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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인본주의는 정말 인간해방의 철학인가?

by 격암(강국진) 2025. 8. 2.

인본주의는 오늘날 가장 부정할 수 없는 철학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인본주의에 반하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인간만 중요한게 아니라 다른 생명도 중요하다는 생태주의적 주장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정말 인본주의는 인간해방의 철학일까? 인본주의가 소중하게 여긴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과거를 되돌아 보자. 분명히 인본주의는 한때 인간 해방의 철학이었다. 인간 중심의 철학이란 그 이전에는 세상이 인간 중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시대는 종교와 관습 중심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의 독립적 판단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말하는 것이 인본주의였다. 그래서 종교 중심의 사회에서 나타난 인본주의는 인간을 해방시키는 철학이었음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 해방이 완벽한 것이었나 하는 것이다. 완벽한 것은 세상에 없다. 그 해방은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을 유물론적으로 개인적으로 다뤘다. 물론 인본주의 시대 혹은 근대의 이전에도 사람은 양이나 고양이를 한 마디 단위로 세듯이 한 개인 개인을 구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본주의 시대이래에도 우리는 보다 사회적이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목소리를 들어 왔다. 하지만 인본주의나 근대화의 핵심에는 행동과 선택의 주체로서의 고립된 개인이 있다. 그 개인이 이성을 가지고 제대로 선택을 하며, 사회이전에 개인이 존재해서 사회는 개인의 합으로 여겨지며, 사회적 의무와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이같은 기본적 개념은 인본주의의 도래이래 강화되었고 그 이래 그 기본이 흔들린 적이 없다. 

 

하지만 한 명의 인간은 그 인간이 가지는 사회적 관계나 지식 그리고 소유물에 따라서 다른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모든 인간을 마치 알몸의 몸뚱아리만 가진 것처럼 다루고 사적 소유권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평등을 주장하면 어떻게 될까? 결국은 이 해방은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이 된다. 왜냐면 한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달리고 한 사람은 걸어가는데 두 사람의 경쟁을 공평한 것이라고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인본주의적 해방이란 이런 의미에서 당시에도 가진 자들을 위한 해방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인본주의가 만든 해방이 역사적으로 여전히 인간 해방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모순은 누적되게 된다. 이를 일찌감치 느꼈던 사람중의 하나는 칼 마르크스다. 그는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생산수단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지게 될 거라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 평등이란 인간 평등이 아니었다.

 

자세한 세부사항에서 마르크스의 미래 예측이 얼마나 정확히 옳았나와 상관없이 우리는 역사적으로 기술이 크게 발달하고, 빈부격차가 빠르게 증가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모순, 모더니즘의 모순, 인본주의의 모순은 날로 더 심해지고 인간의 평등과 자유라는 말은 허울만 좋은 이야기로 변하가게 된다. 그건 마치 한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데 누군가는 걸어가게 해놓고 경쟁을 하는 것과 같다. 모두가 투표권 1장을 가지면 평등하다고? 하지만 누가 더 큰 조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사람들은 다른 정보를 가지게 된다. 언론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과 매일 먹고 살기 바뻐서 신문 읽을 시간도 없는 사람의 한표가 정말 같은가? 그 가난한 노동자의 생각이 정말 자기만의 생각일까? 정말 선거는 모두의 생각을 반영하거나 전체 사회를 위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작동하고 있는가?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제 인본주의라는 것 자체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간 중심이라고 해도 그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인간을 재정의해야 한다. 인간은 진공속에서 홀로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인간은 육체가 아니고 인간은 DNA가 아니다. 이러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고민이며 현실사회의 문제와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인본주의가 말하는 인간의 개념은 현재 정치적 사회적 시스템의 근간에 있다. 즉 공평이란 개념의 중심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가야 할까에 대한 생각의 중심에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모순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인본주의는 실제로 누적되는 모순에 의해서 여러번 도전을 받았다. 언뜻 생각하면 인본주의가 의무교육이나 복지정책을 옹호하고 있을 것같지만 그 반대다. 인본주의는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이다. 왜냐면 인간의 정의 자체가 고립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본주의적 견해에서는 알몸의 각자는 평등하고 자기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자연스럽다. 누군가가 설사 글자도 못읽는 문맹이어서 선거에서 누굴 선택할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도 그 사람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그걸 공평하고 독립적인 투표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런 사회는 발전할 수가 없다. 문맹의 시민들을 가진 사회가 번성할 수 없다.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아 노예가 되거나 범죄자가 되는 시민들을 가지고 국가가 번영할 수 없다. 그래서 의무교육이나 복지정책같은 사회주의적 정책이 상식이 된 것이다. 그러나 본질이 개인주의적인 인본주의에 따르면 그런 것들은 마치 불쌍한 사람에게 주는 적선처럼 여겨지기 쉽다. 그게 아니라도 우리는 타인에게 개입하지 말라는 말을 끝없이 듣는다. 

 

인본주의는 원자론적이다. 개인이 있고 그 개인의 합이 사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환경을 무시하지 않는 철학에서는 인간을 그렇게 고립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환경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철학적 관점에서는 애초에 모두가 분리되어 존재하는 개인, 그 개인들이 번영하면 전체가 번영하게 된다는 식의 생각이 설득력이 없다. 전체는 마치 하나의 네트웍으로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며 이것은 고도로 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특히 그렇고 빠르게 발달하고 있는 AI가 만들어갈 미래 사회에서는 더더욱 분명한 현실인데 원자론적인 인본주의는 그같은 사고를 거부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두 개의 서로 다른 주관적인 철학의 다툼이 아니다. 그보다는 현대 과학과 낡은 이념간의 다툼이다. 인본주의는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온 사회적 관습은 이미 낡았다. 그것은 뉴턴의 고전역학의 시대에 만들어지고 고정된 것이다. 그런 고전 물리학이 한계를 보이고 생물학과 뇌과학이 발달한 21세기에는 과학이 이런 인본주의적 사고와 충돌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시대에서는 그것이 과학의 시대라고 불리면서도 과학적으로는 상식적인 견해가 사회적으로는 비주류적인 이상한 일이 유지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 짐승과 다르다는 말을 참 많이 듣는다. 이 말은 인본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특별하다는 말은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는 말이다. 그리고 인간이 짐승과 다르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만이 이성을 가졌다라던가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한다던가 인간만이 언어를 가진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 말들은 다 거짓이거나 그저 단어의 정의가 만들어 낸 혼란의 결과물일 뿐이다. 현대 생물학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세포로 이뤄져 있고 신경조직이나 뇌를 가진 짐승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그들은 신경 세포들의 활동패턴을 저장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이 결정된다. 모기에서 고양이, 침팬지에서 인간이 모두 이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저 복잡성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고 그 복잡성의 차이라는 것도 각각의 개체를 보면 그렇게 엄청나지 않다. 한 개체 개체를 고려하면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가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과 침팬지의 삶의 차이만큼 크지는 않다. 고립되고 벌거벗은 하나의 개체라면 정글 속에서 인간보다 침팬지가 더 잘 생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인간과 침팬지는 그렇게 다르게 사는가? 인간은 조금 더 발달한 뇌를 가지고 조금 더 복잡한 사회를 만들었고 그 사회속에서 정보를 이 세상에 저장하는 방법을 발달시켰다. 구술언어와 문자가 발달했고 인쇄술이 발달했으며 나중에는 컴퓨터가 발달했다. 역사적으로는 길지만 지정학적으로는 매우 짧은 몇만년의 시간 동안에 이 일이 있어났기 때문에 유전자의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침팬지의 삶과 전혀 달라졌다. 그 동안에 바뀐 것은 인간의 두뇌나 육체가 아니다. 그 동안에 바뀐 것은 사회적 환경이었다. 인간의 삶을 보면 몇만년전과 지금의 차이는 이것이 같은 동물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 완전히 새로운 동물로 진화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유전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결국 인간이 바뀐게 아니라 환경이 바뀐 것이다. 우리는 환경을 빼고 인간을 정의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인간이 엄청나게 진화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침팬지가 전혀 다르게 사는 것이다. 인간이 가졌다는 이성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적인 것이다.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인본주의는 이런 환경적 요소를 인간의 정의에 집어넣는 것에 저항한다. 그렇게 함으로해서 늘어나는 빈부격차속에서 누군가는 비행기를 타고 경주를 하고 누군가는 걸어가고 있는 현실을 공평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인간은 평등하며 자유롭다고 말한다. 이것이 지금의 인본주의다. 한때 종교와 관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했던 인본주의는 이제 인간을 억압하는 장치로 변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는 알몸의 육체 말고도 장기간의 교육과 인적 네트워크를 포함하는 아주 많은 것들이 필요로 하다는 사실을 무시함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현대과학에서는 상식적인 것이 사회적으로는 비주류적이고 급진적이다. 인본주의적 관행이 만들어 낸 학문적 사회적 관행은 과학이 밝혀낸 사실에 주목하기 보다는 여전히 수백년전의 인본주의 영웅들이 말하는 이야기를 반복하기를 좋아한다. 독립적인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인본주의 혁명은 위대했고 완벽했다는 것이다. 물론 인본주의 혁명은 위대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인본주의를 새로운 인본주의로 대체하거나 인본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인본주의를 과거의 그것대로 유지하면서 각종 장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노력은 근원적 모순을 고치기 어렵다. 

 

그러나 어쩌면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세상에는 사실 언제나 문제가 있었고 모순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가 어떤 것이든 미래에도 문제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본주의가 만들어 낸, 자본주의와 근대 사상이 만들어 낸 세상에 문제가 있고 모순이 있다는 것 자체는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AI 혁명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에도 그런 모순을 감내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달리기를 잘하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사람도 쫒아갈 수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AI를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그보다 더 크다. 매해 새로운 AI가 나오는 가운데 몇년안에 우리는 순식간에 자본주의라는 게임이 부정당하는 일을 볼 수도 있다. 누군가가 주식시장을 예측해서 한두달 안에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어떨까? 누군가가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그렇게 된다면 어떨까? 나중에 이거 문제라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기 전에 이미 모든 재산과 자원이 어느 쪽으로 빨려들어가 버리면 어떨까? 이미 그렇게 되고 난 다음에 그걸 다시 고치거나 공평하게 부를 재분배한다는게 가능할까? 

 

AI는 대중화되어야 한다. 인본주의의 재정의는 이것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지금 처럼 인간은 알몸으로도 이성을 가진 존재다 운운해서는 비현실적인 행동과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사람들은 AI를 주로 생산성을 높이는 기계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거대 회사가 슈퍼 AI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쓰는 일은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AI가 뭔지에 대한 착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건 마치 전근대의 농부가 당시의 인간의 대부분은 농민이었으므로 근대화란 기계로 농사를 더 잘 짓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오늘날 인구의 2-3%만 농민이며 근대화란 결코 농기구를 사고 그걸 쓰는 법을 배우는 것에 대한게 아니었다. 그건 봉건사회에서 공화국으로의 완전한 변신을 의미하며 완전히 새로운 산업의 등장을 의미한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직장인이다. 그런데 그들이 AI를 써서 자신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AI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습은 굉장히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AI는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하고, 만들 것이다. 근대화가 인본주의를 요구했듯이 AI는 인본주의의 크나큰 수정을 요구할 것이다. 인간을 재정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미래에도 개인이 있고 개인의 권리가 존재할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환경과 인간의 평등과 자유에 대해 아주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난 후의 일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낡은 사상에 매달릴 때 우리는 역사적으로 본 몰락하던 집단의 예를 따를 것이다. 근대화에 반대하고 전근대에 남았던 나라들이나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던 나라들의 예 말이다. 모순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 누적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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