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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인간의 행복

by 격암(강국진) 2025. 10. 9.

우리는 행복하고 싶다. 하지만 인간의 행복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옳은 것과 행복한 것이 혹시 충돌하지는 않나를 고민해야 한다. 왜냐면 인간의 유전자와는 달리 세상은 수천년전 문명의 시대로 들어선 이래 변해왔으며 점점 더 빨리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전자로 정의되는 인간을 인간으로 정의하고 그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21세기의 사회 환경에서는 옳지 않은 일로 여겨질 수 있다. 

 

우리의 생각과 현실은 같지 않다. 예를 들어 인간이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맛있는 음식의 양이 무한대로 증가할 때 인간이 무한대로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무한대로 음식을 소비할 수도 없거니와 음식을 많이 먹으면 먹을 수록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맛이 없어질 것이고 나중에는 그 음식을 먹는 것이 고문처럼 고통스러운 일로 변할 것이다. 이같은 것은 개인차원에서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다. 누구도 배불러 죽을 정도로 음식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인 주장이나 개념은 일단 한번 만들어 지면 수정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행복이라는 관념이 만들어 지고 고정되면 누군가가 불행하다는 말을 할 때 사회적으로는 무조건 맛있는 음식을 더 공급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맛있는 음식을 돈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라. 불행의 원인은 돈이라고 믿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 가득하지 않은가?

 

인간은 무기력한 아기로 태어나서 늙어 죽는다. 그래서 인간은 타인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키워줘야 성인이 되어서 살 때도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늙어서 기력이 없어지면 누군가가 돌봐줘야 살아갈 수 있다. 스마트폰을 잘 쓰지 못하는 노인들을 보라. 이건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다. 고립되고 정보가 없어지면 노인은 돈이 있어도 매우 위험해 질 것이다. 인간처럼 긴 유년기를 가진 동물은 그래서 공동체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현실도 최근에는 많이 바뀌었다. 

 

오늘날에는 사회 공동체가 필요한 것을 제공하기 때문에 가족 공동체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집을 직접 짓고 음식을 공동으로 해서 먹으며 짚신이며 옷을 직접 집에서 만들던 시절, 가족은 생활과 생산의 공동체이기도 했다. 대가족은 노인들이 죽을 때까지 보호를 받는 요양원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서 살다가 죽었다. 그런데 시장이 점점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시작하자 음식이든 옷이든 집이든 모두 돈으로 사게 되었다. 따라서 마치 아기가 어른이 되고 늙어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기 위해서 돈만 있으면 충분할 것같은 착각을 줄 정도다.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돈 잘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모는 아이에게 돈을 줘야 할 의무를 가지며 늙은 조부모는 자녀들에게 유산을 남겨주면 할 일을 다 한 사람처럼 느끼게 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돈을 벌러 태어나며 남에게 돈을 잘 주면 할 일을 다한 훌룡한 인간이 된다. 

 

그러나 이런 관념들이나 사상들이 정말 인간의 현실일까? 그게 다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쪽이 오히려 현실을 모르는 낭만주의자일까? 인간의 감정과 생리는 여전히 백년전 천년전과 그리 다르지 않다. 바쁜 21세기라고 해서 아이를 임신하지 1달만에 출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아이가 2달만에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요즘은 한국은 물론 전세계의 출산율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혹시 우리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을 무시하고 세상을 지나치게 인간이 만든 관념을 통해서 파악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누구도 행복하기 어려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마치 인간의 발 사이즈가 실제로는 270mm쯤 되는데 아니다, 인간의 발은 사실 500mm라고 주장하고는 발에 맞지 않는 신을 만들고 그걸 신고서 불편해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다시 가족 질서로 돌아가 보자. 현대 사회에서는 가족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구시대적이고 따라서 일종의 억압을 찬양하는 것처럼 말해지기 쉽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족을 이뤄서 살던 시절에 우리가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믿고 있었는데 현대의 제대로된 이데올로기를 믿는 지금은 그런 억압된 세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식으로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제대로 된 이데올로기는 혹시 그냥 돈과 즉각적인 쾌락을 최고로 여기는 시각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돈 잘벌고 그 돈을 펑펑 쓰면서 살면 그걸로 인생 잘 살은 것이고 계속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를 옳은 것으로 여기고 그와 다르게 말하는 전통적인 문화는 억압이고 미개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나는 꼭 과거의 관행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현실을 진짜로 길고 넓은 시각으로 봐야 한다. 요즘 세상에서는 코앞의 일만 보고 자신의 선택이 당연한 거라고 말하기 쉽다. 과거에는 남녀가 30이 되기 전에 결혼해서 아이를 두세명 혹은 그 이상 낳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이럴 때 우리는 뭘 어떻게 반성해야 하는 걸까? 우리의 선택은 정말 어쩔 수가 없고 당연한 걸까? 

 

1940년에 태어나신 우리 어머니는 3형제를 낳아서 그 아이들을 다 키웠다.  그 아이들은 지금 모두 자라서 결혼하고 손녀 손자를 낳았으며 한국에 살고 있다. 나는 물론 우리 어머니가 겪으신 고생이 부럽지 않지만 요즘은 어머니에 비하면 나는 훨씬 더 위태로운 노년을 보낼거라고 느끼고 있다. 우리 어머니는 장성한 자식이 셋이나 있고 손녀 손자들까지 성인이 되었으므로 그녀를 걱정해줄 사람이 많다. 자식들도 손자 손녀들도 그녀와의 기억을 공유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나에게는 그저 아들 딸 둘이 있을 뿐인데 이 두 자식도 좀 더 시간이 흐르면 내 주변에 살 가능성이 별로 없다. 게다가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안하거나 늦게 한다. 나는 어머니처럼 많은 사람을 내 주변의 가족으로 가지지 못할 것이다. 소통도 별로 없을 것이다. 결국 내 주변에 누가 미래에 있건 그 사람들은 나와 그다지 많은 추억을 공유하지 못할 것이다. 

 

나야 그렇다고 치자. 요즘 청년들은 아예 결혼을 늦게하거나 아예 안하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도 많다. 아이를 낳아도 늦게 낳는다. 그래서 내 아이들은 이미 20대 중반이지만 나와 나이가 별 차이가 나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아이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 아이들이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면 그들은 정말 원자적인 세상에 혹은 개인주의적인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그 아이들이 노인이 되면 어떨까? 지금의 젊은이들은 혹시 고독사하는 노인들이 사는 세상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변에 사람이 있다고 해도 실은 그들이 모두 낯선 이방인인 세상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젊었을 때는 몰라도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떨어지고 기억력이 나빠질 때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 되지 않을까? 

 

나는 절대 과거의 관행을 무조건 옳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나 개인적 선택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결혼을 하건 하지 않건 잘못된 선택은 없다. 가족을 아름답게 미화만 할 생각도 없다. 가족이 지긋지긋하다는 사람의 주장도 인정할 수 있다. 다만 어쩔 수가 없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점점 코앞의 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대책은 있는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 뿐이다. 

 

지금의 흐름이 그대로 계속될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걸 직선으로 약간만 더 미래로 긋는다면 결혼제도는 붕괴할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데 결혼제도가 전제하는 세상은 느리고 변하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10년뒤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데 50년 만기 적금을 드는 느낌이랄까. 매일 같이 득실을 따지고 네것 내것을 따지는 사람들이 어떻게 평생을 같이 하며 죽을 때까지 살 수가 있겠는가? 요즘은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단순한 동거하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많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현실이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라는 사실도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물적 리듬은 여전히 21세기에도 느리다. 아이는 아이의 리듬으로 성장해야 하고, 어른도 노인도 인간의 리듬으로 살아야 한다. 기계의 리듬이 백배 빨라진다고 인간 삶의 리듬을 백배 빠르게 하면 인간의 정신이 붕괴하고 인간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의 끝이 지옥일 수 있다. 침팬지나 고릴라도 가족이 있다. 정말 문명이 좀 발달했다고 가족제도는 과거의 것으로 생각해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까? 유전적으로는 인간은 수십만년전의 인간과 다를게 없는데?

 

이 글은 대안에 대해서 말할 것을 강요당할 글이므로 나는 나 나름의 생각을 쓰고 이 글을 마무리 하겠다. 이런 문제들 앞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두가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인간의 유한성이고 또 하나는 인간에 대한 보다 전일론적인 생각이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아는 것에도 느끼는 것에도 한도가 있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생각은 너무 당연해서 누구나 아는 것같지만 그 생각을 기억하고 곱씹으면 많은 새로운 결론이 나온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도구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다. 내가 나혼자서 모든 걸 알고 있고 알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너무 자신만만해서는 안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결국 드넓은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당연해 보이는게 결코 당연한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멈춰설 필요가 있다. 아주 느려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희미하지만 우리가 이따금 느끼는 위화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이 당연한게 뭔가 당연한 것같지 않은지를 멈춰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도구를 쓰고 도움을 받고 거기에 운이 좋으면 우리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될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이게 꼭 필요하다. 너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은 점점 우리를 작은 세계에 가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기꾼들이 제일 잘하는 말이 시간이 없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바로 그 말을 우리에게 자주 한다. 시간이 없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패하면 모든 게 끝이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내가 좋아하는 예가 있다. 지표면에서는 북쪽이 의미가 있지만 우주공간에 가면 북쪽이 의미가 없다. 북쪽이 뭘 의미하는가가 당연하지 않다. 우리가 마음을 넓히고 발상을 바꾸는 것은 종종 이런 효과가 있다. 뭔가가 기초부터 무너진다. 그리고나면 아주 당연한 선택이 당연해지지 않는다. 사실은 급할게 없다. 

 

가족제도의 붕괴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 서둘러 결혼하고 애를 낳자는 것이 결론이 될 수는 없다. 정답은 없다. 어떤 답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혹시 북극에 살면서 적도에 사는 사람이 덥다고하니까 나도 더운가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여러분들은 정말 자기 주변을 자기 눈으로 제대로 보고 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유한성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좀 더 크고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그럴때 지속가능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에게 맞는 행복한 답을 찾을 때 전체적으로도 좋은 미래가 올거라고 나는 믿는다. 

 

두번째는 전일론적인 생각이다. 이는 현학적인 단어지만 다른 단어를 나는 모른다. 이 글의 문맥에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나라는 것을 내 몸뚱아리로 파악하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정보적인 차원에서 그렇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저런 정보를 생산하고 기록하고 그걸 정리한다. 우리는 그걸 쌓아올려야 한다. 그게 나다. 물론 나는 나에 대한 기억을 내 뇌 안에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게 나의 전부가 아니다. 나의 흔적은 내 주변의 환경속에, 사람속에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연구생활동안 논문을 썼다. 나는 책을 출판한 적이 있고, 18년간 블로그에 글을 써왓다. 나는 상당 부분 이 연구와 글속에 있다. 나는 결혼했고 아이를 낳아서 길렀다. 내 아내도 내 아이들도 독립적인 인간들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나다. 나는 평생 몇권인가의 책들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었다. 그 서가가 나다. 나는 그렇게 확장되어져 왔다. 

 

내가 기본적으로 이 몸뚱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저 이 몸뚱아리만 내가 가지고 있으면 내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같은 일을 수십년동안 반복하면서 아무 것도 남지 않아도 나는 그저 여전히 나이고 그런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전일론적인 시각에서 보면 당신은 그저 음식을 똥으로 만드는 기계로 살았을 뿐 아무 의미가 없는 시간을 보낸 것일 수 있다. 어떤 나만의 느낌도, 새로운 체험도, 표현도 없이 진부하게 수없는 사람들이 한 일을 반복한 것밖에는 하나도 새로운게 없었으며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걸 기록하지도 않고 자꾸 똑같은 다른 일들로 덮어버렸다면 말이다. 마치 매일 같이 그림 그리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완성은 없이 그걸 지우고 다시 그리는 것만 반복하는 화가처럼 말이다. 시간은 흘렀지만 졸작이든 명작이든 완성해서 남긴게 하나도 없는 화가인 것이다. 돌아보면 시간은 빨리 흘렀고 그 시간동안 내가 뭘 했는지 기억도 잘안난다. 나이 들어 생각해 보면 체면같은 부질없는 것에만 신경썼을 뿐이다. 같은 것만 반복했다.

 

인간의 행복은 확실히 그 인간이란게 그저 유전자로 결정되는 인간이라면 현대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수렵채집단계에서 문명단계를 지나 이제 AI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백년전에는 비행기를 타본 사람이 드물었지만 요즘은 비행기따위는 버스와 별반 차이도 없다. 인간은 도구와 연결을 통해서 확장되어져 한다. 그렇게 전일론적으로 확장된 인간의 행복을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 이미 수렵채집인의 행복은 문명인의 행복과는 다르고 지금의 문명인의 행복도 앞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스스로를 수렵채집인이나 침팬지 같은 원초적인 것만 추구하는 존재로 파악한다면 환경과 우리 자신이 서로 잘 맞지 않게 된다. 원시인이 21세기 도시에 떨어지면 자기 스스로를 망칠 것이다. 앞으로는 우리가 우리 몸뚱아리에 불과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비슷한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물론 육체를 그 핵심으로 하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이 몸뚱아리가 요구하는 쾌락만을 위해서 살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성장하는 존재이고 환경에 침투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의미를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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