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2년전에 쓴 것입니다. 지금은 이보다 좋기를 바랍니다.
2009.4.2
한국에서 학회일로 사람들을 만날때의 일이다. 어떤 박사과정 말기쯤 되는 사람이 자동차 운전을 해주었다. 나는 처음 본 사람이니 당연히 존대어를 쓰면서 이야기하는데 한 교수가 나에게 그럴거 없다는 듯이 ‘아직 박사과정 학생입니다.’라고 말해 준다. 그 말이 참 이상하게 들렸다. 이 사람이 1년쯤 지나 박사를 받으면 갑자기 나와 동등해지고 지금은 이런저런 잡일을 시키며 반말로 무시해도 된다는 뜻일까? 학생이 졸업을 하면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걸까?
옛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가 대학교 4학년때 제주도 여행을 했었다. 제주에서 한무리의 대학생을 만나는데 인상좋게 생긴 한 대학생이 대학교 학번을 묻더니 자기는 2학년이고 다른 학생은 1학년이란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아직 애들입니다.’ 그 사람에게 어떤 악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학교 2학년이 1학년을 애취급한다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 적어도 그때의 한국이었다. 지금은 다른가. 얼마나 다른가. 그런 사람들에게 대학원생이나 교수나 사회인은 감히 말도 섞기 어려운 신적인 존재일것이다. 하늘위에 하늘위에 하늘이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한국의 지식인이 진취적이 될 수 있을까.
외국 생활을 좀 하면 알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인은 한국인을 피해다닌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외국에 살면서 고의적으로 현지 한국인들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가 다른 한국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서로를 만나면 인사 한두번하고 또 마치 친형제 친부모라도 되는 것처럼 뭉치는 것이 또 한국 사람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이나 일본사람이나 중국 사람이상으로 잘 뭉친다.
이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가지 현실들은 실상 긴밀히 연결되어져 있다. 한국 사람들은 다른 한국 사람을 쉽게 만나지 못하는데 바로 일단 약간이라도 친분을 가지게 되면 지나치게 서로 얽혀드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만나자마자 5분만에 친형제처럼 친해진다. 이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좋은 것이지만 잘 모르는 나쁜 사람을 만났을때는 재앙이 된다. 따라서 한국 사람과 친분을 맺는 것은 거액의 도박과 비슷해 진다. 잘되면 아주 든든해 질 수 있지만 잘못되면 너무 힘들어 진다.
이 때문에 외국에 사는 사람은 외국인들과 인사하고 잡담을 시작할 때는 편안한 마음으로 하지만 한국 사람의 경우에는 매우 조심을 하면서 하는 경우가 많다. 안정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도박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한국 사람을 피하고서도 잘 살 수 있다면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을 피하고 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한국에 살면서는 한국 사람을 피할 수 없다. 항상 한국사람에 둘러쌓여 살다보면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게 뭔지를 잘 모를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일까.
한국문화의 특징은 호칭의 문제에서 극명히 들어난다. 전 세계를 돌아다녀도 한국 사람만큼 호칭따지고 높은 호칭 불러주기 좋아하는 나라를 찾기 힘들다. 우리는 서로를 다르게 부르고 딱지를 붙여서 부르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대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박사 받고 교수되면 사석에서도 무슨 박사, 무슨 교수라고 서로 존칭하는 건 흔한 일이다. 조기축구회 회장을 10년전에 했어도 회장님이고 하다못해 형님, 선배 라고 부르고 사모님이라고 부른다.
서로 높여주니 좋은거라고 할지 모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호칭부르기란 사실 서로를 옭아매는 그물이나 늪 같은 것이다. 한국을 명예의 거품으로 가득찬 사회로 만든다. 모두가 평등한게 아니라 서로를 이러저러한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그에 따른 의무와 권한이 따라서 인정된다. 이것은 매우 귀찮은 것이다. 또한 호칭이란 대개 일단 불려지면 고정이 되기 마련이다. 이는 한번 호칭이 정해지면 두사람 간의 인간관계도 어느 정도 물흐르듯 변해가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질과 호칭과 예법이 다른 경우도 생긴다. 물론 그 결과 우리는 불편해 진다. 그리고 사람들을 차별하는 장벽은 더 많이 생겨난다.
이래서 한국 사람들이 처음 만나면 대부분의 경우 약간의 긴장이 흐른다. 바로 호칭때문이다. 서로를 어떻게 부르는 가는 몇분안에 결정되는데 대부분 이 호칭의 결정이 상호간에 지켜야할 예의범절을 결정하게 된다. 선배라고 부르거나 형이라고 부르거나 무슨 씨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 그러니 서로 어떻게 부르는가를 두고 당황해 하고 서로 나이를 알게 되거나 하는 일에 조심스러워 진다. 직장 상사의 부인과 부하직원의 부인, 의사의 부인과 레지던트의 부인은 남편들의 직급처럼 상하관계가 있다는 식의 몰상식이 한국에서 지속 되는 것도 이 복잡한 위계질서에 대한 인식때문이다. 호칭이 그런 구조를 포함하고 있고 사람들이 그런걸 기대하게 만든다.
우리가 외국의 예절을 그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상황을 보고 참고할 필요는 있다. 미국이나 이스라엘 대학원에서 지도교수를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지도학생을 나는 본적이 없다. 그쪽에서는 서로에 대해 존칭을 부르고 있다는 것은 서로 안 친하다는 증거다. 지도학생이 지도교수랑 안 친하다는게 말이 되는가. 미국에서 지도학생에게 나를 부를때는 계속 프로페서라는 말을 붙이라고 한다면 그런 교수는 지독한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다. 미국 대통령도 사석에서는 아는 사람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고 지내는게 당연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서양이라 그렇다치고 일본은 어떨까. 일본의 연구소에는 당연히 박사들이 즐비하다. 거기도 한국같이 서로 나까무라박사 고이즈미 박사 이렇게 부를까? 서양과는 다르다. 하지만 일본도 우리나라 만큼은 아니다. 존경의 의미로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평어를 쓰거나 무슨 무슨 상이라고 부를 뿐이다. 우리나라만큼 사석에서도 이사님, 박사님, 교수님, 장관님 하면서 서로 직함 부르는 나라를 나는 본적이 없다. 우리는 강력히 직함을 의식한다. 의식하게 만든다. 감투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문화다.
호칭은 더구나 남녀 불평등적인 요소도 많다. 전통적인 호칭은 으레 남성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아는 남자의 부인을 높이는 말로 사모님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는 그 남자를 내가 배움을 얻는 스승이라고 높이는 뜻에서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여자라고 하자. 그 여자의 남편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사부님?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러니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헤매는 일이 종종 있다. 규칙을 따져보면 바깥양반이나 바깥어른으로 불러야 한단다. 그러나 이런 규칙은 도대체 어디 구석에서 나온것일까. 누가 언제 만든것일까. 원래 그렇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조선시대 기준인가? 언어를 유지하는 것이 과거의 악습도 유지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친형제가 아닌데도 남녀가 친해지면 오빠라고 부르는 일이 많다. 그런데 그게 남녀관계의 친밀도를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어떤 여학생들은 그걸 거부하고 싶어서 연상의 남자를 부를 때 아예 형이라고 부른다. 오빠라고 불렀을 때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건 또 어느 나라 말인가. 이렇게 한국의 인간관계에서 호칭은 골치아픈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만나 처음 호칭을 부르는 순간 한국인의 인간관계는 상당부분 고정되고 만다. 구분이 생기고 누구와 누구는 같은 부류로 누구와 누구는 다른 부류로 분류되고 만다. 한번 불린 호칭은 대개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고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호칭으로 불려서 휩쓸리기도 한다. 우리가 사람들을 구분해서 부르는 순간 세상에는 차별이 생기고 사람들을 구속하고 구속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부지런히 세상을 복잡하고 고정된 것으로 만드는 일은 요즘 같이 세상이 복잡하고 빨리 변하는 시대에 특히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구분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더라도 좀 덜 구분해야 하는거 아닐까.
호칭문제의 배후에는 한국 사회가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공사구분이 안된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한국에서 선배라고 쉽게 부를 수 없는 것은 선배라고 부르는 순간 선배 후배사이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관습이 적용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호칭이 세분화되어 쓰인다는 것은 그 호칭을 부르는 순간 그 관계가 고정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국에서는 부지런히 상하관계를 만든다. 대학에서 학번따지고 회사에서 기수따지고 해병대 기수따지고 나이따지고 촌수따지고 집안내 서열따진다. 서로가 서로를 얽어맨다. 누가 누구보다 위니까 이러저러한 권한, 이러저러한 기득권을 가진다는 것인데 그 상하관계를 따지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이쯤되면 제대로 따지기 위해서는 박사학위라도 가진 전문가가 필요할 지경이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경우 호칭을 제대로 몰라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부자유하게 만들고 그 제약속에서 상처받고 힘들어하고 허우적 댄다.
세상은 합리적 사고 이상으로 사회적 관계에 의해 지나치게 영향받는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이나 중국은 물론 일본과 비교해도 매우 작은 나라다. 결국 전국민이 몇다리 건너면 이리저리 사회적 관계로 얽힌다. 몇다리 건너면 모두가 위아래로 얽혀있으니 모두가 상처입을까봐 꼼짝도 못한다. 공사구분이 어려워 진다. 아들딸들 입시관리를 아버지가 하는 셈이다. 자유가 없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욕을 먹으면서도 가장 높은 시청률을 보이는 드라마는 바로 가족이 나오는 드라마다. 이상한 며느리,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 삼촌, 여동생이 줄줄이 나타나서 한판의 자학적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욕을 하면서 비현실적이라고 하지만 또 그만큼 열심히 본다.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다. 왜 관심이 있을까. 바로 그 인간관계가 우리를 힘들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한국인은 자유롭지 못하다. 나이가 많은데도 대학동기인 친구와 껄끄러운 일이 있을 수있다. 입사선배 보다 높은 직급으로 출세했을 경우 우리는 곤란함에 처한다. 형제들의 며느리가 혹은 자매들의 사위가 나이순서 대로가 아니면 서로를 부르는데 곤란해 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 어제까지 언니 언니하던 사람에게 반말을 듣는 수도 있다. 친구의 남편이 내 남편의 직장상사가 된다면 심각하게 손상된 자존심때문에 우정에 금이 갈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만난 앤디는 대학원에 들어오기전에 세계를 2년간 여행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것이 보다 어려워지는 이유는 돈의 문제가 아니다. 위아래를 따지는 문화 때문에 모두가 같은 경로를 밟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남보다 늦게, 남과 다르게 살았다가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규격품이 아니기 때문에 분류가 되지 않는다. 규격품이 아니라면 어떤 사람으로 대접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대학이든 대학원이든 회사든 몇살에는 뭐 하는 식으로 인생 시간표에 따라 살아야 한다. 이것은 한국사람들의 삶의 다양성을 크게 해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가 아닐까. 불필요한 권위와 인간관계의 차별은 해체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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