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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로 폴리틱스 : neuropolitics

by 격암(강국진) 2008. 8. 15.

세상에 뉴로 폴리틱스라는 단어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같은 움직임은 지금 매우 맹렬히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글에서 거듭 말했던것처럼 고래로 인간사회는 인간이란 무었인가 라는 질문에 집중해 왔습니다. 이는 이질문이 현학적 질문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기본적 동력으로 매우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나 신화는 우주론과 인간론, 인간의 실수 그리고 우리가 해야할일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레슬리 스티븐스 인간의 본질에 관한 7가지 이론). 우주론과 인간론은 두개이되 실은 하나로 인간의 인식속에서 우주가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어떠하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누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보는가 노동가치를 빼앗기는 사회구조의 피해자로 보는가에 따라 인간의 행동양식에 대한 결론은 전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무었인가에 대한 논의는 과거 흔히 비과학적이고 교조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맹자는 사단을 근거로 인간은 선한존재라고 했는데 이는 관찰에 의거한 과학적 결론이라고 말해도 실은 매우 엉성한 논리구조임을 부인할수 없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무었인가라는 질문은 무수히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심리학적인 실험과 해부학적 실험, 유전적 실험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도대체 어떤 특성을 가지는가를 세밀하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연구의 결과는 매우 빠른 속도로 축적되고 있으며 여러가지 인기대중서적들에게서 거론되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추론과 예측능력에 대한 실험이 행해져 인간은 과연 합리적으로 추론하고 예측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실험합니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란 실은 포유류라는 동물의 특징이란 것을 밝힙니다. 인간이 욕구를 느끼고 어떤 방식으로 쾌락을 경험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행해집니다.

 

이런 인간에 대한 구체적 이해는 모여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기본적 지침을 제공하게 될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정치적 담론을 가르켜 뉴로 폴리틱스라고 부를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콤 그라드웰은 그의 티핑포인트에서 인간이 가지는 정보처리능력의 한계로 인해 우리는 어떤 제한을 가지게 됨을 지적합니다. 왜 전화번호는 20자리가 아니라 흔히 7자리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7-8개까지의 사물만 구분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아주 가깝게 지낼수 있는 사람의 수는 10-12명일까요. 그것이 인간의 두뇌가 가지는 능력의 한계이기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사물을 3개정도까지만 구분하거나 100개까지 구분할수 있었다면 인간사회는 전혀 다른 구성을가지게 되었으런지 모르는일입니다.

 

이런의미에서 보았을때 수명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가족이나 수십에서 백여명이 참여하는 이웃들의 모임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인간사회의 조직원리와 수만에서 수천만 수억이 참여하는 인간사회조직은 분명 전혀 달라야 할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식은 현실에서는 대부분 부정됩니다. 서양에서는 국가적 평등원리에서 나아가 가족내부의 평등을 주장하여 가족을 피폐하게 만들고 동양에서는 가족적 운영원리를 국가로 적용하여 불합리한 권위와 부패를 조장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사랑이 소중한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과학적 검증을 통한 인간의 유전적 특징으로 이해할때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됩니다. 오직 인간만이 그렇게 엄청나게 긴 유아기를 가지며 그걸 위해 인간은 특별한 부모자식간의 유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모자식간의 사랑과 신뢰는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되어져 있는 특별한 것이므로 인간은 무었인가하는 질문에 그것을 포함시켜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지속적 성취감을 느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성취감은 양에 별로 민감하지 않다는 실험결과가 있습니다. 열번에 걸쳐 뭔가를 시도하여 단한번 성공하여 1억을 번사람이나 매번 천만원씩을 번사람은 결과적으로 같은 정도의 평균소득을 올린셈이지만 인간이 느끼는 행복감의 총량은 결코 같다고 볼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는 사회적 보험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이득을 챙기는 환경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작업의욕은 현저히 떨어져 결국은 전체의 경쟁력이 약화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희망도 필요합니다. 모든일이 잘될거라는 지속적 희망의 메세지가 전달되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연로가 떨어진 자동차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현대사회에서 급증하는 자살율은 아마도 이 희망의 문제와 관련되어져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회개혁과 발전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즉 인간은 이러저러한 특성을 가지므로 그것을 알고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다리가 두개뿐이므로 다리가 세개인 바지에 다리를 넣으려고하면 뭔가 잘 맞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를 구성하려할때 이같은 것을 알고 해야만 인간에게 맞는 사회를 건설할수 있게될것입니다.

 

미래의 이데올로기도 역시 과거의 이데올로기나 신화와 같은 문법을 따를것입니다. 첫번째로 우주는 무었이고 인간은 무었인가, 두번째로 인간의 실수는 무었인가 마지막은 우리가 해야할일입니다. 뉴로 폴리틱스가 발전하여 우리가 인간에 대해 보다 세밀한 묘사를 할때 인간사회의 대부분의 고통은 실은 우리가 인간을 오해해서 생긴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것입니다. 결론은 우리는 그이해에 따라 우리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리세개달린 바지가 아니라 인간에게 맞춰진 바지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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