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펜글씨에 대하여

by 격암(강국진) 2025. 10. 8.

나는 책을 읽을 때 가급적이면 독서 노트를 적어가면서 읽으려고 하는 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이나 책에 대한 나의 이해가 생겼다가 금방 잊혀지게 된다. 책 한권을 읽었을 때는 그렇게 적혀진 독서 노트를 한번 더 읽는 것이 독서를 하는 데 있어서 큰 카타르시스를 준다. 즉 꾹 참고 책을 다 읽어서 완성된 독서 노트를 읽을 때 나는 진짜로 책을 읽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책의 전부를 한꺼번에 조망하는 느낌이며 참고 끝까지 노트를 작성한 덕분에 그걸 다시 읽을 때는 해냈다는 느낌을 받는달까.

 

그러다 보니 나는 대개 종이에 펜으로 글씨를 써가며 독서를 한다. 물론 소설같이 그렇게 하지 않는 장르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나는 워낙 악필이라 펜이 내 마음에 드는 것이냐 아니냐가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펜은 종이에 글씨를 쓰는 걸 싫어하는 나에게 그 싫어함을 더 증가시킬 뿐이다. 연필이나 볼펜따위를 나는 여간해서는 쓰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너무 매끄러운 나머지 안그래도 엉망으로 흘러가고 싶어하는 나의 손끝을 더 엉망으로 흘러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주 가는 선으로 써지게 되어 있는 얇은 볼펜을 잡으면 이번에는 써져 있는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래저래 나는 펜에 대해 까다롭다. 그래서 사실은 일본에 살던 10년 이상 전부터 오직 한 종류의 펜만 써오고 있었다. 그 펜은 마이크로에서 나온 유니볼이라는 펜인데 일본의 펜이라 국산을 써볼까 하여 이것저것 바꿔보았지만 좀처럼 내 손에 맞는 것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때로 몇자루씩 이 유니볼펜을 사두었다가 쓰곤하는데 그러다가 이 펜을 더 사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계속 해서 다른 펜들을 써보고 있다. 

 

그런데 최근 나는 아주 싼 대체품을 얻었다. 이 펜은 다이소에서 파는 국산펜이었는데 기본적으로 만년필같은 펜이다. 차이가 있다면 만년필처럼 잉크를 주입하게 되어 있지 않고 첨부된 카트리지를 갈아주게 되어 있다. 아마 천원인가 2천원인가 했던 싼 펜이다. 나는 만년필을 쓰는게 내 마음에 든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다. 그 펜이 종이를 서걱서걱 긁는 느낌이 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도 왜 진작에 만년필을 쓰지 않았냐고 하면 만년필은 잉크 주입이 지저분하게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대개는 몸통이 굵어서 둔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펜은 그런게 없다. 

 

독서 노트를 펴서 이 펜으로 글씨를 쓰다보면 왠지 글씨를 더 쓰고 싶은 생각이 든다. 종이를 서걱서걱거리며 글자를 쓰는 것이 왠지 모를 쾌감을 준다. 나는 젊어서 부터 컴퓨터로 글을 써왔기 때문에 이제와서 글을 펜글씨로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그 밖에도 많은 노트를 스마트폰의 앱에서 하기 때문에 사실 실제로 손을 써서 글씨를 쓸 이유가 이제는 거의 없어졌다. 만약 내게 독서노트를 작성하겠다는 이유가 사라진다면 나는 정말 글씨를 쓸 이유가 없는 셈이다.

 

펜글씨를 쓰는 건 근사하다. 독서를 위해서 하는 것이 독서노트 작성이지만 반대로 노트 작성을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최근에는 필요한 독서라고 생각하지만 매우 지루한 책을 한권읽고 있다. 한시간 가량 읽고 나면 머리가 둔해지는 것같아서 더 읽기 힘들정도로 지루한 통계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그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나는 매일 같이 운동하듯 같은 시간에 한시간의 독서를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이 되면 펜으로 독서노트에 이따금씩 내가 읽은 것에 대한 생각이나 그 챕터의 내용에 대해 얼마간의 노트를 쓴다.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독서를 하는 것보다 더 즐겁다. 

 

펜글씨란 낡은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학교에서 조차 PDF같은 컴퓨터 파일을 받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필기조차 하지 않거나 한다고 해도 태블릿 화면에다 대고 한다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낡은게 때로는 컴퓨터 타이핑같은 신문물보다 더 좋을 때도 있다. 그것은 내 손에 훨씬 더 원초적인 자극적 감각을 제공한다. 펜글씨를 즐긴다는 것은 어쩌면 어떤 사람에게는 멋진 글씨를 쓰는 것에 대한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애초에 그런 아름다운 글씨를 쓰는 재능은 없다. 내게는 다만 종이를 서걱거리며 내가 원하는 글자를 쓴다는 그것이 멋지고 자극적이다.

 

나는 모처럼 내가 쓸 새로운 펜을 얻게 되었다. 게다가 엄청나게 싸기도 하다. 하지만 이 펜은 분명히 인기가 없을 것이므로 어쩌면 금방 사라질지도 모른다. 요즘 누가 글씨를 손을 쓰겠는가. 이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렇다고 펜촉을 잉크에 담가서 글씨를 쓰거나 만년필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말이다. 잊어버리기 전에 다 사라지기 전에 다이소에 가서 있는대로 사둬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제별 글모음 > 생활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을 뒤로 미루는 사람  (1) 2025.10.10
인간의 행복  (5) 2025.10.09
각자의 입장과 닫힌 세계  (0) 2025.09.11
나를 바꾸는 타인, 타인을 바꾸는 나.  (3) 2025.08.23
자유란 무엇인가?  (1) 2025.08.2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