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자유란 적어도 근대화 이래 가장 많이 말해지는 두 개의 단어들 즉 평등과 자유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자유가 뭘까? 자유를 소망한다면서 우리는 자유를 뭐라고 생각하는가?
자유가 어떤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우선 그 억압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어떤 남자가 사랑에 빠져서 어떤 여자의 노예같은 생활을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남들이 보기에는 그 남자는 매우 억압된 생활을 하는 거지만 그 남자 스스로는 억압을 느끼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일 것이다.
설사 인지를 한다고 해도 어떤 종류의 자유는 비현실적이다. 누군가가 나는 노동이 싫으니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이런 소망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비현실적인 몽상이다. 엄청난 부자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뭐든지 남이 해주는 삶이 좋기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은 누구나 먹고 살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 나아가 생명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굶어죽기로 선택하는 자유를 말하는 것 즉 유지불가능한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소망은 비현실적인 몽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자유에서는 사회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세상과 자원을 다른 사람과 심지어 다른 생명체들과 공유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생명을 위협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그런 나의 행동에 저항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자유로이 지구의 산소를 모두 소모해서 다른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면 그런 나의 자유에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으니 그런 자유를 원하는 거라면 이것도 비현실적이다.
이렇게 자유는 인지하기도 어렵고, 대개 비현실적인 몽상이며,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존재와의 다툼이나 투쟁에 의해서 제약되는 것이라서 아주 간단한 것처럼 생각되면서도 실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것 저것 생각하다보면 도대체 자유란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우리는 도달하기 쉽다.
그렇다면 도달가능한 자유란 어떤 것인가? 여기서 다시 근대화로 돌아가 보자. 자유가 꼭 근대화의 전유물이 아닌데 왜 근대화 이후에는 자유라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할까? 그것은 근대화는 고작 몇백년동안 이뤄진 것이고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변화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롭다는 말은 이데올로기적인 선전문구다. 근대화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변화는 과거의 억압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근대화이후 자유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된 것이다.
근대화가 말하는 자유도 여러가지 것이 있지만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1차산업인 농업중심의 사회에서 2차 3차 산업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변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근대화가 말하는 자유의 한가지 의미를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은 땅에 속박된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이 직업을 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예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유란 현실적으로 삶의 방식이 다양하게 허용되는 정도와 관련이 있고 그래서 어떤 사회적 이데올로기나 기술적 발전과 깊게 연관이 된다는 것이다. 농업사회에서는 먹고 살 방법이 농사뿐이었으므로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거의 먹고 살기를 포기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근대화 이래 삶의 방식은 다양해 졌고 그래서 우리는 더 다양한 삶중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는 자유가 생겨난 것이다.
사냥꾼의 마을에서 우리는 사냥을 하도록 억압을 당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인간은 더 자유롭지만 여전히 억압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의 삶이 가지는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억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산업 사회는 농업 사회, 수렵채집 사회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유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자유란 어떤 궁극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억압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억압이 줄어드는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술, 공동체 그리고 이해가 필요하다.
현대인들이 선사시대 원시인보다 더 부자유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어떤 한 측면만 보면 사실일 것이다. 이 지구상에 인간이 몇백만명 살던 때와 80억명이 사는 지금이 같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술은 인간의 삶에 다양한 가능성을 줘왔고 결국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기술은 인간을 많은 것들로부터 해방해 왔다.
기술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공동체다. 인간이 혼자서만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문명이란 결국은 인간 집단이 협동을 통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텃밭이라도 가꿔서 채소라도 좀 키워본 사람은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인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소비하는데 뭘 하나 내 손으로 만들려고 하면 그렇게 힘들다. 그런데 벌거벗고 살게 아니라면 어떻게 사회 공동체와 떨어져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금도 세계에는 가난한 나라, 전쟁이나 치안문제로 고통받는 나라가 있다. 그 나라에서 인간이 자유로운가? 깡패와 도둑과 강간범이 득실거리지 않는 나라가 당연한게 아니다. 거기에 무슨 자유가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운이 좋아서 기술도 있고, 공동체도 있는 환경에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운이 좋은 경우이므로 이런 의미에서 자유에는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 이해란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가능하지 않은 지를 보는 능력을 말한다. 여기 어떤 집안이 있다고 하자. 그 집안에서는 매번 가문의 질서 운운하면서 당신에게 자식으로서 동생으로서 며느리로서 부모로서 온갖 권리와 의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매우 부자유스러우며 억압된다고 느낀다고하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기 싫은 것을 모두 거부하겠다는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이해없이는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질서, 어떤 의무는 유지해야 하고 꼭 필요한 것인가 그러나 어떤 것은 꼭 필요없는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문의 질서가 답답하다면 가문의 질서 바깥에서도 내가 살아갈 수 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내가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어떻게 얻으며 누구와 어떻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다. 한국이 답답하다면 뭘하기 전에 한국 바깥의 삶이란 무엇인지를 적어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한 소리로 들릴지 몰라도 많은 경우 망각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내키는대로 하기 싫은 일은 안하겠다는 아이들 투정처럼 자유를 찾는다. 그래서는 자유는 늘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하기 싫은 일을 하고 그 댓가를 받는다. 꼭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형편은 더 나빠질 것이다. 그런데 기분이 내킬 때마다 꼭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거나 필요도 없는 일을 열심히 한다면 자유가 늘어날 리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삶이란 본래 이런거라는 선입견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 전혀 눈돌리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억압상태에 있는가 자체를 모른다. 필요없는 짐을 잔뜩 짊어지고 여행하면서 걷는게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자신의 짐중의 상당부분이 지금의 환경속에서는 불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걷는게 힘든 이유를 무거운 짐에서 찾는게 아니라 길이 멀다던가, 자기 체력이 엉망이라던가, 도로포장이 나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할 것이다.
이런 행동들은 어리석은 것이지만 세상으로부터의 유혹은 흔하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애처럼 굴면서 남들도 그렇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보는 관점과 시야에서 사는 건 본래 이런거라면서 남들에게도 그렇게 생각할 것을 권한다. 그래서 그렇게 세상에서 살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따금 부자유스럽고 답답할 때만 뒤를 돌아보면서 자유를 꿈꿀 뿐이고, 과거에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할 뿐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자유를 말하자면 우리는 먼저 기술과 공동체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들이 우리가 가질 수 자유의 한계를 정한다. 기술을 무시하고, 무너진 공동체 속에서 살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자유에는 큰 한계가 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자기를 지켜야 한다. 세상에는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가려는 유혹이 아주 많다. 그 유혹은 반드시 적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친한 가족이나 친구에게서 오는 경우가 더 많다. 그들은 종종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의 삶을 이리 저리 주물러 대려고 한다. 그들과 당신이 다른데도 당신의 삶을 그들의 삶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들의 제안은 종종 웃는 낯으로 당신의 손발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거절하지 못한 몇번의 만남이나 몇번의 제안을 수락한 일이 우리의 삶을 크게 바꾸고 빠져나올 수 없는 억압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직업이나 결혼상대가 좋은 예다. 뭘택해서 어떻게 살든 우리는 어떤 제약을 가지게 된다. 무제한적인 자유란 결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천천히 우리의 생각에 따라 선택하고 그 결과에 따라 그 삶이 주는 굴레를 받아들이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적으로 실패해서 가난해 질 때는 물론이고 남들이 보기에는 성공한 것같아도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왕관이라고 해도 그저 무거운 짐이 될 뿐이요 자유를 빼앗아가는 족쇄일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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