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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한국여자는 충성심이 없다?

by 격암(강국진) 2009. 4. 2.

2009.4.2

한국에서‘여자들은 충성도가 낮다’라는 평가가 있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직장에서 진급에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육아나 가정이나 본인의 상황에 따라 직장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리는 존재로 그야말로 쓸 만하면 가버린다는 평가를 종종 받는다. 문제는 이 같은 평가에 대하여 여성들의 대응이 ‘그렇지 않다’라고 반응하는데 있다.

 

많은 평균적 평가란 사실 ‘환상’이다. 사람 하나하나로 가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다. 마치 어느 나라 남자들은 바람둥이다라던가 신사라던가 하는 평가가 아무 의미도 없는 선입견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성의 직장충성도에 대한 평가는 개인적으로 보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내가 만나는 대부분의 여성들에게서 ‘책임감’이나 ‘충성심’ 따위가 남자와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다. 어느 쪽이 비정상이냐는 것이다. 과연 여자의 충성심이 적은 것인가 남자의 충성심이 과한 것인가. 우리나라 직장문화에서 상사의 일을 자기의 아내를 동원해서라도 돕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군대 같은 곳에서는 대령이나 장성급 인사의 집에서 김장을 담그면 그 부하들의 아내들이 가서 김장을 돕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게 왜 군대만의 일이랴. 우리나라 문화자체가 군대문화 아닌가?

 

여기서 물을 수 있는 질문이 있다. 과연 여자의 직장에서 일이 생기면 여자는 자기의 남편을 직장상사의 집에 파견해서 못 박고 땅 파라고 할까? 답은 물론 모든 여자에게 똑같지는 않을 것이지만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이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하는 경우는 훨씬 적을 것이다. 보라. 분명 충성도에 차이가 있지 않은가. 충성도에 차이가 없다는 것은 우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정상이냐 말이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비정상적인 충성을 사원에게 요구하면서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여자들을 차별하는 거 아닌가? 따라서 여성들이 직장 내의 불평들을 극복하는 방식은 회사가 요구하는 충성심이 몰상식하고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해야지, 우리도 알고 보면 충성한다는 식이 되어서는 답이 없다.

 

여자들은 군대와 남성문화, 의리와 충성의 문화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남자들이 ‘군대에서 인간이 된다’는 식의 표현을 하는 것은, 그 표현이 적합하냐 아니냐의 논란은 있지만 진실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군대에 가서 처음으로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시야는 알고 보면 치욕스러울 만큼 좁다. 장사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만 알고 공부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만 안다. 부자는 부자끼리만 살고 가난뱅이는 가난뱅이끼리만 사는 것이다. 박사공부 하는 사람은 주변에 박사나 교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문화를 당연시 한다. 짜장면집 배달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만 살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를 또한 당연시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한 사회에서 살지만 그리고 대화도 이따금 나누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소통에 불과하다. 그들은 공통의 과제를 가지고 같이 고민해야 할 일이 없으므로 같이 살아도 언제나 영원한 타인이다. 여성운동 한다는 사람들이 때로 국민들에게 분노를 자아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전체 국민 중의 소수라는 것을 절감해본 경험이 별로 없다. 그들이 아무리 자원봉사도 하고 가난하고 못배운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잠을 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진정 그들과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아쉬우면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고민이 여성의 고민이라고 쉽게 착각하고 따라서 그들의 말은 때때로‘부르조아 사모님들의 배부른 소리’라고 평가받는 것이다.

 

그런데 군대에서 훈련소에서 남자들은 최초로 완전히 다른 사람들과 한솥밥을 먹고 같은 것을 고민하게 된다. 그들은 단체기합을 받는 것을 걱정하고 함께 뛰고 구르면서 하나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오히려 서로의 절대적 차이를 절감하게 된다. 일단 ‘대화의 불가능성’이다. 그리고 사회경제적으로 상류층에 사는 사람들은 하류층으로 떨어지는 것의 무서움을 절실하게 알게 된다. 그들은 폭력의 위협과 상명하복의 절대성이 가득 찬 장소에서 이러니저러니 따지는 것은 소용없고 동기끼리는 뭉쳐야 하고 윗사람에게는 사적 공적 일의 구분 없이 절대충성해야 한다는 것만 배울 뿐이다.

 

즉, 대화를 통한 이성적 해결은 어차피 불가능하고 충성만이 살길이며 남이 하면 나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 남자는 군대에서 가장 생생하게 배운다. ‘지면 죽는다. 상사의 미움을 받으면 죽는것 과 마찬가지다’라는 교훈을 얻는다. 남자들에게는 군대 밖의 세상도 커다란 군대와 비슷하다. 동기가 누군지 누구에게 머리 숙여야 하는지를 빨리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같은 사회에 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런 충성도 훈련에서 특혜를 받는 여자와는 달리 한국남자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여자는 직장생활이 힘든 것이다. 여자는 이제까지 불합리한 일이 있거나 힘이 드는 일이 있으면 불평하고 떼쓰고 항의해서 문제를 개선한다는 식의 ‘상식적이고 정상적’ 생활을 해온 것이다. 직장이야 돈 벌러 가는 곳이니까 돈 받은 만큼 일해주면 된다는 상식적 생각을 하는 것이다. 시장에서 물건값을 깎는 것은 여자들이다.

 

한국 남자들은 시스템에 함부로 저항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은 목을 걸고 인생을 걸고 하는 대단한 결심 끝에 하는 것이다. 회사원의 자식들은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온순하다. 부모들이 삶에서 배우는 교훈이 자식들에게 교육되기 때문이다. 회사원의 자식들은 시스템에서 쫓겨나면 죽는 길 밖에 없다고 배운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에 순종하고 특이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이 글이 ‘한국에서 남자의 삶이 여자의 삶보다 고되다’고 주장하는 글로 읽혀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여자는 여자대로 세뇌되어 산다. 단순히 말해, 남자는 강력히 충성하도록 교육된 리더로 크고, 여자는 리더싸움에서 일찌감치 탈락된 존재로 크기 때문에 충성도 교육이 남자들만큼 강하지 않은 것이다. 어느 쪽이 편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여자들이 활개를 펼 수 있는 직장문화를 만들려면, ‘나도 충성심이 높으니 진급 잘시켜 달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주변의 남자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설득해야 한다. ‘너무 충성이 과한 거 아니냐’고 말이다. 상식적 수준의 충성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남자들을 설득하고, 그렇게 강한 충성심 교육을 받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겨서 감싸줘야 한다. 어느 정도 정신병에 걸린 것이다. 한국남자들은.

 

때문에 노조운동의 가장 큰 수혜자는 여성들이다. 직장생활이 상식적이 되면 될수록 과도한 충성심교육을 받은 남자들이 가지는 비교우위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본래 여자들이 옳은 것이다. 직장을 위해 가정과 본인의 건강을 희생하는 게 정상이 아니다. 사적 공적 구분 없이 충성하는 게 정상이 아니다.

 

한국사회도 세월의 변화는 견딜 수 없다. 신세대들이 사회로 나오자 충성심 강한 사람이 줄었다. 이제 군대도 예전 같지는 않다. 그래서 회사들은 안간힘을 다해 충성심 높은 사람들을 뽑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역들의 눈에는 신세대가 이해가 안가는 것이다. 하지만 충성심의 이익구조는 실상 이미 깨어졌다. 한국경제가 급격히 팽창할 때는 피라미드식 성장이 가능했다. 즉, 새로운 하층부가 상층부보다 훨씬 큰 구조다. 쉽게 말해 대리가 시간 되면 전부 과장 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기업이 고부가가치 산업을 하고 기계화와 정보화가 이루어지고 한국이 선진국경제에 접근하면 그런 성장은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은 이직을 하며 살아야 한다. 몇 십 년 뒤는 고사하고 몇 년 뒤도 어찌될지 모르는데, 권리주장은 뒤로 하고 충성만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평생직장 개념이 깨진 직장은 일한 만큼 돈을 받는 곳으로 변해간다. 그럴수 밖에 없다.

 

이런 군대문화는 일본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일본군대의 방식이 한국군대로 전해지고 한국사회에까지 퍼진것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여부는 떠나서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다. 침략국가가 떠나도 식민국가는 정체성 혼돈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식민지배동안 침략국가는 당연히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교육하고 강요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의리와 충성과 은원의 가치는 일제시대에 강하게 강조되었을 것이다. 현대의 일본은 전쟁 이전의 일본과는 또 다르다. 그러나 한국은 얼마나 과거의 일본에서 자유로워 졌을까.

 

21세기는 여성의 리더쉽이 힘을 발휘한다. 왜냐면 정상적으로 큰쪽은 오히려 여자니까. 그들은 사람들과 말로 타협하고 진정한 인간적 친화성을 발휘하여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 한국의 나이든 중역세대는 곧잘 부하직원 다루는 방식이란게 위에서 힘으로 누르고 술먹고 쓰러질때까지 취해서 우리는 형제요 가족이다라는 식의 군대식 친구가 되는 방식밖에 모른다. 또박또박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따져오며 공과 사를 구분하는 젊은 세대앞에서 이 ‘구식 리더’는 저항할 무기가 없다.

 

구식리더는 젊은 사람들과 사적인 대화를 할 줄 모른다. 그들은 애초 사적인 대화따위는 배우지 못했다. 진정한 대화란 서로의 속마음과 감정을 주고 받는 것이며 서로가 대등한 관계에서 하는 것이다. 인간적 신뢰를 보다 높이는 것이다. 무한한 권위로 하느님처럼 아래를 억누르는 군대상사는 아랫 사람과 진정한 의미의 대화 따위 하질 않았다. 그래봐야 권위만 손상된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속마음을 숨기고 뻔한 반응만 보이는데 익숙하다. 따라서 대화는 항상 뻔하게 시작해서 뻔하게 흐르기 쉽다. 이것은 대화가 아니다. 거의 아무런 정보가 오고가지 않는다. 여전히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모르고 윗사람들은 윗사람끼리 모이면 애들처럼 굴다가도 아랫사람이끼면 하느님처럼 근엄하게 군다. 권위를 유지하고 충성심의 피라미드를 지킨다는 것이 옛날 한국 남자가 배운 것이다.

 

이런 남자들이 정상이라며 나도 남자처럼 할수 있다고 남자처럼 행동하려는 여자 리더들이 있다. 그들이 해야할 이야기는 나도 남자처럼 충성할수 있다가 아니다. 그 끈끈한 남자들의 충성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부드러운 인간이 잘사는 시대다. 원래 상식대로라면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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