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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교육에 대하여

교육의 시작과 끝은 정체성

by 격암(강국진) 2009. 6. 1.

09.6.1

머릿말

누구나 아이를 훌룡하게 키우고 싶어한다. 아이가 좋은 성적을 내고 좋은 대학을 가고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한국 사람의 교육에는 크게 빠져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마치 술통은 줄줄 새고 크기가 작은데 좋은 술만 가득 담으려고 하는 모습이다. 

 

물론 영어문법을 익히고 수학문제풀이를 배우고 피아노 연주 기술을 배우는 것도 모두 교육이다. 그러나 이것이상으로 중요한 것, 교육의 몸통이며 시작과 끝인 것은 정체성이다. 즉 아이에게 너는 누구인가를 가르치고 느끼게 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미흡할 때 아이는 가지고 있는 재능도 꽃피우지 못할 것이며 아무런 목표의식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본질적인 문제도 있다. 아이가 그리고 부모가 정체성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과연 훌룡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뭔가 하는 것 자체가 희미해 지거나 매우 원초적인 것이 되고 만다. 좋은 교육이 될 리가 없다. 

 

너무 바쁜 아이들

한국의 아이들은 너무 바쁘다. 아직 어린 초등학생들도 여러가지 학원을 전전하느라 바쁘고 중학생쯤이면 아침에 눈뜰 때부터 밤에 잘잘 때까지 학교와 학원과 독서실을 다니느라 전혀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바쁜 시간동안 아이들은 부지런히 여러가지 지식과 기술을 배운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 모습이 아이를 열심히 노예로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침부터 밤까지 인형 눈붙이기를 열심히 익히느라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시간이 없는 아이를 본다면 우리는 그 아이가 정상적인 교육을 받는 게 아니라 인형산업의 노예가 되어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요즘 학생들이 받는 교육이란게 정말 그것과 다를까? 

 

이 글을 일는 사람들중 회사에 다니거나 대학원에서 공부한 사람들의 경우 한번 생각해 보라. 상사나 선배, 교수와의 잦은 접촉을 통해 자신의 일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관련되는지 뭘 공부하면 나중에 어떻게 쓰게 되는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메뉴얼 펴고 그대로 따라하거나 책쌓아놓고 논문쌓아놓고 그것만 보는 사람이 나중에 성과가 좋던가? 그냥 다른 사람 수족으로 바쁘게 살다가 실패하지 않던가? 그런데 문제푸는 기술을 열심히 배우느라 다른 걸 할 시간이 없는 아이, 특히 어른들을 만날 시간이 없는 아이들을 보면서 왜 어른들은 그 점을 깨닫지 못하는 걸까. 

 

아이들은 어른들을 만나서 답을 배울 필요가 있다. 누군가와 만날 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뭐는 흥분해서 집중해야 할 일이고 뭐는 무시해도 좋은 일인지, 아이들은 세상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많은 부모들은 종종 까먹는다. 어른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을 아이들은 모른다. 그 당연한 것을 배우지 못하면 아이들은 제대로 크지 못한다. 그 당연한 것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믿을 만한 어른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은 부모다. 

 

심지어는 선생님도 압도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부모를 전혀 대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수십명의 학생들을 상대하는 선생님에게 훌룡한 학생이란 무엇일까. 입다물고 조용히 있는 학생, 선생님이 뭐라고 명령하면 무조건 복종하는 학생이기 쉽상이다. 실은 많은 경우 학생이 바보일수록 선생님은 편하다. 선생님이 뭘 시키면 무조건 그것에 복종하는 학생이 편하고 성과도 난다. 선생님도 잘모르는 질문을 하거나 선생님의 허실을 꽤뚫어볼 정도로 똑똑하면 선생님은 피곤하다. 과연 아이는 뭘 배우는 것일까. 훌룡한 학생이 꼭 훌룡한 사회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이가 부모와 접촉이 없이 학생으로서만의 시간만 있다면 그 아이는 학생이 되는 교육밖에는 받지 못한다. 

 

정체성, 정체성

 

정체성 교육은 어떤 면에서는 저절로 이뤄지고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공부가 필요한 일이며 어떤 것들은 어른들이 신경을 조금만 쓰면 쉽게 해줄 수 있다. 어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를 믿는다.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은 그렇게 되도록 자연선택적으로 만들어진 생물이라고 주장한다. 아주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 인간인데 일일이 시험해보고 의심해서는 학습이 너무 늦다. 따라서 어린 시절에는 부모들이 말하는 것이 뭐든지 아이들은 그걸 믿는다. 나중에 커서 의식적으로 그게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아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다. 미신은 이렇게 번성한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부모를 보면서 세상일들의 가치를 학습한다. 부모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효도가 뭔지 배우는 것이고, 밥은 어떻게 먹는지, 화가 나면 어떻게 행동하는지, 뭐는 꼭해야 하고 뭐는 안해도 되는 것인지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저절로 배우는 정체성이고 문화다. 사람은 본래 이러저러하게 산다는 것을 배운다. 

 

조금만 신경써도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인간은 동물이며 대개 100년이 되지 않아 죽는다. 이건 너무 뻔한 것이고 아이들도 이런 지식은 대개 알고 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 의미를 좀 제대로 가르쳐 주고 강조해 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장례식에 가는 것은 아주 훌룡한 교육의 기회이다. 사람이 죽는다는게 어떤 건지 아이들은 느낄 필요가 있다. 사람이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어떤 것들은 길게 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고 어떤 것들은 더욱 중요해 지게 된다. 특히 부모가 언젠가 죽어서 혼자 서게 되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깨달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 아이들의 행동은 전혀 다를 수 있다. 

 

또한 인간은 동물이다. 그래서 식욕이나 성욕을 가지며 그런 유혹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몸이 만들어 내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다. 아이는 이런걸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는 그걸 친밀한 관계속에서 알게 된다. 그래서 그게 없는 아이들은 죄책감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물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교육은 보다 깊은 사고와 훈련을 요구한다. 그게 예술과 과학과 인문학을 배우는 이유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가지 않아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할 것은 많이 있다. 단순 지식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정체성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한국인의 정체성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세계보편주의를 주장하는 많은 지식인들은 이 같은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그게 큰 잘못이며 나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가치관은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통상적 예절에서 배우자를 만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사회적 행위등 삶의 여러 행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걸 최적화 시키는 것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의 도덕을 모두 이성적으로 따져서 받아들이고 살기는 어렵다. 우리는 일본인, 미국인, 프랑스인, 한국인의 삶을 조각조각붙여서 살 수 없다. 그건 오늘날 어느 정도 필연적인 일이지만 동시에 지나치면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건 가치관의 혼란속에서 스스로의 인생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부모의 자식들이며 상당부분의 것은 그냥 받아들인 채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인지 예를 들어 한국인은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인과 프랑스인은 다르다. 뭐가 다른지, 원인은 뭐고 그걸 차이로 인식해야 하는지 아니면 좋고 나쁜 것으로 인식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 전세계의 문화상품이 우리에게 밀려드는데 아이들은 뒤죽박죽의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기 쉬우며 특히 부모와의 시간이 짧아서 문화적으로 빈곤한 아이들은 더더욱 그렇다. 아이들을 학원으로만 내돌리며 공부하는 기계로 만든 부모들은 어느날 반항하는 아이들, 터무니 없는 일을 하는 아이를 보며 실망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에게 정체성 교육을 시키지 않고 일하는 노예 교육을 시킨것이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한국 사회의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가치관의 혼란이 심해서 아이들이 가치관적 진공상태에서 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이래로 내려온 전통의 윤리는 철저히 비판되고 무시되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외국국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윤리도덕은 고무줄이다. 어디가면 부모를 외국에 내다버리는 패륜아가 있는가 하면 어디가면 한해 선배라는 이유로 하느님처럼 높은 권위를 자랑한다. 남는 것은 돈이 최고고 힘센 놈이 약한 놈을 지배한다는 식의 동물의 법칙만 남는다. 

 

국가적 정체성이란 많은 나라에서 강조되고 가르쳐 진다. 미국의 아이들은 링컨을 배우고 일본의 아이들은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유태인들은 탈무드를 읽어주며 아이들을 키운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은 심각한 정체성 위기에 빠져있다. 심한 경우는 능력되면 누가 한국인 하냐 미국인 하지 라는 식으로 키우는 경우도 많다. 한국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 아이를 위해서도 그것은 불행한 교육이다. 그 아이는 결국 영원히 외국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인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은 마치 아이에게 너의 부모는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욕만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러면 아이는 정체성 혼동속에서 자기비하에 빠진다. 한국인인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맺는말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당연한 질문을 당연하게 던진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 친구와 이웃과 조국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외롭고 힘든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 답들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되어져 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런 질문을 회피하고 무시하고 아이들을 그저 문제푸는 기계로 만드는데 열심이다. 모른다고 말하거나 솔직하게 그런 문제에 같이 부딪혀주는게 아니라 비웃고 한가하다고 비판한다. 때로 간결한 답을 주기도 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돈이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좀 더 도덕적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런가. 돈만 있으면 행복한가? 그거만 있으면 아이는 제대로 연애해서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까? 좋은 친구를 사귀고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을까? 어른들은 그런 걸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그런것은 저절로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 결과 아이들은 탈선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 죽을 만큼 불행해 진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만큼 더 나빠진다. 아이들이 바쁜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배워야 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는 것은 문제다. 한국 교육은 너무 엉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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