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서울자가에대기업다니는 김부장이야기를 3편정도 봤다. 이 드라마는 괜찮은 드라마라고 생각하지만 이 글에서는 드라마 자체의 평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드라마는 낡지만 더욱 중요해진 문제를 지적하는 드라마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근대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근대사회는 사람을 하나의 조직의 부속품으로 만든다. 그래서 교육은 취업하려고 하는 것이고 대기업의 사원은 대기업이라는 조직의 훌룡한 부속품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고질적인 문제가 적어도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조직 내부의 경쟁이다. 다른 하나는 세상의 변화다.
먼저 경쟁을 보자. 부속품은 계속 평가받고 교체되거나 보상받는다. 기업의 경우는 더 높은 이윤을 올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평가에 대한 압박을 높이는데 그것은 그 안에서 일하는 인간을 비인간화한다. 혼나는 굴욕을 피하자면, 회사에서 파면당하지 않으려면 사원은 끝없이 뛰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조직 내부에서 보다보면 월급을 받았으니 잘 뛰는 것이 정상이고 1등보다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정상이 된다. 저기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너는 왜 못하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바람을 이기기 위해 자동차의 모양이 유선형이 되듯 사람들은 스스로를 변화시켜서 이 환경속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치게 된다.
나쁜 것은 그나마 조직이 전체적으로 합리적이라면 이런 노력이 낭비되지 않지만 어떤 조직도 실패하지 않는 조직은 없다는 것이다. 즉 조직내에서는 종종 거시적으로 나쁜 결정이 내려진다. 그러면 그 나쁜 결정에 따라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 사람들은 그 결과 나쁜 짓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그에 적응하는 인간이 된다. 이런 예는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조직 위에서 노동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결정을 내린다면 중간관리자는 그에 따라 더욱 더 비인간적으로 그런 관리를 실행하라는 압박을 받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물론 행동을 한 중간관리자의 책임이 면제될 수는 없지만 높은 곳에서 마치 아무 죄가 없다는 듯이 내린 결정에 따라 압박을 받고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 중간관리자다.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를 대충하라는 중앙의 결정은 실무자로 하여금 항의하는 고객에 대해 무례한 행동을 하게 할 것이고 그걸 더 잘하는 사람이 칭찬받게 될 것이다.
문제는 드라마에도 나오듯이 나쁜 결정은 자꾸 번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흔히 나쁜 행동의 책임은 실무자나 중간관리자에게 덮어쒸워진다. 책임도 문제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그보다 더 광범위하고 더 깊은 문제는 적응의 문제다. 직원들은 이미 나쁜 행동에 적응해 버린 것이다. 조직의 압력과 보상에 따라 그렇게 되었는데 조직의 생각이 바뀌면 그 직원들은 이제 나쁜 부속품이 된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지만 부속품이 된 인간은 점차 그 자유의지를 잃어간다. 그래서 부속품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결코 흑백으로 갈라지지는 않는다. 누구도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지지 않고 누구도 완전한 부속품이 아니다. 하지만 조직의 관점에서 보면 자유의지를 잃어버리고 나쁜 부속품이 된 직원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종종 나쁜 평가를 받고 조직에서 잘려나갈 것이다. 조직에 충성했기 때문에 나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사회적 변화는 조직 바깥에서의 변화다. 조직의 나쁜 결정은 조직의 결정권자들이 만들지만 사회적 변화는 조직 이상으로 거대한 바깥 환경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심각하고 저항하기 힘들다. 조직내부에서 경쟁에 이겨가면서 수십년을 일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여러가지 돌발상황에도 대처해 가며 그럭저럭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정말로 깊이 월급쟁이로 변화한다. 그는 스스로를 조직 바깥에 놓고 상상하기 힘들어 진다. 마치 손이 있는 사람이 손이 없는 상태에 대해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는 조직 바깥에서 무능해 진다. 휴가며 보너스에 대한 조직내의 규칙에 대해서는 모르는게없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조직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진다.
그러다가 회사에서 퇴직을 하면 그 사람은 이제 스스로가 사회적 부적응자가 된 것을 깨닫게 된다. 조직에서 장기간 일한 덕분에 다행히 그 사람은 충분한 은퇴자금을 받았을 수도 있고, 적응능력이 뛰어나며, 여전히 건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경쟁은 이런 이상적인 경우를 예외적인 것으로 만든다. 즉 조직내의 경쟁에 몰두하다보면 너무나 조직 안에 적응한 나머지 세상일에 어두워진다. 그래서 대기업 부장이나 되는 사람이지만 부동산이나 주식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거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지 아닌지는 모르는 사람이 생기기 쉽다. 건강하다면 경쟁에서 이기고 있을 것이니 퇴사를 하게 되지 않는다. 그 결과 퇴직자는 재산 관리에 실패해서 번 돈을 날린 사람, 가정이 파괴수준에 이르러 그걸 복구하지 못하거나 그때문에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 정신적 육체적 피로로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기 쉽다. 그러니까 퇴사할 무렵에는 이상적인 경우보다는 건강도 재산도 사회적 상태도 좋지 않은 경우들이 생기기 훨씬 쉽다는 것이다.
이같은 것이 근대 사회에 대한 보편적 비판이다. 여기에 한가지 더해야 할 것이있다면 세상은 가면 갈 수록 혹은 근대 사회가 더 고도화가 되면 될 수록 더 복잡해지고 더 빠르게 변한다는 사실에 있다. 즉 근대의 문제는 그냥 존재하는게 아니라 누적되고 더욱 심각하게 변해왔고 변하고 있다.
이같은 문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근대화의 속력이 빨랐던 한국의 경우는 더욱 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간섭하는 것이 어렵다. 대개 대학교육도 못받았던 지금의 80대는 지금의 5-60대의 삶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의 5-60대는 세상이 훨씬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취업해야 하는 지금의 2-30대를 모른다. 3-40년전에는 서울대 연고대를 나오면 대충 어디나 취직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지금의 60대는 지금도 이런 줄 아는 사람이 꽤 있다. 서울대 나오면 삼성전자 취업 따위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던 시대와 지금은 다르고, 한번 취업하면 천천히 회사일을 배우며 30년 근속하는 시대와 지금은 다르다.
하긴 젊은이들도 앞의 세대를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취업이 옛날에는 쉬웠다는 이야기만 들으면 자기만 힘들다고 한다. 그들은 한국이 후진국이었던 시절 노동자들이 어떤 취급을 받으면서 일했는가를 실감할 수 없다. 그들로서는 그런 나쁜 대우를 받으면 왜 참냐는 식의 답밖에는 안나온다. 군대에서 사병이 백만원이상씩 월급을 받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30년 전 군대의 분위기를 쉽게 알 수 있다면 나이든 60대가 30대를 이해못할 건 뭘까. 이해하기 어렵기는 서로 마찬가지다.
나는 드라마를 3편밖에 보지 못했지만 김부장 드라마는 아버지와 아들세대를 자주 같이 보여준다. 그리고 벤쳐 같은 곳에서 일하려는 아들과 아버지를 같이 보여준다. 이는 이런 세대차이를 보여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드라마가 그걸 얼마나 성공적으로 보여주는가와 상관없이 우리는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밖에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 광범위하게 연결되고 복잡하게 변해간다. 모른다고 나에게 영향을 안미치지는 않는다. 사람에 따라 이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달라야 한다. 그리고 그 대응 방식을 설사 내가 잘 안다고 해도 여기에 몇줄로 쓸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은 전부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열린 시야를 가지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는 식의 고정된 시각을 가지면, 어떤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 깊게 빠지면 그것들이 환경의 변화속에서 우리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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