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우리 것이 소중한 이유

by 격암(강국진) 2010. 6. 4.

10.6.4

머릿말

우리의 것이 소중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로 말할 것이다. 나는 몇 개의 다른 나라에서 살아본 사람으로서 그것을 한국의 정치며 문학이며 학문과 관련하여 말해보고 싶다. 

 

문화의 자명한 성질 하나

머릿속에 홍콩 무협 영화를 떠올려 보라. 그리고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를 생각해 보라. 마지막으로 미국의 슈퍼맨영화나 다이하드 같은 액션 영화 혹은 서부 영화를 떠올려보기 바란다. 누군가 이 세가지의 영화들을 말하면서 그것들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논한다고 하자. 그같은 논의는 분명 나름의 문맥에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국영화 일본영화 미국영화란 어떤 것인가를 논하고 중국 영화 일본영화 미국영화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이 되기에는 크게 미흡할 것이다. 똑같이 칼로 찔러도 문맥에 따라 느낌이 다르기에 폭력성을 정확히 측정하기 어려운 면도 있을 뿐만 아니라 폭력은 영화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노출도 마찬가지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티브이에서 누드가 나와도 사람들이 성적노출이 심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서양인이 벗고 나오면 사람들은 좀 더 심하게 반응하고 한국 여자가 벗고 나오면 사람들은 펄펄뛴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노출의 정도가 같아도 그렇다. 이때문에 신체노출에 대한 일반적 규정을 놓고 영상물이 어느정도 까지 노출을 해도 되는가를 객관적이고 일반적으로 논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문화가 가지는 이런 주관성과 다면성 때문에 문화나 예술의 향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평론가가 말하는 것이라고 해도 옳다고 하기 어렵고 대중의 평가가 나쁘다고 해도 나중에는 그 평가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비주류가 주류를 뒤집는 것이어야 말로 문화발전으로 여겨지지만 이말은 뒤집으면 그런 역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비주류는 나쁜 평가를 받고, 인기가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태지가 등장했을 때 한국에서 평이 극히 나빳다는 사실도 유명하지 않은가. 

 

자기를 지키지 못한 한국.

한국 사회를 보고 있으면 문화의 이러한 점이 거의 완전히 망각되어져 있다. 때문에 외국의 눈으로 우리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 이미 많은 것은 사라졌다. 홍콩에 가보라.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거기 가보면 동시에 중국의 저력을 느낀다. 간판만해도 우리나라 처럼 국적없는 서양식으로 도배되어 있지 않으며 중국의 문화색깔이 나타난다. 수출되어 매트릭스 같은 영화에서도 보여지는 홍콩 영화의 액션신은 사실 중국 경극의 전통에서 발원한 것이다. 자기것이 아니면 빛이 나질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옷을 입지 않고 우리의 노래를 듣지 않으며 우리의 옛날 이야기를 읽지 않고 우리 조상의 이야기를 거의 듣지 않는다. 한국 조상의 철학을 심각하게 배우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지우고 버리는 것을 당연시 한다. 우리가 우리 조상의 시와 산문을 얼마나 읽는가. 우리가 우리 조상의 위인을 거론하며 이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것은 깡그리 지워지고 있다. 좋은 것이던 나쁜것이던 그렇다. 

 

문화나 국가적 정체성도 시간에 따라 바뀌는 것이며 나는 반드시 우리 것이 더 좋은 것이라 변화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문화 혹은 삶의 양식은 매우 복잡한 것이라 우리는 항상 현재의 우리 상태를 인식하고 거기서 어디로 변해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변하려면 자기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디로 가자고 해봐야 그건 현재위치도 모르면서 서울가려면 좌회전인가 우회전인가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것중의 하나는 일본인들이 얼마나 작은 것들을 연구하고 기록으로 남기는가 하는 것이다. 일본에는 크고 작은 도서관이 사방에 있다. 거기에 가보면 정말 작은 지방에서 그 지방의 역사와 풍물을 연구하고 지키려고 하는 노력을 한 흔적을 보게되고 감탄하게 된다. 조그마한 신사들이 일본전역에 남아 있고 도서관에는 우리 동네의 산책길은 이러저러하게 하면 된다는 책도 만들어져 있다. 자기 고장의 역사를 소중히 하고 고장을 좀 더 잘 알려는 노력이 보인다. 적어도 우리에 비하면 자기를 잘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정치가들은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해가야 하는가를 논한다. 그런데 그런 논의 속에서 삶의 형식자체를 문제삼는 경우를 나는 거의 보지 못한다.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미약하다. 사람들은 그저 돈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마치 1억짜리 집이면 그것이 단독주택이건 아파트건 초가집이건 기와집이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이 점에서는 진보도 그리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그들도 일반론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한국적 특수성은 대개 진보에 의해 거부된다. 유교의 덕같은 주제를 꺼내는 진보주의자는 얼마나 될까. 유럽이나 미국의 정치학자나 철학자는 줄줄이 논하지만 그것을 우리의 전통적 철학과 삶의 방식에 무리없이 연결시켜서 논하는 진보주의자는 얼마나 될까. 대개는 통째로 우리 미국이되자 프랑스가 되자 독일이 되자는 식으로 말하는 느낌이다. 헤겔이니 들뢰즈니 논해봐야 일반인들은 듣지도 않으며 듣는다고 해도 우리의 현재는 알고 어디론가 점프하자는 것인지 알도리가 없다. 

 

변화를 논하는 사례중 하나

예를 들어 지역주의나 부패를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종종 너무 이런 문제를 쉽게 보는 것같다. 즉 단순히 나쁜 사람, 좋은 사람으로 구분해서 부패는 나쁜 사람때문에 생긴다는 식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변화, 개혁은 그저 단순히 욕심 적은 사람, 좋은 사람들이 욕심많은 사람, 악당을 쳐부수는 것이 된다. 

 

나는 한국의 호칭문화와 권위주의에 대해 종종 말하곤 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너무 쉽게 호형호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니것 내것이 없는 관계로 들어가는 일도 많으며 호칭으로 사람들을 나이, 직급등으로 엄청나게 세세히 구분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를 내고 기분나빠한다. 이런 문화가 있으면 잘나가는 사람들끼리 뭉치고 서로 손발을 묶어서 부패하기 쉽게 된다. 판검사가 모두 부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후배따지고 의리따지는 한국문화에서 모든 것이 법대로 똑같이 움직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보다. 다시 말해 문화가 그대로인데 단순히 선악으로 지역주의나 부패가 변할 수 있냐는 것이다. 

 

유학을 반대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유학은 우리의 골수에 있다. 유학을 벗어나는 길은 유학자들의 철학을 무시하는게 아니라 그걸 샅샅이 알고 뛰어넘는 것이다. 그 내부적 논리를 이해할때 만이 우리는 거기서 자유로워 질수 있다. 서양과는 전혀 다른 호칭문화같은 문화풍습을 존중하면서 살면서 서구철학이나 서양 정치제도만 도입하면 서양처럼 사회가 흘러갈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오류다. 

 

한국인은 나름의 문화를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가지고 있다. 자기를 잃어버린 한국인들은 마치 해안에 갑자기 나타난 서양인이 한국인을 보듯이, 아주 단순하게 스스로를 본다. 그렇게 생각하고 밀어부치는 개혁은 결국 엄청난 피해와 증오심만을 남길 뿐이다. 

 

대중문화의 중요성

문제는 대중이다. 몇몇사람이 아직도 한복을 만들고 있다거나 조선시대 철학자에 대한 전문가는 우리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박물관에 있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문화는 여러사람이 즐기고 그처럼 살아가고 있어야 문화다. 그런데 길거리를 다니고 우리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정말 우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한복을 입니 안입니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 정체성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 즐기는가 아니면 전부 모든 것을 수입하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지금 우리 가요계가 우리 가요계인가? 그냥 서구풍노래 정교히 배껴서 만들지 않는가. 한국의 음반시장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이젠 오래된 소식이다. 나는 국악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국의 대중음악계가 한국인들을 위한 음악을 못 만든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정서, 우리의 철학, 우리의 삶이 아니라 남의 정서, 남의 철학, 남의 삶을 배끼는 것이다. 우리 것이 있다면 그것도 좋다. 그런데 우리것이 없는데 베끼는 것만 있다면 그건 아니다. 

 

한류가 불어서 한국문화가 살아나나했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이젠 역풍이 분다. 일본문화물이 한국에서 인기를 얻는 것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시장적 종속이다. 일본시장에서 물건을 팔아야 돈이 되니까 영화를 만들 때부터 일본 시장을 염두에 두지 않을수 없다. 원작을 아예 일본에서 가져다 쓰는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 이렇게 되면 이건 우리 문화가 아니다. 우리의 정서가 들어갈 이유가 점점 줄어든다.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는 남이 원하는 것을 만든다. 

 

맺는 말

읽기 나름에 따라서 내가 복고풍으로 돌아가자라던가 옛 것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혹은 한국대중이 어리석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것만은 아니다. 나는 그보다 사회적 자유에 대해 말하고 싶다. 

 

대중에게 자유가 있을때 대중은 그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즐긴다. 자기를 지키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권위에 강요되지 않으면 사람은 대개 보수적으로 자기를 지키면서 변하지 자기를 잃어버리고 아무렇게나 변화하는 사람이 대다수가 될 수가 없다. 결국 우리가 자기를 잃는 이유는 외적인 권위가 그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외적 압력의 일부는 물론 한국사를 얼룩지게한 독재정권들이지만 나는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의 지식인, 대부분의 기득권 전부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믿어야 한국인이 좋게 된다고 믿고 어떤 사람은 미국처럼 되어야 한국이 잘살게 된다고 믿고 어떤 사람은 유럽을 믿고 어떤 사람은 돈을 믿으며 어떤 사람은 폐쇄적 민족주의를 믿는다. 권력과 지식에 있어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대중을 억압하고 자기들 맘대로 변화시키려고 한 결과 우리는 우리를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자유가 필요하다. 권위주의를 무너뜨리고 자기 속마음대로 말하면서 살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어리석은 대중은 엽기적이고 퇴폐적인 문화에 물들어버릴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오랜동안 억지로 휠체어에 태워져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을 갑자기 세우면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중은 그렇게 어리석지도 약하지도 않다. 자유를 억압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지키고 싶어할 뿐이다. 그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으며 사회가 점점 유령같아지고 있다. 

 

우리는 자유가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를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단순히 수출해서 먹고 사는 공장의 직원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삶이 있다. 우리가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를 지키고 우리의 욕구를 알아 변화해갈 방향을 알때 우리는 가장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주제별 글모음 > 한국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족모임이란 재미없는 것인가  (0) 2011.12.12
인사동, 대학로, 진정한 문화.  (0) 2010.08.02
우울한 한국방문  (0) 2010.01.22
음악과 사회의 진보  (0) 2009.12.05
선비라는 소프트웨어  (0) 2009.11.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