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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한국문화에서의 개인의 실종

by 격암(강국진) 2009. 11. 2.

2009.11.2

 

한국문화에서의 개인의 특징

 

언젠가 아내와 대화를 나누다가 아내가 여명의 눈동자를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펄쩍 뛰었다. 아니 아는 사람은 해방이후 최고의 드라마로 꼽는 여명의 눈동자를 보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여명의 눈동자를 구해서 얼마간 같이 보았다. 여명의 눈동자의 극본을 쓴 사람은 송지나씨로 김종학 PD 와 함께 모래시계도 만든것으로 안다. 같이 보다가 보니 느껴지는게 있다. 이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것은 시대적 변화앞에서 무력하게 흔들리는 개인들이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사람들이지만 역사앞에서 무력하게 흔들리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에는 사무라이 정신이라는게 있고 미국에는 개척자정신이라는게 있다. 나는 그게 거리에서 얼마나 보이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속에서는 그런 걸 자주본다. 천황의 은혜나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신세를 갚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의리의 남자가 나오는 일본영화나 이야기는 흔하다. 미국 영화하면 서부영화의 총잡이였고 지금은 베트맨 스파이더맨 슈퍼맨하는 식으로 마블코믹스의 캐릭터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결국은 영웅의 이야기다. 그들은 대개 고독하다. 영웅은 스스로의 도덕적 독립성을 가지고 외압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위해 일한다. 

 

이런 한미일의 이야기구조를 두고 한때 나는 이렇게 정리했다. 식민지로 정복당했던 한국은 "우리는 어쩔수 없었어. 세상의 힘이 너무 세서. 우리는 휘둘렸을뿐이야." 이렇게 말한다.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패배한 일본은 "의리에 따르고 상관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우리는 의리를 지키고 명령을 따랐을 뿐이야."라고 말한다. 세계대전을 이기고 세계 패권국이 된 미국은 "우리는 정의를 실현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해서 외로울 때도 있지만 우리는 굳은 신념으로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이 될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구조는 각나라의 시민들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라고 권하고 있다. 한국의 것을 보자면 한마디로 개인은 없다. 우리는 무력하다. 

 

개인의 나타남과 사라짐

 

여명의 눈동자는 1991년에 나왔다. 그럼 그 이후 우리의 이야기구조는 바뀐적이 없었을까? 아니다. 개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던 영화 초록물고기가 나온때가 1997년이다. 그 이후 나는 한국 영화를 자주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한국 영화에서 개인이 나타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명의 눈동자는 대단한 명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규모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며 각 캐릭터들이 대단한 노력을 해도 도저히 이길수 없는 손이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고래사냥이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같은 영화들을 보면서도 나는 이런걸 느꼈다. 주인공들은 무기력하다. 세상은 너무 강해서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만들어가지 못하고 무의미한 저항을 할뿐이다. 

 

초록물고기는 어떨까? 초록물고기 역시 사실은 좌절하는 이야기다. 막 군대를 제대한 막동은 나이트클럽에 취직을 하고 조직에서 성장하다가 결국 보스에게 죽음을 당한다. 형에게 울면서 전화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막동은 무력하게 깡패가 된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욕망에 따라 깡패가 되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출세도 한다. 즉 스스로 선택해서 잘나가는 것이다. 자기 삶은 자기가 개척한다는 자기확신이 전보다 강하다. 그의 실패는 해보지도 않고 좌절한 실패가 아니라 노력끝의 실패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성공이라고 봐야 한다. 실패와 성공은 하늘에 달린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는 발상이랄까.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한석규는 죽는 남자를 연기하며 결국은 쓸쓸히 죽어가지만 결코 주인공은 패배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아름다운 사랑을 완성한 것같다. 그것은 영화를 보고 났을 때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반칙왕도 기억에 남는다. 레슬링을 하는 특이한 사람이긴 하지만 비루한 셀러리맨의 일상은 전이라면 영화의 스토리로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 셀러리맨은 그안에서 나름의 승리를 거둔다. 

 

이렇게 내 눈길을 끌어대던 한국의 영화는 그러나 한국 영화의 성공과 더불어 이상한 길을 가기 시작한것같다. 더 많은 돈을 들여서 비싼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약해진것이 바로 개인, 인간이다. 더 화려한 영상, 폭력, 매력적인 여배우를 등장시키는 영화는 거꾸로 과거로 회귀하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즉 과거처럼은 아니라고 해도 왠지 중심인물들이 자유가 없어보이고 개성이 없어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사람 A일 뿐이다. 인물감이 평면적이라고 표현하던가?

 

이런 것은 단지 영화뿐만은 아니다. 대장금에서 장금이는 여러사람을 울리는데 장금이의 대단한 성취때문이 아니라 장금이의 가족, 내면적 슬픔때문이다. 장금의 엄마나 스승이 죽어갈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으며 장금이가 시험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하고 차별받을 위기에 처할때마다 사람들은 얼마나 슬펐던가. 그런데 주몽이나 태왕사신기는 어떤가. 제 아무리 다른 걸로 가려봐야 타고나길 대단하게 타고난 놈한테는 이길수 없다라는 선민의식적인 그림이 또렷히 보이는 것같다. 그러니까 승자의 운명이 승자를 만든다는 식이다. 

 

왜 한국문화에서 개인이 사라져버렸을까?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사회의 변화가 문화에 반영된것인가 아니면 문화가 사회를 그렇게 이끌은 것인가. 나는 이것이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한다. 더많은 자본이 문화판에 끼어들면서 작품의 선택이나 제작에 돈가진 사람들의 입김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들은 대단한 영웅이 아닌 소시민의 감정과 선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007이나 광개토대왕같은 영웅이 나와서 악당을 쳐부수는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재미가 없다. 갑자기 99.999%의 보통사람들은 그저 풀이나 나무같은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며 중요하지 않은 배경중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잘나가는 혹은 잘나갔던 배우들에 송강호, 한석규, 박신양 이런 사람들을 보면 다 대단한 미남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밑바닥 인생에 어울린다. 직업없는 백수에 무시당하고 살면서 욕이나 입에 달고 다는 남자들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인기있는 한국에서 자본들은 열심히 한국판 미국 영화를 찍는다. 그리고 재미가 없다. 같은 돈을 들여도 같은 특수효과라도 미국 MIT의 로버트 박사가 연구중 슈퍼맨으로 변했다는 이야기와 서울대 김박사가 연구하다가 슈퍼맨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다르다. 앞쪽이 슈퍼맨이야기면 뒷쪽은 우뢰매다.  

 

맺는말

 

왜 한국판 슈퍼영웅은 박신양이나 송강호같이 뭔가가 결핍된 남자같아야 좀더 설득력이 있을까. 여러이유가 있지만 그것은 한국 사회의 자유와 평등수준이 미국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한국이라는 배경을 두고 문제는 하나도 없는 인간을 설정하면 왠지 이중인격자가 아니면 독재자 같은 느낌이 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도 사석에서는 서로 이름으로 부른다. 학부생이라도 좀 안면이 있으면 대학총장을 만날때 이름을 부른다. 미국이라는 문화적 배경에서 영웅을 추켜올려도 사람들이 불안해 하지 않는 이유는 독재에 대한, 평등에 대한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무적의 영웅을 그리면 태왕사신기 꼴이난다. 다른 사람들이 성웅이라고 벌벌기면서 추앙하는 인간이상의 존재말이다. 한국은 그런거 싫어한다. 적어도 상당수 사람들이 그렇다. 

 

이래저래 개인이 실종된 한국영화는 매력이 없다. 한류의 부흥과 실종은 내가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관심을 가지는 정도와 비례하는 것으로 봐서 세상의 눈도 그런것같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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