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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제사란 무엇인가?

by 격암(강국진) 2025. 7. 9.

장인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나는 지금 짧은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제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나는 과학자이고 그게 아니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처럼 과학을 믿는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제사나 종교적 절차를 부정하지는 않는 편이다. 액면 그대로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가면 거기에 천국이 있다고 믿는 것이 21세기에는 어리석은 일인 것처럼 제사상을 차리고 거기에 절을 한다고 해서 말그대로 조상신의 가호가 있다거나 무슨 신령의 도움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내게 있어서 종교적인 의식의 큰 의미는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것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영화를 찍기 시작할 때나 새 차를 샀을 때 사람들은 제사상을 차리고 절을 하고 술을 뿌린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세상에는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없는 어떤 존재가 있어서 그것의 도움이 있어야 영화가 무사히 촬영될 수 있으며 자동차 사고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우리는 모든 일의 원인을 우리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는 없고, 그것들을 우리가  다 인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크게 보면 비합리적인 것이고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찍건, 자동차를 운전하건, 사업을 하건, 아이를 키우건 우리는 모두 기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큰 존재의 가호를 기원하게 된다. 그것이 지나친 확신을 피하게 만들어 주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예를 들어 모든 일이 잘 되어가는 것같아도 우리가 교만한 태도를 가지면 신령의 분노를 사서 벌을 받게 될거라는 생각은 액면으로만 보면 어리석은 미신이지만 확률이나 인과의 의미로 보면 그렇게 말이 안되는 생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할 때 돌아가신 분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의 의미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집안 제사의 의미는 그정도에서 멈추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제사의 의미와 형식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돌아가신 분을 진정으로 생각하며 기념하는 것이 정말 명절 제사이고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제사일까? 그런 경우에는 더 말할 것이 없지만 적어도 내 주변의 제사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족적 질서라는 것에 대한 재교육의 장에 가깝다. 제사의 형식이나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태도를 볼 때 나는 그들은 어찌보면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들이 정말 관심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집단의 위계 질서다. 이야기를 잠깐 돌려서 효의 사상에 대해서 잠깐 말해보자. 제사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대한 교육하고 비슷하다. 부모는 자식의 원인이다. 이 말은 설득력이 있다. 부모가 없으면 자식이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자식의 유일한 원인이 부모라는 주장이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 자식은 스스로 자라고, 부모를 넘어서는 환경에 의해서 자란다. 부모가 모든 것을 다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강하게 강조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장점도 있다. 결국 인간 사회란 인간 사이의 협력과 믿음에 의해서 풍요로워지는 법이다. 그러니까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더 풍요로운 미래를 만드는 한가지 중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을 자기 몸처럼 생각하면서 키우고 자식은 부모를 자기와 뗄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하라는 효의 정신은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해도 21세기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쓴 것을 천천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내가 효의 정신이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기위해서는 여러가지가 필요하고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효의 정신만으로 충분한 시대와는 거리가 멀다. 하물며 부모와 지식간의 관계도 아니고 핵가족이라고 부르는 직계 가족 내부의 관계를 말하는 것도 아닌 대가족 집단의 질서를 말하는 거라면 그러한 질서와 관계가 21세기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고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더욱 떨어진다. 

 

이러한 나의 평가에 대해서 관계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말하는 분들은 부모 자식 간의 관계나 친인척간의 관계를 이득으로 평가하는 태도를 언짢아 할 법하다. 그러나 나는 결국 모든 것은 이득과 손실로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믿는다. 다만 우리가 이득이나 손실로 말하는 것이 어떤 수준에 있는가에 따라 이 태도의 의미가 다를 뿐이다. 이것을 물질적 사회적 의미로만 평가한다면 관계의 이익과 손실을 따지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맞다. 그러나 윤리적 철학적 이득이나 손실로 말하자면 그것은 이제 어떻게 살것인가, 우리의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를 따지는 수준이 된다. 이 수준에서 이익과 손실을 따지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육체적 자아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수준에서 우리는 결국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앞에서도 혼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내 삶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를 말할 때는 내가 가족이나 부모를 위해 생명을 던지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은 나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제대로 살기 위해서 즉 가치있게 살기 위해서 생명을 포기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윤리나 철학은 더 좋은 것을 향해가고 있고 가야 한다. 얼핏 보면 절대적인 것같지만 결국 인간의 관습이나 인위적 사고가 만들어 낸 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렇다고 할 때 과연 가족의 제사가 바람직한 것일까? 그럴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 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를 본적이 있냐고 하면 한마디로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까지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제사란 철학수업이다. 아마도 먼 과거에는 그것이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방법, 삶의 가치를 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가치있는 철학수업이었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후진적이고 어리석은 생각을 더욱 공고히 하는 엉터리 철학수업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나는 지울 수가 없다. 낡은 형식에만 집착하는 나머지 정신은 희미하고 낡아버렸기 때문이다.

 

제사하면 강조하는 것이 무슨 홍동백서니 하는 제사상차리는 법이고 향을 피우고 술을 올리고 절을 하는 방식이다. 지금도 제사에 참석하면 나는 이런 제사의 의미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곧잘 보곤 한다. 그러나 그것에 공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농경사회에 살고 있지도 않고 먹는 것의 의미도 달라졌는데 낡은 시대에나 의미가 있었을 것을 엄숙하게 말하는 것이 정말 의미가 있을까?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고 장남과 차남을 구분하는 가족 위계 질서라는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

 

나는 종종 이런 낡은 것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서 사람은 잊어버리고 형식만 보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의 언행을 보면 살아계신 부모님에게는 칼국수하나 대접하는 것을 귀찮아 하면서 돌아가신 다음에는 비싼 돈들이고 고생해서 낡은 제사밥을 차리고 효자 노릇하려고 하는 느낌이 든다. 살아계신 부모님의 집에는 관심도 없었으면서 돌아가신 부모의 뼈가 어디서 어떻게 있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이 많다. 이런 태도를 지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종종 내게 공포를 준다. 그것은 마치 진지한 태도로 나를 칼로 찔러 죽이는 살인자가 입으로는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그 사람을 억압하고 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절대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지닌 것을 보는 것만큼 답답하고 숨막히는 일도 없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제사란 무엇일까? 그건 기본적으로는 각자가 답할 일이지 내가 답할 일은 아니다. 각자는 각자의 환경과 입장에서 제대로 된 제사를 정의하고 그걸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전통적 형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내가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형식이 실질과 이어질 때는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다만 제사란 하나의 철학수업이다라는 문장이 기억되었으면 한다. 우리가 그걸 통해서 뭘 느끼고 배울까를 생각하지 않으면 제사는 의미가 없다.

 

그걸 전제하고 나의 입장에서 제대로 된 제사를 말해 보자면 무슨 껄끄러운 제사음식이니 형식이니 하는 것은 다 헛것이다. 애초에 나는 그런 제사의 형식 자체가 해방이후에 퍼진거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안동지방같은 곳의 특정한 집안의 제사형식이 언론을 타면서 마치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퍼졌다는 것이다. 제사지내는 사람들이 곧잘 정신적 지주로 생각하는 공자님 말씀에는 흔히 말하는 제사의 형식은 하나도없다. 홍동백서 같은 것은 역사적 근거도 철학적 근거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제사는 향을 피우고 모여서 이야기하는 파티같은 것이었으면 한다. 절도 필요없다. 다만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그 향앞에서 약간의 예의정도만 지키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 사람을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향 앞에서 모이고 그저 자유로이 먹고 마시고 이야기한 후에 향이 꺼지면 제사가 끝나는 것이면 좋겠다. 

 

이같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죽은 자들의 연장선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줄 것이다. 우리는 그냥 자신의 힘으로 사는게 아니고 죽은 자들은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들을 기억할 것이고 언젠가 우리가 죽고 나면 우리도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모두 평등하며, 어떤 고정된 질서를 고집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 이런 제사의 형식에서 분명해 질 것이다. 우리는 그저 망자를 기억하고 싶을 뿐이고, 그걸 위해서 특정한 길이의 시간을 써가며 한 마음이 될 뿐이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죽은 자의 뼈를 묻어서 봉분으로 만들고, 그 사람에게 절하고 음식을 바친다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 정말로 21세기에 맞는 철학수업일까? 제사가 철학수업이라는 나의 말은 우리는 모두 수도를 같이 하는 도반과 같은 존재라는 나의 평상시의 말과 이어져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떤 의미에서 그래서 모든 모임과 만남은 철학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만남이 가치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만남이 철학수업이며 우리가 수도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원하는 도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삶에 대해서 1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정신적 깡패같은 사람들이 거들먹 거리기 위해 유지되는 제사는 21세기에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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