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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학교, AI 환경

유발 하라리의 2026년 다보스 대담을 보고

by 격암(강국진) 2026. 1. 26.

유튜브에서 우연히 하라리의 다보스 2026년 다보스 대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발표에서 하라리는 AI는 언어를 다룰 수 있고, 인간보다 곧 더 잘 다룰 수 있게 될 터인데 그럴 때 문자나 단어를 다루는 것을 곧 생각으로 여기는 존재인 인간은 정체성 위기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언어 이전의 생각에 대한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인간의 사고는 단어의 배열이며, 유대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는 책의 종교라는 겁니다. 단어를 나열하는 능력이 있는 AI는 새로운 이민자로 세계에 등장할 것이며, 단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데서 그치지 않고, 지금의 법인이 그러하듯 재산을 소유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존재가 될 거라고 하라리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금융상품 같은 것은 인간은 이해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것이 될거라고 지적하지요.

 

사실 하라리의 예는 아닙니다만 변호사를 AI가 대체한다는 말은 이제 세상에 흔합니다. 그건 법률적 논쟁이 결국 단어의 나열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법을 인간보다 AI가 더 잘 다루는 겁니다. 이같은 현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지금의 인간 문명이 문자 문명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보다 더 문자를 잘 다루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문자의 나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AI의 등장은 그 세계의 주인이 인간인지 AI인지를 묻는 질문을 등장시킬 것입니다.

 

인간은 적어도 우리가 익숙한 현대 문명속에서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실질적 의미는 우리가 단어를 늘어놓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문자를 쓸 수 있다는 것이라는 것이고, 그걸 인간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존재가 등장했을 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앞에서 말한 것이 이성이나 생각의 정의라면 인간은 이제 하등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동차가 인간보다 빠르고, 인간은 날지 못하는데 비행기는 날 수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냐면 인간은 우리 문명속에서 인간이 자동차보다 느리다고 해서 문제를 느끼지 않는 정체성으로 스스로를 정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스스로를 왕으로 여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힘이 세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봐야 내가 왕인데 힘이 더 센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글을 제가 쓰게 된 것은 하라리의 대담을 들으면서 한가지 의문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은 문자를 쓰고, 단어를 나열한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은 주체이고, 문자나 단어나 언어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생각이 정말 옳을까요? 인간은 단순히 단어를 사용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언어에 대한 낡은 논의를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은 언어를 규칙을 학습해서 쓰는게 아니라는 것이 바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었지요. 그래서 인간은 언어를 쓰지만 사실 그 언어를 다 모릅니다. 그 언어의 의미는 그걸 쓰는 사람 이상으로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 집니다. 그래서 같은 말도 다른 환경에서는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며 따라서 언어가 단순히 규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인간에 의해서 100% 탄생한다기 보다는 어느 정도 우리와 독립적으로 특히 사회적으로 존재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민주주의라던가 사랑이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런 말을 일상에서 쓰지만 사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아무리 길게 이야기해도 말할 수 없으며 그다지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 도서관에 긴 설명이 있을 뿐만 아니라 수없는 사람들이 그 말들을 쓰면서 일상속에서 그 의미가 어느 정도 들어난다는 것을 알 고 있을 뿐입니다. 현실이 이러니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던가,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책이 새삼 자꾸 자꾸 나오는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면 단어의 뜻이 변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단어를 나열하고 언어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정도의 차이이기는 하지만 그건 탁자위의 망치를 들어서 못을 박는 것보다 훨씬 상호적인 관계를 전제합니다. 우리가 단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단어가 우리를 사용하는 겁니다. 무엇을 위해서? 바로 자신의 의미, 자신의 존재이유를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민주주의나 사랑이라는 단어가 수없는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뜻도 정확히 모르는 단어는 어떤 생각을 우리의 머리에 주입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행동을 크게 바꾸었습니다. 사랑이 인간을 지배한 것입니다. 사랑을 현실속에 구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단어의 뜻을 전부 이해하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잊혀진 단어는 사라집니다. 단어는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더욱 의미깊어 지는 것은 하라리가 말하는 AI 시대를 생각할 때입니다. 우리는 인간은 언어를 이해하고, AI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인간은 사실 언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어려운 말들을 일상적으로 쓰면서 살아갑니다. 경험을 통해서 그 사용법을 배웠을 뿐입니다. 그건 마치 타이레놀이 정확히 어떤 작용을 해서 우리의 두통을 없애는 지는 모르지만 머리가 아프면 타이레놀을 사다가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AI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 것이고, AI 자체가 우리가 전통적으로 말하는 분석적 이해의 영역에 있지 않습니다. 즉 우리는 AI가 왜 특정한 선택을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포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공포는 자연스럽습니다. 선사시대의 수렵채집인이 미래를 예측할 능력이 어느 정도 있었다면 문자나 언어같은 것에 지배당하는 미래 문명 사회는 공포스러운 것일 것입니다. 돈이나 신용카드가 고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줄지 모릅니다. 한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사람들은 고기를 소비할 자격이 없다고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종이위에 글자를 끄적이는 일만 하는 사람들이 엄청난 양의 고기를 소비하는 걸 보면 이건 뭐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요.

 

AI 시대는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관행을 깨고 이상한 시대를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시대를 약간만 들여다 보아도 우리는 걱정이 많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상한 시대에 적응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것이고,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하는가라는 지적을 할 것이 무한히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실제로 수없는 비극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근대화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근대화가 잘못된 것이며 전근대에 남아있어야 한다고는 거의 말하지 않지만 근대화가 만들어낸 비극을 잘 기억합니다.

 

하지만 AI는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이 아닙니다. AI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런 외계인입니다. 수렵채집인에게 문자를 쓰는 문명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이었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인간과 AI를 비교하는게 아니라 AI를 쓰지 않는 인간과 AI를 쓰는 인간을 비교해야 합니다. AI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AI를 다 이해하고 쓰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이미 네비같은 것은 널리 쓰이고 있는데 그게 어떤 작동원리로 움직이는지를 다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반자율주행 장치도 그 원리를 다 몰라도 우리의 자동차를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인간이 AI를 사용하는 만큼이나 AI는 인간을 재정의할 것입니다. 문자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이미 사이보그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는 조심스레 전진해야 합니다. 뜻도 모르는 말을 함부로 쓰고, 함부로 뭔가를 정하고 기록하면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처럼 AI를 만들고 실제로 사용하면서 우리는 조심스레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에서 그랬듯이 우리가 그것을 다 이해하고 쓰는 날은 오지 않습니다. 그 안에 있을 어떤 편향을 다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출판이 보편화되어 책이 흔해지기 시작하면 무식한 인간들이 해로운 책을 만나서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이런 저런 변명을 해도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책은 소수의 엘리트만 읽어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위험한 것에 접근하지 말게 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분별하게 하지 말자는 뜻은 분별을 하자는 말인데 누가 분별하겠습니까? 물론 거듭 말하지만 AI의 발달은 분명 근대화의 진행때 있었던 비극을 만들것이고, 이런 저런 걱정을 하는 것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조금만 더 지나치면 그건 결국 소수의 사람들이 문명을 독점하게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밀고 가게 됩니다. AI의 경우는 근대화보다 훨씬 더 속력이 빠를 것이기 때문에 약간만 집중이 어긋나도 그런 독점이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더더욱 큰 고통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것이 걱정은 되지만 우리가 AI 시대의 밝은 미래를 대중적으로 믿는 것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머뭇거림이나 전혀 피해를 만들어 내지 않겠다는 소심함이 오히려 피해를 더 키울 겁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AI가 거대 기업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인들이 AI 시대에 뒤쳐지지 않게 하는 힘을 줄 것이고 나아가 문명의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지키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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