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16
문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일까. 불의 사용? 언어의 사용? 농업혁명? 산업혁명? 문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생각의 교환과 축적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간의 지능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식을 축적하는 능력이다. 인간 하나의 능력은 동물보다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인간은 집단으로 대를 이어 지식을 축적하여 문명을 쌓아올렸기에 지금의 차이를 보이게 된것이다.
문명의 가장 초기의 기록중의 하나는 바로 돌도끼다. 그럼 돌도끼를 쓰기만 했으면 그게 문명일까? 그게 아니다. 심지어 돌도끼도 표준화가 일어난다. 즉 누군가가 돌도끼를 썼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배우고 비슷하게 돌도끼를 만들었다. 결국 쓰기 좋은 돌도끼가 손쉽게 만들어 지는 환경이 만들어 진다. 돌도끼 제작의 지식이 누적되고 발전한다. 축적되지 못하는 지식이나 기술은 사라지기 때문에 숲에 사는 어떤 다른 동물이 우연히 인간의 돌도끼보다 더 대단한 것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 동물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종족이 되지는 못한다. 우연히 습득된 그 기술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축적되지 못한다면 대천재가 있어서 잠시잠깐 반짝이는 일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반면에 축적이 가능하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반드시 기술은 발전한다. 따라서 문명의 발전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 기술과 지식의 축적이다.
기술과 지식의 축적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개념의 설정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세상을 여러가지 사물들로 이뤄진 것으로 보는 이 분류하기가 기억하고 지식을 축적하며 소통하는 것의 기본이다. 돌을 그냥 돌이라고 부르고 있는 동안에는 돌도끼 기술은 잘 발전할 수 없다. 돌의 종류를 분류하고 돌을 깨는 방식에 이름을 붙일때 그것이 가능해 진다. 즉 지식의 축적과 전수를 위한 언어가 발달해야 한다. 일단 그것이 가능해지면 여러가지 지식 즉 수렵이나 채집, 농경같은 여러가지 지식이 축적되고 발전한다. 그러나 축적은 결코 무한히 가능하지 않으며 축적이 가능한 극한에서 지식과 기술의 손실은 일어난다. 문명이란 끝없이 누수가 일어나는 가죽 주머니에 물을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축적이 누수보다 빠르기 때문에 문명은 성장하는 것이다. 그 반대라면 문명은 차차 원시로 돌아갈 것이다.
문명의 축적은 또한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돌도끼를 쓰던 원시인이나 천년전 농부보다 아는게 많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보통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란 매우 제한 적이다. 우리는 모두 문명의 일부를 알고 서로 연결되어 그것으로 후대로 물려주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거대한 인적 네트워크, 거대사회를 유지하고 있기에 유능한 것이다.
근래 산업혁명 이후 서양과학기술의 비약적 성장이 있었던 것은 서양에서 복잡하고 추상적인 것들을 다루는 관념을 크게 발전시키고 그 정점에서 뉴톤같은 과학자가 미적분학같은 엄밀한 수학을 발전 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논리의 정교함은 훨씬 크게 발전하였고 문명의 누적은 빨라졌다. 그 결과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과학자들이 세상의 모든 신비는 모두 밝혀졌다고 말할정도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는 정보의 축적이 가지는 중요성을 오늘날에도 목격한다. 이야기를 잠시 바꿔 우리 어머니의 요리에 대해 말해보자. 우리 어머니에게 며느리들이 집안에서 해오던 요리법을 가르쳐 달라고 할 때가 있다. 그럼 우리어머니는 "여러가지 양념"이라던가 "적당히" "대충"같은 말을 많이 하신다. 즉 여러가지 양념을 넣고 대충 버무린다, 뭐 이런 식의 설명을 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정확한 레시피가 안나오고 가정요리는 대를 잇기가 좀더 어렵다. 이것은 나아가 한국 요리의 발전이라는 문제와도 연관이 된다. 전국의 김치들의 조리법의 정확한 레시피를 모을 수 있다면 그것을 기반으로 다음세대가 전세대의 요리를 재현하고 더 발전시키기가 쉬워진다. 이것이 가능할 때 요리의 발전은 크게 빨리 지게 될 것이다. 천재적 요리사나 특정 재료의 도입이 한국의 요리를 바꾸는 것도 있지만 실은 그보다 기본에는 이런 정보의 축적과 전수가 있다. 요리의 개량에 있어서도 축적과 소통이 핵심이다.
한국은 세계 2차세계대전이후 후진국에서 선진국레벨까지 성장한 매우 드문 나라다. 홍콩이나 싱가포르는 나라라고 보기 어렵고 대만도 한국과 비교하면 규모가 훨씬 작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물론 이는 여러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승만과 박정희가 답이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미국이 도와줘서 그렇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이병철이나 정주영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한국문화안에 기술과 문화를 축적할 능력이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특히 우리의 언어, 우리의 한글이 뛰어나서 문맹률이 낮고 따라서 교육받은 인력을 대량으로 키울 수 있었던 것이 크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만 있다면 지식과 지혜는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그 능력이 안되기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나 뛰어난 한두명의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뭔가를 해도 그것으로는 결정적 변화를 나타낼 수 없다. 대걸레처럼 크고 뭉툭한 붓으로는 섬세한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한국에 절실히 필요한 한것중의 하나는 엄밀한 과학적 합리주의다. 우리는 그게 떨어진다. 실제 사회적으로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도 이공계 트레이닝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많다. 따라서 적당주의가 만연해 있으며 사회적인 여러가지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전문가의 의견은 간단히 무시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적 체계는 포기해 버리고 서양의 철학적 체계의 엄밀성은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화하지 못할 것이다. 언어는 특히 추상적 언어는 긴 역사적 맥락에 따라 미묘한 여운을 남기는 의미를 가진다. 결국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이 되면 우리는 우리의 철학, 우리의 철학자가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발전은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정보처리가 비합리적이고 사회적 판단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과학적 합리주의를 몸에 익히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 그것이 한국의 당면한 과제다. 소통을 하자는 당위 이전에 소통이 언제 어떻게 가능할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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