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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음악과 사회의 진보

by 격암(강국진) 2009. 12. 5.

2009.12.5

독일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쓴 책, 부분과 전체를 보면 세계 2차대전이 터지기 전의 독일 청년들의 모습들이 나온다. 하루는 그들이 고성에 모여서 혼돈된 당시의 사회현실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그것은 저마다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고 반박을 하는 식의 집회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비록 모두의 순수한 열정과 선의가 느껴지기는 했으나 시간이 흘러도 어떤 일관성있고 통일된 곳으로 핵심적 논의가 흘러가기는 커녕 논의가 분열되고 제자리를 맴돌고만 있다는 것이 모두에게 분명해 졌다. 저자에게 이것은 대단한 고통을 주는 일이었는데 이때 이것을 한 첼리스트가 해결해 준다. 그가 음악을 연주하자 모두의 마음에 어떤 공감대가 떠올랐으며 그 이후 토론은 보다 통일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다.

 

철학자 칼 포퍼는 음악에는 주관적 요소뿐만 아니라 객관적 요소가 있다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인간이라면 모두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공통의 것, 모두가 옳다고 느끼고 모두가 좋다고 느끼는 그런 객관적인 것이 음악 안에는 존재하며 존재하며 음악이 단지 서로 독립되어 제멋대로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을 표현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을 포함한 예술은 이런 객관적인 것을 표현하는 대안적인 방식들이 될 수 있다. 예술은 말로 전달하자면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체험하게 만든다. 그래서 때로 한권의 책보다 한곡의 노래에서 감동을 느끼고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다.  

 

공산주의가 많은 사람의 생각을 바꿔 -좋은 쪽으로건 나쁜쪽으로건 - 사회적 변화를 일어나게 했다는 것은 한국사람 대부분이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지식의 전달이 훨씬 편리해진 오늘날도 국민대다수가 읽고 공부해서 고급의 철학과 고급의 사회과학이론과 고급의 과학적 지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순진한 합리주의적 이상은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 바탕에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현실을 완전히 무시한 것으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는 생각이다. 그건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깨어있는 시민들의 사회적 통합은 어떻게 가능한가? 모두가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저 지도자를 우상숭배하는 일이 되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필요한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과학적 논리적 지식보다 훨씬 더 쉽게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음악과 희극 그리고 그림들은 말로 표현하자면 끝없이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느낄수 있게 만든다. 어떤 삶의 태도를 표현하고 전달한다. 80년대 민중을 움직였던 것의 상당부분은 민중가요가 아니었을까? 유럽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이뤄지고 장인정신이 널리 퍼지는 등이 일이 왜 일어났을까. 그것에는 예술 그중에서도 음악의 힘이 큰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의미에서 서양문명의 발달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서양음악에게 빚지고 있다. 예술문화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되고 미래 비전의 이해가 가능해 질 수 있었으므로 그 비전을 실현시킬 사회적 단합도 가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감상은 단순히 소비적인 행위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과거를 보고 배우는 것과 그것을 따라하는 것은 다르다. 즉 이런 이야기를 듣고 우리 지금부터 클래식 음악을 듣자는 결론을 내려서는 곤란하다. 유럽인은 유럽인의 공감대를 만들어 냈고 우리는 우리의 공감대를 만들어 내야 한다. 19세기의 정신은 20세기를 지나면서 망가지고 수정되고 재평가되었다. 과거에 대한 존경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유럽의 19세기를 쫒아서 그대로 하자는 식이 되서도 곤란하다. 음악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음악이 필요하다. 

 

모든 국민이 한가지 음악에 도취된다는 그림은 전체주의적인 발상으로 비판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감당할 수 있도록 통일성, 공감대등이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이 반드시 음악 혹은 나아가 예술의 형태이기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지나간 위인에 대한 존경의 형태일 수도 있다. 미국이 워싱턴과 링컨을 사회의 중심에 세우듯 말이다. 그것은 종교나 철학적 공감대일 수도 있다. 그것은 어떤 윤리적 가치일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태도 같은 것말이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쁜가를 따지기 이전에 그런 공감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 집단은 끝임없이 분열하고 불화가 생긴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원칙을 자기마음대로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꼭 음악이나 영화나 소설같은 형태일 필요는 없지만 그런 것들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감상하고 저마다의 의견을 나누는 일은 꼭 필요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되고 통합되게 된다. 

 

그럼 2009년 현재의 한국에는 어떤 음악, 어떤 소설, 어떤 미술이 주목받고 있는가. 미술은 대중성이 거의 없고 음악은 섹시한 여가수들이 춤을 추는 댄스음악이 대세며 소설중에 제일 잘나가는 소설은 일본의 하루키가 쓰는 개인주의적 소설이다. 사실 이것은 한국뿐만이 아니다. 그것이 민요이건 클래식음악이건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교육으로 전해주는 음악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꽤 되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고 자란다. 다시 말해 어른들이 미술감상과 음악으로 피로를 씻고 좋은 소설을 읽으면서 정신적인 훈련을 하는 삶을 산다면 아이들은 그것이 올바른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런 미술과 음악과 소설이 사람들을 이어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제 모두 과거의 일이 되었다. 즉 세상은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하게 분화해서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고 반응하는 문화 컨텐츠는 대개 원초적인 것만 남게 된 것같다. 성적인 것이나 음식에 대한 것이나 폭력과 돈에 대한 판타지 같은 것말이다. 한국도 그렇고 외국도 그렇다. 

 

약간의 예외를 들라고 하면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가 예외적이다. 천만영화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폭력과 섹스가 범벅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한국 사회에 거의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일 수도 있다. 음악도 물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자극을 강조하는 음악이 아니라 나름의 메세지와 복잡한 감정을 담은 음악도 성장하고 있다. 한국이 미국이나 인도같은 소수의 나라를 제외하면 자기 문화를 나름 지켜나가는 나라라는 사실은 한국의 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도 한다. 

 

좋은 나라는 돈이나 과학기술이나 논리만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좋은 음악이 필요하다. 사회적 융합이 필요하다. 지금은 별로 그런게 확실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런 희망이 확실하게 꽃피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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