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21세기 현재 이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었일까. 나는 그것을 정체성의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건은 다른 말로 신화부재의 시대, 믿음이 없는 시대라고도 말해진다. 우리는 우리가 무었을 위해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나는 선교를 하고자 하는게 아니다. 혹은 선한 사람이 되자고 설득하려고 하는게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신이란 무었인가 선하다는게 무었인가에 대한 문제다. 이런 질문들이 현실과 지나지게 동떨어지고 관념적 생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오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세상에서 가장 절박하고 소중한 문제이며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결과 21세기의 사람들에게 죽고 사는 문제가 되었다. 정체성의 문제는 도덕의 문제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왜 북한에 핵폭탄을 떨어뜨리면 안되고 아프리카 사람들을 전부 몰살시키면 안되는가. 정체성이 흔들리면 이런 대답도 잘할수 없다.
목표와 의미의 중요성
우리는 모두 어떤 종류의 목표를 향해 살아간다. 그저 먹이가 있으면 행복한 짐승으로 살수 있는 자는 드물며 그런 사람들이 과연 행복하고 우리가 닮고 싶은 사람인가를 생각하면 삶에 의미가 있고 목표가 있는 것은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것이 고상한 목표가 아니라 출세한다던가 사랑을 얻는다던가 돈을 버는것 같은 목표일지라도 목표가 있고 그것을 향해 살아가지 못할때 인간은 방황하고 건강은 망쳐지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반면에 객관적으로는 매우 나쁜 조건에 산다고 해도 자기 삶에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사람은 그 조건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살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단으로서의 인간에게 삶의 목표와 의미를 제시하는 일이 잘못되면 인간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는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당신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삶에 자극을 줄수 있는 해야할일이 없다면 그런 삶은 돼지우리에서 사육되는 돼지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 게임과 오락에 몰두해서라도 어떤 의미와 목표를 찾아야만 인간은 살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여가 시간이란 지독한 고문이 된다. 차라리 단조롭게 컨베이어 조립벨트 앞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더 행복할수 있다. 최소한 그나 그녀는 자신이 뭔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은 할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붕괴는 독재나 집단주의적 정권을 지지하게 만들어 지옥을 만들어 내는 것을 허용할수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어나가는 많은 유태인들을 본 사람은 가장 오래 살아남는 사람은 자기 삶에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극악한 현실에서도 마치지 못한 원고를 마치고자 하는 욕망, 만나지 못한 가족과 재회하려는 욕망이 있는 한 인간은 견디어 낼수 있는 것이다. 그와같이 극악한 현실속에선 욕망이 꺼질때 육체적 생명조차도 동시에 사라지고 말게 된다. 21세기 인간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무었을 위해 사는가.
신화의 구조
우리는 신화라고 불리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그저 의미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가 없고 소용이 없다면 그런 이야기들은 잊혀지고 사라졌을 것이다. 신화는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우리 사회가 왜 유지되어야 하는지.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가 무었인지를 간략히 제시한다.
신화는 대개 세가지 부분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부분은 우리가 누군지를 말하고 두번째부분은 왜 현실이 이러한가를 말한다. 마지막부분은 그둘의 결합을 통해 우리가 해야할 일을 제시해 주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은 당신이 위대한 혈통의 후예이며 더러운 정치파동의 결과 몰락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을수 있다. 당연히 그런 이야기의 결론은 당신이 다시 그 위대함을 복원하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 된다.
많은 신화는 신화로 불리지 않고 진실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진실이라는 단어는 매우 간단한 사실의 기술을 제외하면 매우 애매한 것이다. 대부분의 일들이 수많은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되어 질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모든것을 증명할수는 없다. 오히려 증명할수 있다면 그것은 신화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중요한것은 증명할수 없는 데도 그것을 믿는 행위이며 그런 믿음이 우리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무었을 믿을것인가 하는 것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삶을 살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강대한 무지의 힘
우리가 인간의 삶에 목표와 의미가 중요하며 따라서 그런 목표와 의미를 제시하는 믿음, 혹은 내가 신화라고 부르는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때 우리는 다시 무지라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왜냐면 믿음이란 항상 어떤 종류의 무지 혹은 신성한 선언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와 무지는 권력과 영향력을 가르는 근원이 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고 증명했을때 그 대상은 그 신비성을 잃어버리고 힘을 잃어버린다. 그 대상은 이제 완전히 다른 것들에게 종속되는 것이며 그자체로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신화의 힘은 무지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증명하기 불가능하지만 우리에게 호소력을 지닌 선언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신이 창조하였다라던가 위대한 가문 혹은 민족의 전설이라던가 알수 없는 내력을 가진 부적이 영험한 힘을 가졌다더라는 이야기등은 증명할수 없는 무지에게 우리는 강력한 영향력을 받는 다는 것을 쉽게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을 가진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고나면 더이상 그대상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상대와 사랑을 빠지는 것은 그나 그녀를 잘알기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그와 그녀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상대에 대해 전적으로 이해하고 그나 그녀의 행동을 예측할수 있을때 그 사랑의 신비성은 사라지고 만다.
우리가 우리자신의 팔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거듭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팔이 어떤 기계장치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될수도 있다. 아니 이미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차를 바꿔타는것처럼 팔이 없어진다고 해서 커다란 충격을 받지는 않게 될것이다. 그저 좀 불편할 따름인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자아의 일부를 잃을때 두려워하고 괴로워한다. 사랑이나 애착이란 무지하다는 생각이나 현실에 근거한다.
나는 여기에서 무조건 무지한것이 좋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이 무지한데도 무언가를 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믿음이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무었이고 우리가 모르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 우리가 모른다고 믿는것들에 의해 영향받고 다른 종류의 의미에 빠져들게 된다. 이렇게 얼핏보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일것 같은 앎과 무지에 대한 생각들이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을 결정하는 기본 바탕이 되는 것이다.
다원신과 일원신
우리가 알수 없고 이해할수 없는 대상의 대표적인 예는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다. 세계에 널리 퍼진 종교들은 이제 대부분 하나의 신을 섬긴다. 그리스 신화나 고대 한국 샤머니즘 처럼 사랑의 신이며 부엌신이며 나무신이며 우물신 같이 여러가지 신을 섬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같은 변화는 인간의 지식과 과학이 발전한 이유라고 생각하며 그 인과관계를 논하기는 어려우나 분명 현대 사회의 모습이 이 같은 변화에 연결되어져 있다고 믿는다.
여러가지의 신을 믿는 다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원리들이 여러가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없다. 왜 천둥이 치는가, 왜 누구는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가, 왜 남자나 여자아이는 태어나는가. 우리가 우리가 알수 없는 어떤 무지와 부딪힐때 마다 우리의 선조들은 간단히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며 문제를 해결했다.
즉 사랑은 사랑의 신이 조정하는 것이고 우물의 물이 잘나오는 것은 우물의 정령이 있기 때문인것이다. 천둥에는 천둥신이 있고 술이 익는것에는 술의 신이 관여한다. 신이라는 것은 사물의 배후에 있는 원리이고 우리의 무지다. 우리는 그것들에 이름을 줌으로 해서 그것들을 배우고 익힐 대상으로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성질을 기록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원신이 사라지고 유일신 종교가 세상에 퍼진다는 것은 결국 세상만물의 원리가 서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작은 숫자의 원리에 의해 설명되어 질수 있다고 믿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부엌에 대해 자세히 알고 나면 부엌신과 그신성함은 사라지고 만다. 모든 만물의 뒤에는 여러가지의 독립된 원리가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원리가 여러가지로 발현되어 이해할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의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세상을 이렇게 흘러가게 만들었다. 이것이 유일신 종교가 주는 메세지다.
유일신 종교는 또한 현대사회의 기반을 만들어내는 인간평등의 정신을 제시한다. 기독교가 유태인의 종교가 아니고 신이 유태인을 만들어 낸게 아니라 인류를 만들어 내었다는 메세지는 결국 모든 인간은 신앞에 평등하다는 메세지를 주게 된다. 다원신을 섬기는 사회에서 귀족이나 왕족은 노예계급과 서로 다른 원리에 따라 만들어 졌고 따라서 인간평등의 개념은 부정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유일신종교는 단일한 원리가 세상만물에 적용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결국 인간평등의 개념을 강조하고 오늘날의 사회가 오늘날의 모습을 가지게 하는데 영향을 미쳤거나 혹은 그 반대일것이다.
유일한 원칙이라는 것은 또한 사람에 따라 차별해서 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똑같은 법에 적용을 받는 다는 것과 닮아 있다. 인간은 평등하고 사회는 원칙따라 만들어진 중앙의 같은 법에 의해 지탱되어 진다. 이것이 유일신 종교가 세계에 퍼진 오늘날 현대사회의 모습이다.
왜 지동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는가.
왜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충격이었을까. 왜 원숭이에서 인간이 진화했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충격이었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종교의 문제는 단순히 종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 혹은 어떤 신화들은 개개인은 물론 그사회를 지탱하는 힘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문의 신성함을 외치고 있는 집단이 있다고 하자. 가문의 번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믿는 그집단에게 실상 그 가문은 비천하고 비도덕적인 출발점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이야기는 충격일 것이다. 혹은 100여년전에 가문에 적통이 사라졌는데 불륜을 통해 들어온 피가 그이후 그가문을 이엇다고 하자. 이것은 가문에 충성해야 한다는 믿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길것이다.
지동설이나 진화론이 인간에게 충격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신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성한 별에서 태어나야 하는데 그 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인간은 특별히 신을 닮게 창조된 특별한 자식이어야 하는데 원숭이나 다를바 없는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동설이나 진화론때문에 충격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쉽게 알아볼수 있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과학이 무지를 깨부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에 몰랐던 사실들을 과학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리고 무지를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회인 동시에 위기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에게 삶의 목표를 제시하고 의미를 제시하는 믿음의 체계는 그 무지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가져온 위기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이제 우리는 성경이나 불경에 나오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때로 비웃음을 가지고 바라본다. 우리는 지구의 나이가 얼마인지 우주의 나이가 얼마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것이 가능한지 어떤 것이 불가능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지가 깨어지고 우리의 믿음이 사라지는 것이 반드시 새로운 믿음, 새로운 신화가 제시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반문명적이고 반기술적 행동을 행하는 사람들은 위협을 느낀다. 그것은 발전이 아니라 완전한 혼돈을 의미할수 있다. 그들은 과학의 오만에 대해 경고하고 과학을 맹신하는 믿음이 대중에 퍼져나가는 것을 막고자 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가 무었을 알고 무었을 모른다고 믿는가 하는 것이다. 과학의 맹신자들은 과학을 실제로 연구하는 과학자보다 더 쉽게 과학이 모든것에 대한 답을 준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들은 너무 쉽게 옛 믿음을 버리고 그것을 비판한다.
우리는 왜 근친상간이나 살인같은 짓을 해서는 안된다고 믿는가. 거기에 과학적 증거가 있는가. 사랑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에 불가하다면 성적인 방종이 나쁜 이유는 그저 건강에 해롭기 때문인가?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중의 하나인 유일신 종교들이 모두 농담쯤으로 여겨진다면 우리의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하는 것이 지당한가. 인간은 평등한가? 가난한 나라의 노동력과 자원을 착취하는 부자나라들이 인간평등을 논하는 것은 자기 모순과 위선이 아닌가?
새로운 신화는 물론 종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과학발전이 가속화되기 시작한것은 몇세기나되었다. 새로운 신화는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퍼졌었다. 무한한 생산과 소비 그리고 무한한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 대한 신화가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신화 혹은 미국의 신화다. 노동자들의 천국을 건설하자는 신화가 바로 공산주의 신화다. 이런것들은 기성종교가 무력화 되고 난후에 현실에 대한 새로운 신화가 주장된것이다.
이것들이 왜 신화인가. 생각해 보면 앞에서 말한 신화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다. 그것은 사회과학이론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실험도 없고 재현성도 의심스러운 과학이다. 따라서 인류는 거대한 실험을 실행하였고 그와중에 크고 작은 전쟁을 겪기도 했다. 민족주의도 물론 또하나의 신화다. 게르만 민족을 신성시하는 신화가 어떤 전쟁을 불러일으켰는가를 보면 내가 이글의 첫머리에서 이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정체성의 질문이라는 말을 믿기 쉬울것이다.
한마디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무지를 어설프게 깨버려왔고 깨고 있다. 우리는 어떤 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목표, 사회의 안정성을 흔들고 있다.
미래로 가는길
옛 가치관과 옛 신화를 대체할 신화는 아직 전세계에 퍼져있지 않다. 그것은 그런 신화를 아직 우리는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이 세계의 돈과 권력과 정보를 지배하는 기득권세력이 새로운 신화가 퍼져나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일것이다. 이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과연 이시대에 맞는 신화란 무었인가 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은 아직 매우 무지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 사실일것이다. 그러나 지금 인간이 과연 모르는게 뭔가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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