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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인간의 조건

by 격암(강국진) 2025. 10. 22.

인간은 어떤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살게 되어 있는가? 이같은 질문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이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종종 잊혀지고 있는 질문이다. 우리는 대개 우리는 뭐든지 될 수 있다는 낙관론을 펴거나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에 빠진 나머지 인간의 삶이 가진 조건을 질문하지 않는다. 인간의 조건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조건이란 너무 다양하고 많아서 뭘 이야기할 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 중에는 잊어서는 안되지만 종종 잊혀지는 세가지가 있다. 그것은 유한성, 특수성 그리고 의존성이다.

 

유한성이란 인간이란 유한한 존재라는 걸 의미한다. 우리 인간은 모두 유한하다. 알 수 있는 것도 느끼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모두 유한하다. 이는 자명한 것이지만 우리는 종종 이걸 잊는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첫째로는 나라는 개인을 인간이라는 종과 혼동하는 것이 그 이유다. 인류도 사실 유한하지만 인류가 만든 문명을 보면 너무나 대단하기 때문에 인류를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혼동하면 우리는 인간은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말에 쉽게 동의하게 된다. 하지만 설사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거의 무한이라고 할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안의 개인인 나는 지극히 유한하다. 대한민국이 엄청난 업적을 냈다고 해서 한국인인 내가 반드시 대단한 것이 아니고,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과학자나 철학자가 뭘 알고 있다고 해서 같은 인간인 내가 뭘 알고 있는게 아니다. 하지만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 개인으로서의 나다. 우리는 스스로의 유한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유한성을 잊는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은 본래 변하지 않고 보편적인 것을 찾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고, 인간의 유한성이 인간의 유한성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유한하다는 것을 잊고 우리가 발견한 것에 지나치게 확신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상이며 법칙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을 잊기 쉽게 된다. 개미가 뭔가를 확신할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개미의 확신이란 좁은 세상의 좁은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인데 우리는 우리가 개미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하다. 따라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나 목표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초등학생이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천국을 상상한다고 해도 어른들이 보기에는 대개 그 천국은 허술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유한성을 잊고 자기를 언젠가는 스스로가 초등학생 보듯이 하는 날이 오게 될 거라는 것을 잊는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지금의 나의 천국은 미래의 나에게는 천국이 아닐 수 있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열심히 노력해서 어떤 천국에 도달하고 영원히 거기에 머물러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삶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삶은 마치 계속되는 강위의 래프팅처럼 하나의 시기를 지나면 또다른 시기로 접어들기 마련이며 그런 과정은 영원히 계속된다.

 

물론 과거는 중요하다. 현재와 미래의 나는 과거때문에 바뀐다. 하지만 유한한 인간에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러니 미래의 내가 누가 될지는 모르는 것이다. 특히 유한한 우리는 모른다. 이걸 잊으면 우리는 지나치게 큰 속박을 스스로에게 지운다. 미래의 나를 모르면서 우리는 미래의 나에게 족쇄를 채운다. 미래의 나는 은행빚을 갚거나 제주도에 살거나 하는 것을 싫어할 수 있는데 우리는 종종 빠져나올수 없는 함정을 만들고 거기에 스스로를 던져 넣어서 미래의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유한한 인간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불행은 과거의 나나 과거의 부모가 나에게 덮어씌운 족쇄 때문에 생겨난 일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뭔가를 지나치게 확신했던 것이다.

 

인간의 특수성이란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모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타고나는 유전적 차이도 있지만 환경적 차이는 오히려 더 크며 더구나 그것은 계속 변해 간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모두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게 되어 있다. 인간은 이렇게 서로 다른 과거의 경험에 기초해서 행동하고 느끼기 때문에 심지어 같은 집에서 같이 사는 두 사람도 반드시 같은 환경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이렇다고 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 지금 이순간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어떤 환경인지,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의 조언을 알래스카의 얼음위에서 한다면 당연히 효과가 없을 테니까 우리는 먼저 주변을 둘러 봐야 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 지를 알고 느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펭귄과 호랑이는 당연히 다른 걸 원한다. 우리가 보편 명사로서의 인간이라는 말에 넘어가서 모든 인간은 이러니 저러니 하는 말에만 너무 주목하다보면 우리는 이 당연한 특수성을 잊게 된다. 그리고는 펭귄들이 물고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호랑이도 물고기를 먹고 산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기 쉽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보편적 법칙들을 들으면서 산다. 그것들이 꼭 틀린 말도 아니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도 아니겠지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말들은 나의 특수성에 대한 것들이다. 모두가 결혼해서 행복해 진다고 내가 꼭 결혼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돈만 쫒는다고 내가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멋지다고 하는 것이 나에게는 멋지지 않을 수 있다.

 

나를 잊어버리고 나의 환경을 관찰하는 것을 잊어버리면 우리의 삶은 매우 소모적이 된다. 이미 다 가진 것을 구하려고 애쓴다던가, 이미 당첨된 복권을 스스로 찢어버리면서 돈을 찾는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

 

물론 나를 알려면 타인을 알아야 한다. 내가 타고난 체력이 뛰어나서 마라톤 완주정도는 노력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도 대부분의 다른 사람이 그걸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내 환경이 어떤지 알려면 다른 환경은 어떤지 알아야 한다. 한국이 지옥이라는 주장은 어쩌면 옳을 수도 있지만 널리 세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쉽사리 한국이 지옥이라고 믿으면 우리는 진짜 지옥으로 자신을 밀어넣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개 게을러서 자신의 특수성을 탐구하는 일을 지나치게 간단한 것으로 여긴다. 나는 누구인가? 그걸 몰라?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 나의 환경은 어떤 것인가? 그걸 몰라? 너무 대답하기 쉬운 것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나를 알기 위해서 나는 글쓰기와 독서를 수단을 삼는다. 글을 쓰고 스스로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를 느끼고 남의 글을 읽으며 이 사람은 나와 이렇게 다르구나를 느낀다. 이것만 해도 시간이 많이 들고 어려우며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특수성을 모른다. 그저 보편적 규칙에만 주목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무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의존성이다. 인간은 유한하고, 인간은 당면한 환경속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꼭 풀어야 할 문제를 풀지 못해서 괴로워 하면서 살게 된다. 이같은 것은 짐승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자신의 유한성과 특수성을 도구와 소통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극복한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 되는게 아니다. 인간은 사회속에서 다른 사람과 도구에 의존하기 때문에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를 모르는 인간도 물론 인간이라고 부르지만 오늘날 누군가가 인간답게 산다고 할 때 그 인간다운 삶이 언어없이 가능할까?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인간은 뭔가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의존하는 것은 언어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특히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사회 시스템일 것이다.

 

그러니까 개인의 삶이 그저 내 힘으로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타고난 육체가 아니라도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것들의 대부분은 사실 공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인과 미국인은 다른 삶을 사는데 그게 어디 그 개인의 노력의 차이이기만 하겠는가.

 

다른 것들이 그러하듯이 의존성도 당연한 것같지만 망각은 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내가 어떻게 하면 잘살까라는 식으로만 질문을 던진다. 요즘 AI 시대가 온다니까 AI 시대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고 질문던지는 식이다. 마치 나 혼자서만 뭘 잘하면 새로운 시대를 잘 살 수 있을 것같다. 하지만 상당한 진실은 우리가 다같이 뭔가를 하지 않으면 다 함께 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AI 시대에 대한 대비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물론 스스로 주체적으로 뭔가를 하려고 해야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의외의 일로 내가 무엇과 접하게 되는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버스에서 본 한줄의 광고문구가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은 모두 내 의지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쓸 모 있는 인간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내가 어디에 놓여지는가에 의해서 대부분 결정된다. 유명한 자동차 경주 선수는 자동차 경주 리그라는게 없었다면 쓸모 없는 사람이었을 수 있다. 나라는 존재는 종종 우리가 말하는 이 육체만으로 결정되는게 아니다. 우리는 사이보그다. 우리는 뭔가에 의존하고 그 뭔가는 너무나 중요한 나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떼어내면 우리는 더이상 우리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그저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로 여길 필요가 있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유한성, 특수성 그리고 의존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무한히 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겠지만 이것들은 아주 중요한데도 잘 잊혀지기 때문에 언급할 가치가 더 크다. 우리는 우리가 죽지도 않을 사람처럼 살고, 우리는 스스로가 남과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살며, 우리는 우리가 혼자서도 뭐가 되는 것처럼 사는 때가 많다. 그러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실망하다가 어느 날 우리의 유한성과 특수성 그리고 의존성을 극명하게 느끼는 순간이 오면 크게 충격을 받기 쉽다. 그래서는 안된다. 인간의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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