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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학교, AI 환경

끝나가는 노동의 시대

by 격암(강국진) 2026. 5. 1.

근대는 노동의 시대 즉 직장의 시대다. 그리고 근대인들은 이 노동의 방식에 아주 익숙하다. 자신이 노동자 혹은 직장인인 것에 아주 익숙하고, 노동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데 이 근대가 끝나가고 있다. 노동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여전히 많은 일을 해야겠지만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금기를 깨기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어떤 관점에서는 노예의 윤리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노동이 뭘까?  노동은 일단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을 말한다. 노동은 기본적으로 양적으로 측정된다. 1시간 일하는 것은 2시간 일하는 것의 절반의 보수를 받아야 할 것이다. 집을 한채 지어주는 노동은 집을 두 채 지어주는 노동의 절반의 보수를 받아야 할 것이다. 돈을 받고 일한다면 돈을 주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노동을 한다는 것은 그 노동이 일어난 장소인 직장이 있다는 말과 같다. 근대인들은 직장이라는 곳에서 돈을 받고 일을 하면서 자신의 일을 양적으로 측정해서 보수를 받는 일에 익숙하다. 그리고 직장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의 원천으로 여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것들을 당연하게 느낀다. 

그런데 사실 노동이 무엇인가는 절대로 확실한 것이 아니다. 퇴근하고 술마시는 것이 노동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월급을 받고 술을 시음하는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접대라는 이름으로 계속 술을 마실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술을 마시는 일도 노동이 된다. 똑같은 일이 돈을 받고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노동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때문에 철학적 사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철학교수가 되면 이사람이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가 애매해 지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모두가 같은 시간을 일한다고 같은 보수를 받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연봉은 수십억인데 누군가의 연봉은 2-3천만원밖에 안된다. 노동시간이 백배 길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의 질이나 가치를 따지기 시작하는데 사실 이건 노동이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이라는 정의에서 보면 순환논법같은 것이다. 돈을 덜 받는 행위는 덜 노동적인 일인가?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저임금 노동자의 노동이야 말로 이것이 노동이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순간의 영감으로 곡한곡을 쓰고 거액의 돈을 버는 작곡가는 돈을 더 받으니까 더 많이 노동을 한건가?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는건 같은 노동을 해도 당신이 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에 따라 보수가 다를 뿐만 아니라 중국인인가 미국인인가에 따라 보수가 다르다는 것이다. 중국의 청소부가 미국의 청소부보다 일을 덜해서 보수를 작게 받는건 아니지 않는가? 이건 어떤 행위에 대해 지불되는 노동의 댓가가 그 행위를 둘러싼 사회적 공동체적 문맥에 크게 영향받는다는 걸 말한다. 이같은 것은 앞으로 수 많은 조직이 생겨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것이 미래라는 것을 생각하면 점점 더 중요해질 문제다. 누구나 쉽게 중국인에서 미국인이 될 수는 없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같은 변화가 쉬워지는게 미래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집단에 합류할 것인가가 받을 수 있는 보상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어떤 시스템 안에 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이야기를 종교적 도그마처럼 계속 듣는다. 그래서 그 시스템이 당연한 일이 될 때 노동이란게 분명해 보인다. 누구나 돈을 바라면 노동을 해야 한다는데 누군가는 그다지 일을 안하는 것같고 누군가는 미친 듯이 일하는 거같은데 그게 공평한 일이라는 걸 납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의 중독자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자본주의가 틀렸다거나 옳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어떤 시스템, 어떤 이데올로기를 당연시 여기고 있다는 것이고 그런데 그 시스템이 복잡해지면 정당화가 점점 더 힘들어 진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나 폴라니 같은 사람은 자본주의가 본래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만 꼭 그런 원천적인 것이 아니라도 경제 시스템이 복잡해지면 노동을 하니까 돈을 받는다는 말은 점점 정당화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소비와 공급의 균형이 시장가치를 결정한다는 이론을 믿기 어렵다. 간단한 곳에서도 그게 잘 안될 것같은데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시스템이 복잡하고 세상이 빠르게 바뀌는데 지금 세상이 시장의 균형상태에 있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비트코인으로 부자된 사람이 정말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의 결과에 의해서 그런거 맞나? 백번 양보해서 지금까지는 시장이 잘작동해서 노동이라는 것이 제대로 정의되고 제대로 보상을 받고 있었다고 하자. AI가 인간의 힘을 크게 확장하는 시대, 아예 혼자서 일하는 앞으로의 시대에도 이 균형이 정말 작동할까?

결국 우리는 노동의 의미가 한없이 애매해 지는 시대로 들어갈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노동이라는 개념을 유지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건 그 시대는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는 이해불가능한 시대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사실 이미 세상이 그런 단계에 있다고 믿는다. 

미래가 어떨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노동의 특징을 돌아볼 수는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당연한게 그 시대에는 옳지 않은 일이 된다.  첫째로 노동의 가치를 양으로 평가하는 일은 점점 더 설득력이 약해질 것이다. 땀흘려 오랜동안 일하면 잘살게 된다는 생각은 점점 더 설득력이 약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사회적 금기를 깨고 있다. 이같은 말은 게으르게 살라고 하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으로 밭을 오랜동안 갈은 농부가 트렉터로 그렇게 하는 농부에게 너는 게으르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노동들이 점차로 자동화되는 시대에 지금 우리가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일들은 앞으로는 어리석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학교에 가서 16년씩 교과서를 공부한다던가, 직장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해진 시간동안 일하는 것 같은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성실이라는 말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한다. 

둘째로 노동의 장소성이 설득력을 잃을 수 있다. 즉 사람은 직장에 다녀야 한다는 생각, 직장이라는 소속을 가지는 것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생각이 사라질 수 있다. 이미 1인 창업자들도 있지만 보통 직장이란 인간을 부속품으로 하는 거대한 기계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거대한 기계가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 왜냐면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에서는 평생 직장 같은 개념이 사라졌다. 여기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거의 프리랜서 같은 사람들이 그때 그때마다 연결되어 프로젝트를 하는 시스템으로 갈 것이다. 이건 어딘가에 취직한다기 보다는 그때 그때 거래를 하는 개념과 같다. 이미 많은 회사들은 사람을 더이상 뽑지 않는다. 사람을 고용하는 비용이 너무 커서 자동화의 속도를 생각하면 지금 있는 인력으로 버티면서 차차 인력을 줄여나가는 것이 현실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시대에는 내가 한시간을 일했는가 2시간을 일했는가가 중요한게 아니다. 내가 뭔가를 했나 안했나만 중요할 것이다. 내가 AI를 써서 책한권을 디자인 하는데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10분어치의 보상을 받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결과가 좋으면 댓가는 지불된다. 결과가 나쁘면 1년내내 작업했다고 해도 댓가는 없을 것이다. 물론 단순히 AI를 써서 일하는 것으로는 남들도 AI를 써서 같은 결과를 뽑을테니까 충분치 않다. 우리는 AI를 써도 재현할 수 없는 걸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데이터나 경험의 독점적 소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피라미드를 보면 알듯이 전근대의 왕들은 이미 근대의 기계문명이 제공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부자들이나 정치가는 이미 AI 시대를 살고 있다. 자율주행? 운전사가 있는 부자들은 예전부터 있었다. 법률전문가니 의료전문가니 하는것도 돈을 주면 인간이 해준다. 정부나 거대한 기업은 거대한 시스템으로 AI가 해줄거라고 약속하는 것을 이미 하고 있다. 이러한 예들은 미래란 완전히 새롭기만 하지는 않고 단지 지금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이 보편화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지금과 AI 시대의 차이는 주로 개인이 마치 거대 회사처럼 일할 수 있는 것에 있을 것이다. 기업은 지금도 자기 노하우와 지적재산권을 지킨다. 자신의 비지니스 모델을 지키는 경제적 해자를 지킨다. 그런데 그걸 보통의 개인은 지금까지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개인은 직장에 가서 노동을 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개 개인이나 소수의 사람들은 거대 자본이 투자되어 만들어 지는 시스템 혹은 기업이 가지는 독점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제 AI를 쓰면 개인이 마치 직원을 둔 기업처럼 자기 정보와 자기 재산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 AI의 시대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주 곤란한 처지에 처할 것이다. 왜냐면 직장과 노동의 개념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네스를 만드는 일이 미래 사회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하네스는 보편적 정보를 가진 AI 모델과는 달리 사용자가 독점적으로 가지는 데이터를 누적시키고 지키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의 노동 윤리나 가치관에서 차차 탈출해야 한다. 미래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노예의 윤리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를 되돌아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전근대의 백성이나 농민과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들이 노예의 윤리를 가지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왜냐면 근대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이나 될 수 있다고 믿는데 전근대의 농민은 자신의 신분을 받아들이고 귀족에게 충성하는 윤리를 당연시 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의 시대가 끝난 후에 지금의 윤리를 뒤돌아보면 마찬가지로 그것은 노예의 윤리처럼 보이게 된다. 미래 사람들은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갈 길이 있는데도 근대인들이 한사코 직장이란 곳에 들어가서 그 부속품이 되고 싶어하며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간다는 것은 쉽지는 않다. 그리고 과도기에는 양쪽의 시각이 모두 어느 정도 틀린 것이 되고 모두 맞는 것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의 방향을 무시할 때 그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그 예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전세계적으로 찾을 수 있지만 전근대에 머물다가 나라가 망한 조선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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