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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학교, AI 환경

필요한 건 오직 연결 (connection is all you need)

by 격암(강국진) 2026. 1. 5.

일찌기 미국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나 존재냐에서 현대인은 점차로 사랑하다 같은 동사형의 말보다 사랑같은 명사형의 말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원칙적으로 하나의 문장은 어떤 단어를 쓰던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나 나는 너에게 내 사랑을 바친다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 명사형의 문장은 사랑을 주체가 하는 행동이라기보다는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특징을 가지게 된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이것이 존재가 아니라 소유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오늘날 AI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다. AI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건 표현될 수 있지만 그 표현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것이 빠지게 되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연결이다. 예를 들어 AI가 프로그램을 짜준다라는 말이나 AI가 나와 PC 하드웨어를 연결해 준다는 말은 같은 것이다. 프로그램이란 결국 PC 하드웨어가 해야 할 일을 적어놓은 것이 때문에, PC 하드웨어가 인간의 뜻에 따라 움직이도록 중간에서 AI가 번역을 하는 것이 AI가 프로그램을 짜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연결이라는 개념이 빠진 AI는 문맥이나 환경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지능처럼 이해되고 그 한계가 느껴지지 않는 어떤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는 마치 사랑의 신따위를 상상했던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한 것같다. 하지만 컴퓨터가 없다면 컴퓨터 프로그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같은 태도는 상당부분 에히리 프롬이 지적했던 현대인의 태도와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다. 즉 근대적 이상이나 이데올로기가 문제의 중요한 시작이다. 근대란 시스템에 관한 것이고 따라서 근대적 이상이란 더 강력하고 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을 자판기의 번호를 누르는 법처럼 프로토콜이나 메뉴얼의 문제로 이해하게 된다. 즉 특정한 입력을 주면 상대방은 특정한 출력을 줘야 한다. 근대 사회에서는 기계들만 시스템적으로 메뉴얼에 따라서 움직이는게 아니라 인간도 그렇게 하도록 강제된다. 왜냐면 그래야 전체 사회 시스템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근대학교는 공장속에서, 회사속에서 하나의 작은 부품으로서 정해진 메뉴얼에 따라서 움직이는 노동자를 키우기 위한 조직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연결이나 존재는 잊혀진다. 즉 메뉴얼이 실재를 대체한다. 우리는 식당에 가서 만원을 주고 밥을 사먹으면서 이 음식을 만들어 준 사람에게 신경쓰지 않게 된다. 식당에 가서 만원을 내면 밥이 나오는 것이 시스템의 메뉴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지는 정성이나 그 뒤에 있는 인간의 노력은 잊혀진다. 기계로 상징화되는 시스템은 기계가 아니라도 그런 것을 인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한 잔의 물은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건 그저 한 잔의 물의 가치를 가진다.

 

그러므로 이런 근대 사회에 AI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새로운 하나의 기계로 여기고 기계의 어법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연결이 잊혀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AI 역시 우리가 특정한 사용법을 익혀서 정해진 입력을 주면 정해진 출력을 주는 기계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근대적 시스템의 또 하나의 부품일 뿐이다.

 

우리는 근대사회에 익숙한 나머지 모든 것이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본질적으로 연결을 위해 존재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에는 그런 식의 사고에 뭔가가 빠져 있다는 것을 느끼기 쉽다. 예를 들어 문자나 언어를 생각해 보라. 그것들도 사용법이랄 것을 가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한글을 다 익혔다고 당신의 손끝에서 시가 나오고 소설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대화할 상대가 없는데도 말하는 법을 알면 대화가 의미가 있는게 아니다. 그것들은 뭔가와 뭔가를 이어주는 미디어이기 때문에 뭔가를 표현할 주체가 있고,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 경우에는 분명하다. 사실 미디어의 이해를 쓴 마셜 맥루한에 따르면 모든 것이 미디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AI는 어떨까? AI도 미디어이며 그것이 연결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도 되는 것일까? 아니다. 당신은 연결에 주목해야 한다. 연결이야 말로 AI의 핵심이다. AI가 근대의 발명이 아니라 근대를 넘어서는 시대로 가는 발명인 이유도 이때문이다. AI는 메뉴얼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메뉴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시스템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뭘 하든 우리는 시스템을 신경쓰게 된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대부분 복잡한 사용법 내지 프로토콜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기부를 한다고 해보자. 그 돈은 누구에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전달될까? 모든 건 시스템에 대한 것이고 그걸 확신하지 못할 때 우리는 기부도 못한다. 그 돈이 중간에 모두 엉뚱한데 쓰이거나 엉뚱한 사람에게 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일은 심지어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이 코앞에 있을 때조차도 일어날 수 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현대인들은 흔히 이 사람이 사기꾼인지 아닌지를 의심한다. 게다가 이 사람이 의미하는 것은 예를 들어 내 손의 만원이 나에게보다 그에게 더 필요하다는것인데 그것은 정말 사실일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작은 마을에서 작은 수의 사람들이 고립된 상태로 모두가 모두를 알면서 살아가던 전근대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눈앞의 사람과의 연결과 소통에도 실패한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점차로 더 외로워 진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연결이 끊기고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 자신이 마땅히 알아야 할 지식도 찾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시스템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현대인은 점점 더 고독해진다.

 

이런 시스템의 복잡성이 만드는 소외와 연결을 넘어서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AI이다. AI는 고독의 극복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문에 AI 가능성은 무한한 것이고 근대의 비전과 AI 시대의 시대적 비전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AI를 근대 시대의 기계취급을 하면서 스스로 그 가능성을 억누르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의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하나 다운받아서 설치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이 과정이야 말로 근대적이다. 프로그램 설치파일은 당신의 컴퓨터에 해야할 일을 정확히 적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규칙이 다 만족되지 않으면 프로그램설치는 실패할 것이다. 좋은 예는 윈도우용 프로그램을 맥OS에 받아서 설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AI가 있는 PC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설치할 수 있을까? AI는 원칙적으로 모든 코드를 다 받을 필요가 없다. 이 프로그램이 가져야 하는 기능과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핵심적 코드들을 예로 받으면 나머지는 사용자의 PC에 맞춰서 스스로 작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설치 패키지로 그것이 윈도우이건 리눅스이건 맥OS이건 상관없는 것이다. AI가 충분히 똑똑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그리고 AI는 이미 상당히 똑똑해졌다.

 

우리는 여기서 이제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분열을 보고 추상화를 느낀다. 프로그램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코드라고 할 수 있는 하부구조는 AI가 등장하면 점점 더 신경쓸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그 프로그램이 가져야할 기능과 가치만 알면 된다.

 

이것이 근대의 종말을 암시하는 획기적 변화라는 것이 여러분에게 분명할까? 근대 사회는 앞에서 말했듯이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수십년간 아니 죽을 때까지 온갖 메뉴얼에 대한 공부만 하다가 죽는다. 메뉴얼을 모르면 마치 운전하는 방법을 모르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아서 위험하고 근대사회에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근대인의 삶은 메뉴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AI가 그걸 대체한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와 분열한다. 그리고 AI가 강력해 질 수록 그리고 사회적 관행이 바뀌어 갈 수록 하부구조는 잊혀져 갈 것이다. 불신으로 인해 막혀있던 통로가 뚫릴 것이다. 그럴 때 얼마나 많은 것들이 얼마나 쉽게 서로 연결될 것인가. 언어의 장벽을 넘는 것은 이런 것들중의 작은 예에 불과하다. 사람과 사람이, 현재와 과거가, 국가 공동체와 시민들이, 나라와 나라가 연결될 것이다.

 

글자가 문학과 과학을 만드는 것이 아니듯 우리는 수단과 목적을 혼돈해서는 안된다. AI는 수단이고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 연결조차도 수단이지만 연결은 우리를 지금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연결이 목적이라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연결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AI를 써서 무엇과 무엇을 연결하고 있는지를 보려고 해야 하고, 고민해야 한다.

 

소비자와 기업을 연결하는 것도 AI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가장 중요한 연결점일까? 기존의 기업은 기존의 비지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근대 사회에 있었던 비지니스 모델이다. 그걸 그대로 두고 AI를 거기다가 가져다 붙이는 것은 코로나 시절에 화제가 되었던 도장찍는 로봇처럼 뭔가 기괴한 것이 될 수 있다. 근대 시대에 가능했던 것 그리고 불가능했던 것은 그대의 시스템에서 그랬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AI 시대에는 뭐가 가능하고 뭐가 불가능한지를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 한다. AI 시대의 시대적 비전은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연결한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AI를 통한 연결이 더 강해질 수록 기존의 많은 사회적 구조나 조직은 불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넷플릭스가 나오자 사람들은 시간을 기다려서 정해진 시간에 드라마를 보는 것을 더 싫어하게 되었다. 컨텐츠가 소비자에게 연결되고 보급되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AI가 우리가 지금 꼭 알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학교는 지금처럼 운영되어져야 할까? 취업은 어떨까? AI가 신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돈의 의미란 무엇인가? 누군가가 식당에서 밥을 하면 그것은 노동이지만 자기 아이나 친구에게 밥을 해주면 그건 돈을 받는 노동이 아니다. 이런 구분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그 미래가 무엇으로 이뤄져 있는 지를 말할 수 있다. 그건 연결이다. 연결이 모든 것을 재정의하고, 힘의 근원이 된다. 우리는 AI로 우리가 무엇과 무엇을 연결시키고 있는지, 무엇을 연결시켜야 하고, 누구를 소외시켜서는 안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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