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사람을 보는 서로 다른 두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선함의 관점이고 하나는 신뢰의 관점이다. 이 두가지는 결코 서로 배타적은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선한 동시에 믿을만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관점은 서로 같지 않고 이걸 혼동하면 괴로움을 겪게 된다. 그리고 살아보면 볼 수록 권장할만한 관점은 신뢰의 관점이지 선악의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선함과 신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세상을 선악의 관점으로 보게 된다. 이는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규칙을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누가 나쁜 사람이고 누가 좋은 사람인지를 세상은 아이들에게 가르쳐 준다. 그들은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되라고 배우고 그런 사람들을 믿으라고 배운다. 악한 사람은 믿을 수 없다. 옳은 일이 뭔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단지 그걸 할 수 있는 의지가 중요한 문제다. 자연히 우리는 규칙을 지키는 인간으로 이뤄진 공동체를 이상적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같은 주장은 뭐가 옳고 그른지 즉 행동에 대한 규칙이 분명한 작은 세계안에서만 명확하고 옳은 이야기다. 예를 들어 학교에 지각을 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런 일은 하지말아야 한다. 하지만 학교에 오다가 길에 쓰러진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을 돕다가 늦었다면 어떨까? 학교보다 넓은 세상에 사는 어른에게는 이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이 자명할지 몰라도 그런 일을 평생 보지도 겪지도 않은 아이들에게는 그런 일에 대한 규칙이 없다. 그들에게는 그저 지각하면 나쁜 일이라는 규칙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각을 하는 한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옳다는 판단은 절대로 그들에게 분명한 일이 아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세상을 사는 것은 규칙을 지키는 일로 여기는 사람은 많다. 그들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일을 만나면 새로운 규칙을 추가한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예와 같은 상황을 만났다면 지각하면 안된다는 규칙에 예외 규칙을 하나 더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잘 산다거나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혹은 윤리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여전히 규칙을 잘 지키는 것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이고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은 선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학교같은 인위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라면 규칙은 잘 작동하지 않는다. 해변의 규칙과 결혼식장의 규칙이 서로 다르듯 세상에는 무한히 많은 상황이 펼쳐지고 그 각각의 상황에서는 규칙은 다를수 있다. 따라서 고정된 규칙만으로 행동하면 결혼식장에서 비키니를 입고 걸어다니는 것같은 행동을 하게 되기 쉽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규칙에 따라 사는 방식을 택해도 그것이 전부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방식의 삶은 환경이 변화하지 않고 단순한 상황에서는 문제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매우 효율적이고 객관적이다. 왜냐면 사람들이 고정되고 확실한 원칙대로 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백년전이나 천년전이라면 크게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 때는 사람이 어떤 마을에 태어나면 대개 그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사도 잘 다니지 않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익숙한 환경속에서 살았다. 쌍놈으로 태어나면 평생 쌍놈이고 양반으로 태어나면 평생 양반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런 환경이 있는데 그게 학교다. 학생들은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하루 종일을 학교라는 공간안에서 생활한다. 그런데 학교는 학교 바깥의 세계에 비하면 지극히 단순한 공간이다. 만나는 사람도 제한적인 작은 마을이며 학생도 선생도 각자 고정된 신분을 가진다. 우리는 동급생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학교에 뭐가 있는지 알며, 앞으로 몇년간 어떻게 인생이 흘러갈지를 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학교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삶을 기본적으로 규칙을 지키는 것에 대한 것으로 알고 세상을 선악의 관점으로 보게 되기 쉽다. 학교를 떠나 회사를 가서도 그렇게 살기 쉽다.
그러나 눈치 빠른 학생이라면 학교 바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아이들에게도 무한대의 정보를 제공한다. 그 결과 학교내에서 선생님의 권위가 추락한지 오래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학교 안의 세계에서만 살도록 하려고 하지만 아이들은 학교 바깥의 관점까지 습득하게 되고 어른들이나 선생님이 말하는 규칙이 그다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일찍 알게 된다. 그걸로 그들은 선생님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이것이 항상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학교안의 세상만 아는 것도 오늘날 좋은 일이 아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악은 악한 사람들이 저지르는게 아니다. 그보다는 법을 지키는 무지하고 무감각한 사람들이 저지른다. 히틀러의 명령을 비판없이 수행하는 아우슈비츠의 독일군처럼 그들은 아무 생각없이 관습대로 행동하고 말한다. 규칙만 아는 사람들은 로보트처럼 무감각하다. 그래서 그 규칙이 무너지면 한도 끝도 없이 나쁜 행동을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경악스러운 학폭도 그들 스스로는 그냥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아파트 경비원이나 식당 종업원을 로봇이나 자판기다루듯 혹은 노예나 하층민 다루듯 하는 사람을 보면 곤충을 재미삼아 찢어죽이는 어린 아이가 생각난다. 그들은 남의 가슴에서 피가 철철 흘러도 그것에 대한 아무런 공감능력이 없다. 반면에 자기 발가락이 아프면 세상이 망하든 말든 자기 발가락만 본다.
그런데도 앞에서 말했듯이 세상은 그저 규칙을 지키는 사람을 양산해 내고 있다. 사람들이 현실사회와는 다른 학교안에서 지내는 시간은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학교교육의 승자라고 할 수 있는 명문대 학생이나 의대나 법대같은 인기학과의 학생일 수록 매국노나 정서적 장애자일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 사려깊지 않은 사람과 깊은 관계를 오래 가지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그 사람이 섭섭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면 화가 나고 좋은 사람으로 알았는데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건 좋고 나쁜 것의 문제가 아니다. 능력개발의 문제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가 나와 부딪혔다면 나는 화가 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알고 보니 시각장애인이었다면 화는 사라질 것이다. 이 사람은 나를 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사려깊음은 지혜와 지능과 수련의 결과다. 새는 하늘을 날고 개는 그럴 수 없는 것처럼 사려깊지 못한 사람이 한 순간에 그렇게 될 수 없고, 대개는 시간이 지나도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변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장애가 있는 사람을 양산하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주변 사람과 대화를 한다. 그러면서 서로의 관점을 전달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래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환경이 본질적으로 규칙의 인간을 양산해 내는 상황일 때 대화와 말의 힘은 지극히 제한된다. 사람이 배울 수 없고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이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말로 그 사람을 설득하고 이해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도 거짓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내 마음을 알겠는가. 배우자나 자식도 내 마음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이 소중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그것이 규칙을 지키는 사람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게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일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상황이 있고 유한한 우리들은 서로가 아는 것을 다 모른다. 다만 나는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 주려고 할 뿐이고 상대방도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할 때 함부로 판단하는게 아니라 차분히 섬세하게 사려깊게 말하고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일을 과장하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도 일은 잘못될 수 있고, 오해도 발생한다. 일은 항상 잘될 수만은 없다. 다만 모두가 최선을 다했기를 기대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 무슨 혜택을 주고 받고 도움을 받았는지도 모르면서 살아간다. 아이는 자신을 돌봐주는 부모의 입장을 다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신뢰할 수 있는 인간들로 이뤄진 사회가 나에게 뭘 어떻게 해주고 있는지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유한하다.
사려깊지 못하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냥 로보트처럼 원칙대로 사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뭐가 더 중요한지 뭐가 덜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일을 해보지 않았다. 규칙대로 사는 것, 선악의 개념대로 사는 것은 나쁜 것은 모두 나쁘고 선한 것은 모두 선하다는 흑백론적인 관점을 만든다. 하지만 세상을 여러가지 문맥으로 더 깊고 크게 살피면서 행동하려는 사람에게는 항상 한가지 질문이 등장한다. 뭐가 가장 중요한 것인가? 뭐는 어찌되든 크게 상관없는 것인가?
소매치기도 살인도 모두 범죄다. 소매치기 하면 안된다는 말이 옳지 않냐는 질문을 하면 그 답은 자연히 그렇다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깊고 크게 보면 이 세상에 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왜냐면 모두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어떤 원칙도 결국은 그것이 소외시키는 억울한 사람을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뭐가 더 크고 작은가를 따질 필요가 있다. 교통신호는 중요한 것이지만 독재 타도 운동을 할 때도 절대적인 것일까? 심지어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원칙도 한계가 있다. 한 사람의 목숨이 동물 한마리의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것은 옳은가? 그렇다면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생물계의 한 종을 멸종시키는 것은 어떤가? 사람의 생명은 무한히 소중한가? 국가를 배신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무한히 중요한가? 아니면 국가 공동체의 가치는 사소한가? 국가는 어느 정도나 중요한가? 결국 크고 넓게 보기 시작하면 우리는 역시 뭐가 가장 중요하고 뭐는 사소한가라는 최적화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뭐가 옳은가 틀린가같은 흑백론적인 질문은 옳지 않다. 이상적으로는 하나도 포기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세상에는 그런게 없다.
문제는 우리는 유한하고, 나에게 중요한 것이 반드시 절대적으로 객관적으로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 말한 선악의 관점에 비하면 신뢰와 사려깊음의 관점은 규칙도 없이 애매모호한데다가 결론도 주관적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흔히 무시된다. 사람들은 규칙을 지키는 인간을 찬양하는 일로 돌아가 버린다. 그러나 진정으로 세상을 지키는 사람들은 신뢰할 수 있는 인간들이다. 사려깊지 못하고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며 이런 저런 원칙은 절대적이라고 과신하는 사람은 잠시간 크게 성공할 수 있지만 결국은 거대한 악이 되고 만다. 어떤 시스템도 결국은 한계가 있어서 모순을 누적시키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규칙을 지키는 인간들의 공동체인 것 이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우리는 모두가 유한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이 복잡한 세상을 돌아가게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어떤 고정된 규칙들로 모든 걸 대처 할 수 없다. 규칙이 필요없다거나 안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실은 우리의 일상은 기계처럼 정해진 규칙들의 세계속에서 대부분 돌아간다. 한국에서는 모두가 같은 도로교통법을 지킨다. 그러나 그것이 안 통하는 때와 장소가 있고, 그것이 실은 아주 중요한 때와 장소일 때가 많다. 그럴 때 규칙의 세계는 무너진다. 생각보다 쉽게 무너진다. 왜냐면 모든 규칙은 모순과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깊고 넓은 시야로 습관을 넘어서서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대부분 적어도 당대에는 그걸 하고 있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주고 이해하지도 못하는데도 세상을 지키는 사람들이 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지금의 한국은 일제시대에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있는 것이다. 모두가 그걸 포기했다면 지금 한국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독립을 위한 노력의 가치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는 것과 당대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 당대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알아서 한다. 그래서 한국이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조선인들중에 있엇으니까 조선이라는 나라와 문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고지식한 로보트같은 인간들은 세상을 지킬 수 없다.
거창하게 독립운동같은 게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성실하게 규칙을 지키는 사람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귀하게 여겨야 할 사람들은 그보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이 무너져 가는 세상의 구석구석 어딘가에서 누가 알아봐 주지도 않는데 홀로 세상을 지키고 있다. 그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망이 이 세상을 지키고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최후의 망이다. 그 망은 고정된 규칙으로 이뤄진 것도, 정확한 계산과 교환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 망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서로를 다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것은 신뢰의 망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가진 이유를 다 모르고, 알아도 내게는 다 납득이 안되지만 그래도 서로가 최선을 다해 옳은 일을 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의 망이다. 옳고 그른 것을 꼼꼼히 철저히 따지자는 말은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일을 어설프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궁극에 가면 그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건 결국 불안해서 남의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걸 내가 콘트롤하겠다는 것이다. 믿음이나 신뢰는 논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믿음, 신뢰가 없이는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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