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영주에 사는 김씨는 포장마차를 합니다. 나이가 들어 포장마차가 힘에 겨운데다가 취객이며 깡패들이며 게다가 어린애들까지 그를 못살게 하는 하루 하루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들에게 인간적 멸시를 당하면서도 그가 살아갈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는 것은 멀리 미국으로 떠나 공부하는 큰아들 때문입니다. 그는 거의 버는 돈의 전부를 큰아들에게 송금하면서도 남들처럼 큰 뒷바라지를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자식의 성공만을 기원합니다. 반면 그가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아들은 그렇게 대단한 인재가 되지 못하여 장학금이며 보조금을 받지 못해 학업을 중단해야 할 처지로 몰립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된 김씨는 어느 추운 겨울날 자식을 수취인으로 만들어둔 생명보험을 생각합니다. 밤길에 차에라도 치이면 보험금이라도 남겨야 겠다는 생각에 들어둔 것입니다. 그리고 김씨는 아주 위험한 빙판길 언덕으로 포장마차를 몰고 갑니다. 거기라면 누구에게 의심받지 않고 사고로 죽은 것이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씨는 축대에서 떨어지면서도 아들의 얼굴을 생각합니다. 그는 너무나 기쁩니다. 그의 얼굴에 큰 미소가 생깁니다."
수직적 인간관계와 한국
한국 드라마에서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특징은 수직적 인간관계입니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 시어머니와 며느리, 상사와 부하, 선배와 후배라는 형식으로 수없이 등장합니다. 한국 드라마를 관통하는 특징은 모든 갈등구조의 시작이 이런 수직적 관계와 연관되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허준이나 대장금 같은 사극을 보면 그 이야기의 상당부분이 스승과 제자, 부모님과 자식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 할애됩니다. 한국적 이야기구조에서 상하간의 관계란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인 동시에 좌절을 겪게 하는 장벽입니다. 그건 현대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간단히 말해 한국 사람을 울리고 싶으면 헌신적인 부모님 이야기나 스승의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이는 우리의 의식안에 사회의 수직적 구조가 세상을 지탱해가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는 생각이 굳건히 박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편이 남편같고 부모가 부모같고 스승이 스승같고 나라의 정치가들은 정치가 같아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살기 힘들이유는 사람들이 각자가 자신의 위치를 알고 해야할 의무를 다하며 서로에 대해 적절한 예를 갖추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죠? 물론 이것은 공자님의 메세지가 수백년간 우리안에서 공명하여 남긴 신화입니다. 여러번 말했지만 수많은 철학은 세상을 보는 방식이며 그 방식은 결국 한가지 공통된 형식을 가지는 것같습니다. 그들은 한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이야기는 우리는 누구인가에서 시작하여 왜 이세상은 지금 이모양인가로 가고 결말은 우리가 지금 뭘해야 하는가로 끝나는 것입니다.
합리주의의 서양과 유교적 한국
서양의 근대사상은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에서 시작하여 우리가 살기 힘든 것은 사람들과 사회가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운영되기 때문이다를 지나 세계에 이성을 적용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 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공자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는 정해진 규칙이 있어 조화롭게 살수 있는 곳이다에서 시작하여 그러나 그 규칙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예를 잊어 세상은 혼란스럽게 되었다를 지나 예로 복귀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할것같으면 우리는 행복한 미래를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인간관계란 매우 소중한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수직적 인간관계가 매우 소중합니다. 그것들이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죠. 반면에 수평적 인간관계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건 수직적 인간관계안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부산물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 아래에 형제 자매가 있으며 고을의 원님아래에 마을 주민이 있고 스승의 아래에 동문수학한 제자들이 있습니다. 전체구조를 지탱하는 것은 수직관계입니다.
서양사회는 인간관계가 중요한게 아니고 인간을 떠나 존재하는 원칙과 원리와 법률이 중요합니다. 즉 법앞에 평등하며 그래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원리나 법의 보편타당성이 사회를 지탱하는 구조의 기본틀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 결론은 누가 내렸나와 상관없이 옳은 것이며 따라서 사회는 인간과 인간이 얽힌 그물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입주해서 들어갈 이성으로 건축한 아파트같은 것입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서양사회의 문제점은 인간이 망각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성은 인간의 행위나 특징이라는 하위 개념이 아니라 인간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어 겉은 번지르르 하나 외로움에 별로 행복하지 않은 사회가 되기 쉽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것은 이성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더라도 이성이 엄숙하게 그건 착각이라고 말하게 되기 쉽다는 것이죠.
인간이성이란 결코 무한한 능력을 가진것이 아니라서 이성적 판단이 항상 옳기 어려워도 이성에 매달리게 되면 그결과 사회전체적으로는 비이성적인 결과가 나올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한히 법정싸움에 매달리고 그래서 법은 예외적인 상황을 다루기 위해 끝없이 복잡해지고 결국 너무 복잡해진 시스템때문에 법이 무용지물이 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권위주의로 빠져들어가기 쉽다는 것이죠. 일단 선후배로 만나거나 스승과 제자사이로 만나면 그 관계가 고착화되고 현실과는 맞지 않는 행위가 용납되기 쉬워 집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직함이나 경력, 나이를 최대한 부풀려 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고 합니다. 애초에 가족의 예법을 확대하여 나라의 예법을 만든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그 인구가 작고 세상이 천천히 변하며 세상이 복잡하지 않을때에만 가능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너무 복잡하고 인구는 엄청나기 때문에 어떤 정해진 구조를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 됩니다. 대학의 선배가 직장에서 후배가 될수 있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고정되어 있다기 보다는 주제에 따라 뒤집어 지기 쉽습니다. 사회가 투명하고 변하지 않는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현실과 원칙간의 불화는 계속되어 집니다. 세상이 항상 빽이며 부정부패며 하는 소리로 시끄럽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서양의 문명이 세계를 지배하는시대에 한국의 문화는 비하되기 쉽습니다.
일본의 경우
여기서 일본이란 사회는 어떠한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꽤 재미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흔히 비민주적이고 수직적 사회가 일본사회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일본에 대한 저의 인상은 일본은 일종의 칸막이적 평등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어떤 문화적 계층적 분류에 따라 하나의 칸막이가 존재하고 이안에서 사람들은 매우 평등합니다. 어떤때는 지나치게 평등해서 개인의 자율이나 개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 입니다. 그러나 칸막이와 칸막이 간의 차이는 엄청나서 전체적으로 보면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 그런 구조란 느낌입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일본의 인구가 많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겠지만 일본에서 사람들의 다양성은 훨씬 더 큽니다. 괴상한 문화를 즐기고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 대해 보통의 일본사람들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은 하나의 칸막이만 있고 그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서로 개성을 존중하지만 그래도 전체가 똑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일본은 여러개의 칸이 있는 겁니다. 다른 칸의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한 짓을 하건 사람들은 괴로워하거나 충격받지 않습니다.
사회전체가 동일 원리를 추구하는 서양과 평등은 깨어지지만 칸막이안에서 평등을 추구하는 일본이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것은 서양식 사고방식과 동양의 사회구조를 수용하려고 한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 일것입니다.
맺는 말
이야기들은 결코 하나가 다른 하나의 유일한 대안이 아닙니다. 합리주의의 반대가 유교고 유교의 반대가 합리주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때 고려해야 하는 것은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출발점없이 목표로가는 길을 찾을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규모와 환경을 생각해 봤을때 합리주의적 태도의 도입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즉 나이와 재산, 성별과 학식, 출신지를 떠나 항상 공평하게 적용되는 원칙을 굳건히 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식, 서양식의 무차별적 이성제일주의, 평등주의의 도입은 되지도 않을뿐더러 무수한 상처만 남길것이며 무었보다 미국이나 유럽의 삶이 반드시 그렇게 행복하다고 말할수도 없습니다.
저는 국가적 규모의 원칙과 가족과 같은 소규모적인 조직의 원리가 서로 다르게 존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즉 국가적 규모로는 합리주의를 실천하고 반대로 가족과 작은 지역 공동체수준에서는 관계의 중요성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재건하고 고향을 재건하여 사람살곳을 만들되 국가적으로는 평등성이 강조되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시대의 과제입니다.
여담입니다만 물리학에서 비슷한 변화가 일어난 예가 있습니다. 바로 고전역학이 양자역학으로 대체되었을때의 일입니다. 이둘은 그저 약간 부정확한 이론이 보다 정확한 이론으로 바뀌는 것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엄격한 인과론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을 묘사하고 또하나는 엄격한 인과론보다는 확율적 인과관계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공을 어떤 속력과 방향으로 던지면 고전역학에서는 인과적으로 어느 쪽에 가서 부딛히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결과는 항상 확율적인것입니다.
양자역학에는 플랑크 상수라는 상수가 존재합니다. 어떤 수준에서 고전역학이 유효한가 아니면 양자역학적 묘사를 해야할것인가를 결정하는 상수입니다. 예를 들어 고전 역학에서는 운동량과 위치를 모두 정확히 잴수 있다고 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원리에 따라 플랑크 상수가 주는 정도의 불확정성이하로는 내려갈수 없다고 합니다.
사회구조의 양자론이 존재한다면 거기서는 이야기가 아마도 이렇게 흘러갈것입니다. 인간이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관계상수 그러니까 57명보다 매우 클때와 작을때 전혀 다른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인간의 두뇌의 정보처리방식이 만들어 내는 특징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행복감이라면 우리는 이 상수에 따라 서로 다른 태도를 지닐때 행복해 질수 있다. 이 사회구조의 양자론은 다음에 기회있으면 써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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