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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선비라는 소프트웨어

by 격암(강국진) 2009. 11. 15.

2009.11.15

머릿말

 

문화 산업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말은 나온지 오래다. 그러나 사람들은 문화의 근간이 무언가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문화상품의 성공을 위해 표면적인 기술적 문제에 집중하는 일이 많거나 그것은 홍보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산업으로서의 한국 문화의 경쟁력을 약화할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발전에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문화의 근간

 

문화의 근간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답하는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먹고 입고 어떤 가치판단을 하면서 어떤 규칙을 가지고 사는게 좋은가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문화고 문화상품은 그 답을 함축하고 있어야 가치가 있고 심지어 상업성도 있다. 

 

드라마나 영화나 소설을 보자. 인간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그래서 의미가 없다. 표면적으로 인형이나 로보트만 나오더라도 모든 이야기는 결국은 인간이 관련되어 있고 인간이 사는 모습에 어떤 의미를 가진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이야기는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우리는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대중매체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인간의 삶에 대한 잠재적인 갈등을 포함한다. 즉 개인의 삶을 택해야 하는가, 가족의 질서를 존중해야 하는가, 돈을 택할것인가 사랑을 택할것인가, 화려한 삶을 꿈꿔야 하는가,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삶을 추구해야 하는가하는 여러가지 선택적 상황에 답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갈등구조가 없어보이는 문화물들도 사실은 모두 생각해보면 어떤 가치가 그 가치에 상반되는 가치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거나 그 대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산속에서 아무 일없이 수행하는 스님의 일상을 보여주면 거기에는 갈등이 없는 것같지만 거기에는 관객과 이야기속의 스님과의 갈등이 있다. 즉 스님은 저렇게 사는데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이 던져진다.  

 

문화가 어떻게 사는가를 답하는 문제라고 한다면 그 답중에 쓸데없고 부실한 답은 편협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삶의 한가지 측면에만 몰두한다. 요리로 말하자면 만원가지고 저녁상을 차려야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를 묻는다고 하자. 우리는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으므로 비싼 갈비를 먹어보자고 하는 것은 의견일수 있지만 큰 값어치는 없다. 갈비를 사고나면 쌀살돈도 없을수 있다. 갈비를 사려면 아예 만원가지고는 부족할수 있다. 

 

그러니까 한국의 다른 문제는 생각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자연만 보호하자, 외국인노동자인권을 지키자,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라, 노동자이익을 보호하자라고 말하거나 대기업이 잘되야 행복해진다,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 삼천리 강산을 덮는 커다란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나라가 잘된다고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문화의 궁극적 상품

 

결국 보다 완전한 문화적 답안은 하나의 인간형이다. 여러가지 삶의 측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하나의 가상인간, 바람직한 인간이 문화의 궁극적인 모범답안의 형태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가지 선택의 순간에 처하고 가치를 판단해야 하는데 답을 모르는 상황에 처한다. 그럴때 이 가상의 인간형에게 질문을 던지면 답이 나온다. 그라면 이렇게 행동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훌룡한 작품은 하나의 종합적 인격을 창조해 낸다. 이 종합적 인격은 심지어 작가가 글이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말하지 않는 어떤 질문에도 답할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미국 사회가 만들어낸 인격중의 하나는 서부의 정의의 카우보이다. 그것은 지금 여러모로 계승되어 배트맨 씨리즈 물같은 것으로 모습만 바뀌어서 존재한다. 서부극에 익숙한 사람은 존웨인을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배트맨을 생각해 보라. 어떤 상황에 도달했을때 존웨인이라면 어떻게 할까. 배트맨이라면 어떻게 할까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 그러면 거기에는 답이 있다. 그 인격은 과거의 인물이라도 현재의 가치판단문제에도 문제없이 답을 내려준다. 그것이 문화적 인격의 유용성이다. 

 

문화컨텐츠는 우리에게 삶의 지침을 준다. 삶은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문화컨텐츠는 그때 우리에게 답을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에 열광하고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를 치유해주고 외로움을 없애주기 때문에. 장금이라면 이럴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고 드라마 대장금에 몰두한 사람은 생각한다. 거의 허구의 인물인 대장금에게 동지의식마저 느낄 수도 있다. 

 

일본이 만들어낸 인격에는 사무라이가 있다. 사무라이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만화에 등장하면서 다면적 인격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그 가상의 공간에 있는 사무라이는 일본 대중에게 답한다. 당신은 갈등의 순간에 있는가? 그렇다면 물어라, 사무라이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당신은 사무라이로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생각하고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부처님의 행동을 따라하며 유교적 전통을 믿는 사람은 공자나 맹자라면 어떻게 할것인가 생각하고 노장을 믿는 사람은 노자나 장자라면 어떻게 살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의 가상적 인간형을 제시하는 것은 문화의 궁극적 결과물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답을 주는 AI와 비슷하다. 

 

한국 문화의 문제

 

그런데 우리는 한국문화를 대표할 강력한 문화적 인격체를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도 한 때 그 것을 가지고 있었다. 유교적 전통속에서 그것은 바로 선비였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선비라는 가상적 인격체에게 물으면 답을 준다. 그것이 한국문화였다. 

 

그런데 그 선비는 발전적으로 계승되어 인격의 모형으로 남은게 아니라 처절히 상처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다. 거의 모든 전통에서 유교적인 것을 뽑아내고자 한다며 사실상 전통에서 무조건 벗어나는 것이 진보적인 것, 현명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같다. 이것은 조선패망과 일제시대의 결과이기도 하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것은 어떤 의미로 사무라이가 선비를 쳐죽인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들에게 선비는 비루하여 사무라이에게 죽었으니 너희들도 이제부터 사무라이로 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식민지 교육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선비는 부활하지 못했다. 선비의 부활이니 계승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과거로의 회귀라며 펄쩍 뛸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선비는 그 이름이 선비인 것이지 역사 그대로의 선비여서도 안되고 일 수도 없다. 카우보이도 사무라이도 역사 그대로의 인격체가 아니다. 심지어 예수나 부처나 공자도 끝임없이 재해석되는 것이다. 문화적 인격체는 새로운 시대에 맞춰 항상 진화하고 발전한다. 역사적 경험속에서 그 정보를 축적해서 더 뛰어난 인격체로 변화한다. 마치 더 많은 데이터를 가진 인공지능 프로그램처럼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문화에 비약은 없다. 전통의 발전적 계승만이 있을 뿐이다. 다른 사회, 다른 문명권에서 발전한 가상 인격체를 그대로 들여오는 것은 언뜻 보면 비약같지만 그 자체로는 꼭 발전이라고 할 수 없다. 가치판단들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여러개의 가상 인격체를 동시에 수용한다면 그 가상 인격체들끼리 충돌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역사적 경험과 외국에서 온 그 가상 인격체가 충돌한다. 결국 그 가상 인격체는 역사적 경험이라는 데이터가 축적되어져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외국의 경험이 가진 문제가 있어서 그걸 수습할 필요가 있다. 그걸 해낼 수 있는 개인은 거의 없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성인들로 부르며 계승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능력과 운을 가졌을까? 결국 우리의 문화적 인격체의 원형을 그냥 버리고 남의 것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껍데기만 한국 사람일뿐 미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 된다. 아니 제대로된 미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되지 못하니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한국문화의 계승에 가치를 둘까? 당연히 두지 않는다. 사무라이를 머리에 집어넣은 인간은 천황을 모시는 일에는 황송해 하고 우리나라 고궁자리를 밀어버리는 일에는 별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으며 일본식 문화상품을 들여와 일본문화 테마파크를 만드는 일이나 미국의 라스베가스나 디즈니랜드를 한국에 만드는 일에는 보람을 느끼지만 우리 고향산천을 홰손하고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영구히 파괴하는 것은 선을 위한 악의 제거라고 생각한다. 선비의 역사는 무가치하거나 심지어 제거해야 할 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맺는말

 

이 종합적 인격체의 부재는 한국의 문화물들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든다. 그 문화물속의 인간들은 삶의 한가지 면에만 집중한 편협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미국의 아동도서에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종종 나온다. 한국의 아동도서도 그렇다. 그러나 그 안의 인물들의 태도는 극명하게 다른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독립적이고 밝으며 돈이 없어도 당당하다. 돈은 중요한 것이지만 행복은 꼭 돈이 다가 아니라는 메세지를 준다. 하지만 한국책에 나오는 가난한 아이들은 당당하지 못하거나 삐뚤어져 있거나 유약한 천사같은 아이거나 고통에 젖어서 산다. 그게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의 메세지이다. 행복이 꼭 돈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돈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헛소리라고 여겨지는 것같다. 

 

우리의 전통은 꼭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선비가 달밤에 달구경을 하면서 술을 한잔하는 광경을 떠올려보라. 집앞에 심은 나무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국화를 구경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동네의 동산에 올라 동내풍경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술한잔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때까지 마시지 않고 안주가 적다고 불평도 하지 않는다. 왠지 그럴것 같지 않은가? 이 선비는 마구 폭식하고 다이어트 하느라 고생할까? 동네의 터를 몽땅 헐어서 커다란 고층아파트로 동네를 다 채우자고 할까? 안빈낙도의 삶이 선비가 보여주는 삶이었다. 돈이 꼭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는 돈이 전부가 되었을까? 

 

자연보호를 하자고 한다. 백마디 천마디 사실의 나열은 사실 그다지 도움이 안된다. 가치판단이 안되기 때문이다.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사람들에게 납득될 때만 자연은 아름답게 보존될수 있다. 내가 쓴 글을 보면 사람이 마치 컴퓨터에 윈도우 깔듯히 선비라는 소프트웨어를 깔아야 움직이는 기계인것처럼 쓴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느정도까지 이 비유는 옳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진정 주체적으로 살 수가 없다. 예수님을 탑재하건 공자님을 탑재하건 부처님이건 사무라이건 카우보이건 선비건 머리속에 소프트웨어를 깔아야 움직인다. 그렇지 않은 인간이 사실은 가장 기계적이고 파괴적인 인간이며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한국인들은 이미 선비라는 프로그램이 대부분 깔려있다. 한국인 부모를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과 문화속에는 선비가 살아있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는 지금 문화적 혼란속에 있다. 우리는 선비를 발전적으로 계승할수 밖에 없다. 그걸 꼭 선비라고 부를 필요도 없고, 거기에 꼭 유교적 색깔을 입힐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그 안에 선비의 역사가 남긴 데이터가 있다는 사실은 바뀔 수 없다. 이것을 잊을 때 우리는 매우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파탄이 생긴다. 우리의 문화가 공허해 진다면 이런 것을 잊고 종합적인 인격을 추구하는 대신 한 측면만을 파고 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상품이 별로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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