한국인의 정서가 아니라고 완전히 부정하는 것과 같다. 결국 상당히 무리한 주장인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우리는 왜 한국철학을 찾으려고 했을까? 한국 과학이나 한국 물리학을 찾자는 목소리는 없다. 한국 철학을 찾자는 말은 철학의 주관성내지 주체성을 가정하지 않으면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물론 한국의 역사나 환경은 서양과는 다르지만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역사를 근대화라는 틀 안에서 똑같이 말할 수 있다면 도대체 뭐가 새로운 문제이고 질문일까?
앞에서 말했듯이 철학의 실질적인 시작은 근대화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근대화가 인류의 삶은 다른 어떤 것보다 많이 바꿨고 근대화이래 지금까지 세계는 근대화의 이상에 따라 살아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근대화를 먼저 시작한 서양이 과학과는 다른 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그리고 서양철학사를 통해 그런 근대철학을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마치 모든 일들이 서양이라는 고립계 안에서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은 허구다. 사실대로 썼다면 서양철학자들은 아랍, 인도, 중국 철학들을 무시하고 서양철학사를 써서는 안된다. 이런 허구가 가능한 것은 근대화를 서구가 먼저 했고 그걸 중심으로 철학을 재정의하고 역사를 다시 썼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먹방이란 문화로 철학을 재구성한다면 그 원조인 한국이 고대 고조선때부터 내려오던 정신에 바탕해서 그런 철학을 발전시켰다고 즉 모든 철학을 한국인들끼리 스스로 만든 것으로 역사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서양철학이 아닌 한국철학이란 과학적 지식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고 새로운 답을 제출하는가? 그 답이 아니요라면 한국철학찾기란 초라한 기획이다. 서양철학자들은 근대화 과정의 보편성을 말하면서 한국 철학자의 고민을 이미 서양철학자들이 과거에 다 통과한 것으로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철학이란 서양철학의 19세기 버전을 말하는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런 기획은 한국인의 정신을 더더욱 서양에 종속시킬 뿐이다. 니들만 농민이나 노동자 혹은 여성 철학이 있었는가? 우리도 늦었지만 비슷한게 있었다는 이야기가 될 뿐이다.
한국철학이란 실질적으로는 한국이 대단한 나라여야 만들어 질 수 있다. 서양철학이 현실감있게 존재하는 것은 거듭말하지만 그들이 근대화를 먼저 시작하고 한때 세계를 지배하다시피 했으며 그래서 지금 전세계가 사실상 근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인의 삶의 방식 즉 문화는 서구 혹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다르다. 그러므로 한국철학이 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자명해 보이지만 사실상 근대의 비전, 근대의 철학을 현대한국이 답습하는 한 이런 주장은 한계가 크다. 미술학원에 처음 온 유치원생이 기초는 안배우고 나도 내 화풍이라는게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릴 것이다. 물론 한국은 서구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초등학생에 비교될만큼 초보적인 나라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근대나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뭔가를 시작했을까? 사실 한국의 문화적 특징은 상당부분 유대칠이 가볍게 부정해 버린 조선이며 고려의 역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철학을 찾는 것은 서양철학자들에 비하면 초보자수준이었던 시대에 활동했던 한국 사상가들의 흔적을 뒤져서 가능한게 아니다. 그 사상가들을 존경하지만 그 사상가들은 그때의 사회적 환경의 제약을 받았다. 그런데 20세기에 한국은 정말 후진국이었다. 그러니 한국인의 삶에서 우러나온 고민이라고 해봐야 자본주의 초기의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흔히 말하는 전일론이나 관계의 철학은 이미 서구에서 훨씬 더 섬세하게 파헤쳤다. 게다가 그들은 서구철학자들과는 달리 과학에 무지하다고 할만큼 근대 철학에 철저하지 못하다. 데카르트나 칸트는 수학자이고 물리학자였다.
나는 지금은 한국에게도 기회가 좀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는 한계에 부딪혔고 서구는 근대를 넘어서는 사상을 만들지 못하고있다. 그런데 한국은 상당히 성장해서 당당한 선진국이 되었다. 근대를 충분히 배운 것이다. 이제 한국이 새로운 문제를 풀고 세계에서 가장 먼저 근대를 넘어서서 새로운 문화적 개혁의 첨단에 설 때 그런 행위는 분명 한국 철학이라고 말할만한 것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한국 철학사를 쓴다면 우리는 서구가 했듯이 한국철학은 2025년에 나온게 아니라 실은 2천년전부터 말해진 어떤 정신의 연속선상에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가 뭘하든 우리는 결국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기반해서 새로운 것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 철학의 실마리는 이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떻게 AI를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은 형식상 근대철학의 초기질문과 같다. 즉 과학적 지식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이 새로운 질문에 가장 먼저 가장 잘 답하고 그걸 사회에서 현실화해낼 수 있는 집단은 새로운 철학의 시대를 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이라면 그것이야 말로 한국철학을 찾고 서양철학에서 벗어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부분을 무시하고 한국철학 찾기를 하는 것은 퇴행적이기 쉽다. 즉 오히려 낡은 사상을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 된다. 지금의 진보의 메시지가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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