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6.19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에서 다이하드나 러셀웨펀 그리고 미션임파서블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영화들에는 선과 악의 구도가 분명하다. 서사의 핵심은 선이 악과 싸워 무찌른다는 것이며 특히 인상적인 것은 악이 별 다른 동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악인가. 그냥 탐욕스럽기 때문이다. 혹은 미치광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본의 드라마나 영화, 만화에서 분명한 선악구도가 들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모노노케 히메 같은 이야기처럼 전쟁은 그저 조화의 깨어짐이고 나쁘게 말해봐야 권력투쟁일 뿐이다. 일본의 이야기구조속에서는 흔히 악이라고 불릴만한 존재도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는 그것이 극대화 되서 나중에는 선악이 구분할 수 없어진다. 전쟁이란 그저 권력다툼일뿐 선과 악을 논할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특징들은 아마도 한 나라는 세계대전의 승전국이며 다른 나라는 패전국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승자는 전쟁을 선과 악의 대결로 봄으로 해서 승자인 스스로를 선으로 규정하고 싶어한다. 그 과정에 생기는 모든 아픔과 희생은 악의 책임이다. 악은 그저 탐욕스럽고 성격이상자라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싶다.
반면에 패자인 일본은 싸움을 선악의 구도로 보지 않고 그저 권력다툼으로 본다. 따라서 일본은 그저 미국보다 약했을뿐 나쁜게 아니다. 도덕적으로 일본은 결백하며 미국보다 열등하지 않다. 언젠가 일본이 미국보다 강해지는 날 역사는 다시 써질 수 있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진실은 그 양극단의 어느 중간 지점에 있을 것이다. 어느 한쪽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부작용이 나타난다. 세상을 선악의 구도로 보면 미국에게 성가시게 구는 존재는 아주 손쉽게 악으로 규정되고 따라서 박멸해도 좋은 존재가 되버리고 만다. 즉 탐욕스럽고 정신이상자인 악은 구제할 방도가 없으므로 대화의 대상도 아니고 그저 박멸해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 바로 이라크와 북한이 그렇다고 쉽게 규정된 예이다. 또한 국가의 내부에서도 범죄자들은 쉽게 총으로 쏴죽여야 하는 존재가 된다. 한국에서는 살인이 나면 그럴 이유가 있을거라고 이유를 찾는다. 미국에선 살인이 나도 상대적으로 이유는 덜 추구된다. 왜냐면 미친범죄자는 이유없이 사람을 죽인다고 간단히 이해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시각은 물론 선악을 나누지 않음으로해서 주변국가를 침범하고 나쁜 짓을 했던 것을 너무 쉽게 정당화한다. 이런 시각은 거꾸로 주변국가들이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만든다. 미국은 스스로를 선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악한 행동을 하는데 있어 어느정도 규칙이 있지만 일본은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러도 아무런 도덕적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엽기적 범죄도 선악이 없는 세상에서는 허용가능할 수 있다.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괴롭히고도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강조하는 태도는 당연하게도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일본의 분위기는 이런 망언이 자꾸 터져나오게 만든다.
그럼 우리나라의 이야기구조는 어떻게 되는가. 한국은 스스로를 역사적 희생양으로 규정하는데 익숙했었다. 한국의 관점에서사람들은 운명의 꼭두각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즉 모두가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역사적으로 우리는 그저 밀려나갔다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시대의 무능과 한국전쟁의 아픔은 정당화 된다. 누가 옳았다던지 누가 무능했다던지 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한때 대단한 인기였던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를 봐도 이 점이 들어난다. 최대치와 장하림, 윤여옥등은 모두 시대적 희생자들이며 동시에 시대를 바꾸지 못한 존재들이다. 이것은 다른 사극에서도 그러했다. 이것이 약간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나 아직도 한계를 지닌다. 즉 주인공이 운명을 개척해가는 이야기구조는 아직도 한국에서 약하다.
이는 왕의 남자같은 영화에서도 그렇고 친구며 말죽거리잔혹사, 반칙왕이며 초록물고기, 태극기 휘날리며등의 영화나 대장금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장금은 장금의 성공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여전히 장금은 풍전등화같은 운명속에서 참고 견뎌내는 존재이지 혁명을 주도한다던가 왕조를 개창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위해 시작한 주몽같은 드라마도 아직 주체적 운명의 극복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영웅을 그려내고 있지는 않다.
일본은 패배를 해도 떳떳히 명예롭게 패배하는 것을 강조한다. 두 세력간의 싸움에 지면 졌다고 징징거리지는 않는다. 이것은 선악의 싸움이 아니다. 패배자는 패배한게 아니다. 실제행동은 어떻건 이것이 표면적 주장이다. 그러나 한국의 싸움은 선악의 싸움인데 선쪽이 항상 약하다. 그리하여 어찌하여 이긴다고 해도 그것은 세상의 전면적 개혁이 아니라 그저 작은 승리에 지나지 않으며 선한 주인공들은 여전히 비주류적인 인물로 남아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정의의 소시민이랄까. 과거의 이야기속에서 정의는 언제나 힘이 없었다.
한류라는 것의 핵심도 알고보면 이런 이야기가 큰 역할을 했을 수 밖에 없다. 아시아는 전체가 패배했다. 그들은 식민지의 대상이 되고 착취의 대상이 되었지 착취를 한 쪽이 아니다. 그들은 미국적 이야기구조를 받아들이면 죄인이 되어야 한다.일본의 이야기 구조를 받아들이면 일본이 행한 모든 일을 그저 그럴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두 이야기 구조의 대안은 당연히 한국이다. 비주류의 시대적 아픔을 그린 이야기구조는 아시아인들에게 평안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중국사람들에게 대장금은 따라서 어떤 미국이나 일본의 이야기보다 호소력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주류의 애환을 그린 이야기다.
모든 역사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한국적 이야기구조는 역사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 부작용도 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역사적 주변인으로 한정짓는다. 즉 스스로가 자신이 약자고 패배자임을 자인하는 결과를 만든다. 슈퍼맨의 이야기를 그대로 만들고 혹은 주인공을 한국인으로 할 때 우리는 그 이야기가 비현실적이라고 느낀다. 스스로를 비주류로 인식하는 한 세계속에 나설 수 있는 당당함을 얻기는 힘이 들 것이다. 우리는 운명에 순응하는 존재일까 아니면 개척하고 주인공이 되어 중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존재일까.
강한것에 대한 본능적 부정이 한국적 이야기구조에는 녹아있다. 시대의 희생자는 대개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독한 비주류를 보며 우리를 동일화 시키기때문에 강한 지배자들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이 있고 이는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효과도 있지만 반대로 선악의 개념을 흐리고 시대에 순응하는 태도를 만들게 된다. 다시말해 역사와 직면하여 당당해 지기보다는 핑계를 대고 희생자인척 하는 게임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탓을 하기 쉽다. 역사를 움직여 가는 주체가 나이며 그 결과는 내가 책임진다는 주인의식이 약하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만들어져 왔고 이야기들은 시대의 반영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남과 무엇이 다른가. 따라서 새로운 역사적 해석과 새로운 이야기구조의 개발은 우리나라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던지는 이야기가 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것은 우리나라에 절실히 필요한 일이다.
%주석. 이글은 2008년에 쓴 글입니다. 2018년에 다시 읽어 보니 다행하게도 다른 일들이 그간에 일어났습니다. 요즘의 영화는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는 일이 많다고 보입니다. 택시운전사나 1987같은 영화를 보면 역사를 결정해 나가는 주체로서의 의지가 훨씬 더 많이 느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존심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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