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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 자아 상실의 시대

by 격암(강국진) 2007. 12. 11.

4. 자아 상실의 시대

 

오늘날 우리는 심장이식수술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당신이 그래야만 한다면 당신의 심장을 꺼내어 폐기처분하고 새로운 심장을 이식하게 될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뇌에 종양이 생겼다고 해보자. 그리고 기술적으로 이런 수술이 가능하다고 해보자. 당신은 과연 당신의 뇌를 꺼내어 폐기처분해 버리고 다른 뇌를 당신몸에 넣는것에 동의할것인가. 그렇지는 않을것이다. 뇌에는 우리의 자아가 들어 있기 때문- 혹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뇌를 제외한 우리의 온몸과도 우리는 뇌를 바꿀수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각은 심장에서 하는 것이고 뇌는 펌프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뇌따위는 바꿔넣을수 있는 장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어도 심장은 바꾸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내 손이나 심장은 나의 자아의 일부가 아니고 두뇌는 나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가. 엄밀히 말해 이생각은 정확히 옳다고 생각지 않지만 이 생각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건 우리가 우리의 심장과 손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손이 무었인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두뇌의 명령을 듣는지 알게 되는 순간 우리의 손은 마치 우리의 자동차와 같은 입장이 되고 만다. 그건 더이상 나의 자아의 일부라기 보다는 내가 타고 다니는 기계와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인간이 이해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래서 이해가 된것은 더이상 자아의 일부가 아니게 된다는것이다. 이해를 하는 주체가 자아니까 이해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항상 '내'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몸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해와 지식이 쌓여갈수록 우리는 조금씩 자아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양자역학이 나오고 유전자가 발견되면서 화학과 생물학은 전혀 다른 종류의 과학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어떤 의미로는 물리학의 분야와 통합되어졌다고 말할수 있다. 화학결합의 원리와 생물탄생의 근본원리가 밝혀짐으로서 우리는 전에 신만이 행한다고 말하던 불가능한 연금술과 생명개조의 원리를 알게 되기도 했다. 급속히 발달하고 있는 뇌과학은 어쩌면 인간정신이해의 새로운 원리를 밝히는데에 이르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줄것이고 그 이해를 얻는것만큼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게 될수도 있다.  

 

우리는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런 생각을 해보라. 나는 어떤 여자를 매우 사랑한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충격적인 사실은 그녀가 나에게 언젠가 최면을 걸어 나의 감정이 그렇게 되도록 명령했다는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것인가 아니면 나의 두뇌라는 단순한 기계가 최면의 금제에 빠져있기 때문인가. 도대체 순수한 나의 의지를 알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면 우리의 감정과 믿음은 무었에 근거해야 할것인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자유의지로 원하는가.

 

우리는 소위 조건만을 보고 결혼하는 여자를 욕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찬양한다. 그러나 알고보면 강력한 감성적 충동도 상대방이 뿜어낸 화학신호나 시각적 신호가 주는 자극을 받아들인 결과에 불과하다면 지고지순한 사랑이 물질에 대한 추구보다 더 고상한것이어야 한다는 이유는 무었인가. 둘다 쥬스나 생선에 눈이멀어 시키는데로 하는 원숭이나 물개의 행동과 같은거 아닌가?  최면과 화학적 작용은 서로 다른것인가? 나이든 세대가 종종하는 냉담한 결혼에 대한 조언이 옳은거 아닐까.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감기에 걸리는 것의 근본적 차이는 무었인가. 사랑이 질병이라면 우리는 그 질병의 결과로 생기는 의지를 자유의지로 믿지 말고 약을 먹어 치유해야할 대상으로 생각해야 할것이다. 우리가 감기로 기침을 하고 콧물을 흘리면 우리는 그것을 병의 증상으로 본다. 짝사랑에 빠져 가슴이 아픈 사람들은 결코 그 병을 쉽게 치유해 버리자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뇌에 대한 지식 혹은 인간의 본능에 대한 지식이 증가할수록 우리는 당연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만약 인간이 신 혹은 위대한 원리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왜 하필이면 그렇게 창조되었는가하는 것이다. 뇌에 대해 모를때 무지할때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자유의지로 본다. 이제 뇌에 대해 알게 되고 나면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만든 창조자의 의지를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본성에 저항해야 하는가. 저항이란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가? 그런데 합리적이란 그 판단이 나자신의 판단능력에 근거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뭐가 합리적인가. 이같은 흐름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뇌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아직 활짝열리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뚜껑은 분명히 열리고 있다.

 

신앙심과 관련한 실험도 실제로 행해지고 있다. 한 실험자는 수녀나 수피를 불러다가 기도나 명상에 빠지게 하고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을 관측했다. 물론 이것은 눈으로 관측한게 아니고 뇌의 어느부분이 종교적 체험을 할때 활성화하는가를 본것이다. 이런 실험을 통해 우리는 종교적 체험의 본질을 이해할수 있을지도 모르며 인위적으로 종교적 체험을 창출해 내는것이 일상화될지도 모른다. 예전엔 치열한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종교적 경험을 우리는 알약하나로 쉽사리 경험하게 될지 모른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길게할수는 없다.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전에는 어떤 쪽으로 번져갈지 알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가지일은 언급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첫째는 이성적 판단의 무서움이다.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이성을 통해 조작하여 자신의 행동을 모두 이성적으로 만드는 세상은 과연 지금보다 아름다운 세상일 것인가. 우울하면 우울증을 없애는 약을 먹고 사랑을 잊고 싶으면 사랑을 잊어버리는 치료를 받고 가족관계를 긴밀하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집단 치료를 받는다. 실은 이미 우리는 이런 일을 하고 있다. 인류 최고의 항우울제는 술이 아니었던가? 실연의 아픔이 지나치면 정신과 상담을 해서 우리는 자신을 치료하지 않는가? 처세술책은 우리의 서점을 가득채우고 있지 않은가?

 

현대과학은 이성적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에 대한 강력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사람이 걸어다닐때는 길에 대해 좀 무신경하게 걸어도 된다. 그러나 비행기나 시속 200km짜리 자동차를 타고 달린다면 한눈을 파는순간 죽음에 이를수 있다. 이제까지의 전통적 자기조절법이나 항우울제의 미덕은 그게 잘 안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전하기도 하다. 현대과학이 뇌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이에 맞춰 우리의 생활을 '이성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강력한 지성적 스포츠카를 인류가 얻게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이같은 발전은 좌절도 우울도 없이 최상의 쾌락만을 누리는 삶을 만들어 줄수 있지만 동시에 위험하다. 당신이 이성적이라고 생각한것이 조금만 바보같은 일이면 당신의 삶은 걷잡을수 없이 파괴될것이다. 자아개조란 21세기가 만들어낸 마약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성이 이런 지성적 스포츠카를 타기에 아직 어린애수준이라면 어떻게 될것인가. 경쟁에 지지 않기위해 모두가 악셀을 밟아대다가 전부 벼랑끝으로 떨어져 버리는 사태가 생기지는 않을것인가. 예를 들어 오늘날 많은 부자나라에서 특히 한국에서 출산률이 낮아서 고령화가 급격히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이 이성적 사회가 맞는것인가? 이성적으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 이성적인가? 자기 자신을 개조할 자유란 위험하지 않을까?

 

기적의 알약 몇통이면 전부 도통한 인간으로 변하는 시대가 올수 있을까? 무었보다 우리는 그렇게 되길 바라는가 바라지 않는가.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는 것은 나자신의 자아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뇌를 훈련하고 자극하고 약물을 가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나자신의 자아자체를 일정부분 개조하는 일이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되길바라는가. 그렇게 되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좋은 이야기도 해보자. 우리는 어쩌면 성인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함으로서 우리는 내가 원한다고 했지만 실은 착각과 절망과 긴장에 빠져 저지르는 잘못된 감정들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게 될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고승들의 수도생활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닌것을 알게 됨으로 해서 우리를 눌러왔던 인생에 대한 고민에서, 우리를 둘어싼 미망에서 벗어날수있을런지도 모른다.

 

어떤 조건에서 시각적 착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지식을 가지면 그 착각에 속지 않는다.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화두를 오랬동안 푸는대신 몇가지 치료를 받고 명상에 잠기면 정신적 깨달음 -그게 뭘지 모르지만- 을 얻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수나 부처같은 성인들만 사는 시대가 온다면 그시대는 물론 지금과는 전혀 다를것이다. 성인의 마음을 알수는 없지만 그시대는 지금 보다 바람직한 시대가 되지는 않을까?

 

새시대의 판도라이야기는 이렇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때 무수한 미망들이 세상의 빛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남은것은 자유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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