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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교육에 대하여

상식의 교육, 상식을 깨는 교육

by 격암(강국진) 2009. 4. 2.

2009.4.2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우리 집은 서울 봉천동에서 화곡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래서 나는 같은 서울이지만 중학교는 봉천동에서 고등학교는 화곡동에서 다녔다. 봉천동과 화곡동의 학교는 너무 달랐다. 한 번은 내가 싸움을 벌일 뻔 한 일이 있다. 한 친구가 체육 시간에 고의로 내 신발을 계속해서 밟았던 것이다. 난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그 친구는 알았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계속했다. 봉천동 중학교의 상식대로라면 그런 경우에 참지 말아야 했다. 그건 사람 대접을 못 받는 겁쟁이라는 뜻이다. 중학교에서는 남자가 시비에 빠지면 주먹을 날리는 것이 상식이었다. 싸움에 자신이 있건 없건 일단 화를 낼 수는 있어야 했다.

 

나는 그 친구를 세게 밀쳐 넘어뜨렸다. 그리고 한판 붙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주변의 반응은 전혀 내 상식과 달랐다. 응당 그 친구는 일어나 나에게 덤벼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를 멍하니 올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변의 아이들은 마치 살인사건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조용해 졌다. 화곡동 고등학교의 기준으로는 그런 상황에서 폭력을 휘두르며 화를 낸다는 것은 상식을 크게 넘는 것이었다. 봉천동 중학교에서는 그런 경우엔 둥글게 원을 만들어주며 서로 잘 싸우라고 격려를 했다. 봉천동의 상식은 화곡동의 상식이 아니었다. 봉천동에서는 농담 한 마디에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주먹을 날리는 일이 일상이었다. 나는 상식이란 것도 사는 곳에 따라 크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봉천동의 학교는 매우 거칠었다. 반면에 화곡동의 학교는 굉장히 조용했다. 중학교 친구들은 일을 저지를 때 이렇게 하면 나중에 어떻게 될까 같은 것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저지르고 봤다. 그리고 그냥 어찌 되겠지 하는 식이다. 반면에 화곡동의 학생들은 정해진 규칙의 선을 넘지 않았다. 행동을 하기 전에 그 결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 행동이랄 것은 하는 법이 없었다. 그들의 일상은 남이 정해준 그대로였고 그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한 것은 거의 없었다.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중학교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중학교 때는 아직 난로에 석탄을 때서 난방을 했다. 그러나 여간해서는 땔감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땔감이 부족했고 이것 저것 가져다가 태우고는 했다. 그것이 선을 넘은 일도 있었다. 하루는 춥다고 청소시간에 교실문이며 책걸상을 조금씩 부셔서 난로에 불을 피운 적이 있다. 아이들이 교실 문을 부실 때 나중엔 어떡하지 같은 생각은 없었다. 문을 부시고 불을 쬐니 따뜻해 좋았지만 물론 이건 난감한 일이다. 결국은 하급생 교실에 몇 명이 가서 문을 훔쳐왔다. 다음날에 그 하급생 반은 아침부터 운동장을 돌았다. 교실문을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고등학교에서는 나는 3 년 동안 주먹 싸움도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친구들은 손가락을 움직여야 할 때도 선생님 허락을 받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봉천동의 학생들은 자기 주장이 강했고 학교 공부에 연연하지 않았다. 나는 중학교 때 상대성 이론에 대해 교실에서 떠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듣는 아이들은 관심이 많았다. 컴퓨터에 도사인 친구도 있었고 칼세이건의 코스모스 같은 책을 숫자까지 줄줄이 외워서 우주 이야기가 나오면 단연 박사였던 친구도 있었다. 그렇다고 중학교때 친구들이 학구파 친구들이었던 것도 아니다. 실은 학생들 대부분이 학교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수업시간에 몰래 야한 책을 보거나 트럼프를 하는 말썽꾸러기들이었다. 다만 재미있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교과서 이외의 일에 대해서는 도통 아는 것도 관심도 없었다. 입시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한편으론 허무한 것이었다. 그들 중 자기가 무슨 학과에 가고 싶은지 아는 사람은 거의, 정말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뭘하러 가는지 대학을 졸업한다면 뭘하고 싶은지에 대해 꿈을 가진 친구조차 고등학교에는 별로 없었다. 그저 선생님이 그 성적에 이 대학 이 학과가 좋다고 말하면 그리로 가는 것이다. 대학에 가고 싶은 이유는 무슨 공부를 하거나 나중에 어떤 일에 종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냥 가는 것이다. 그게 엘리트 코스니까. 그게 다음단계니까. 봉천동의 친구들은 자신의 욕구에 지나치게 솔직했다. 반면에 고등학교 친구들은 자신의 욕구란 걸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자신의 욕구 대신 부모의 욕구, 선생님의 욕구가 그 자리에 있었다. 스스로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몰랐다.

 

왜 이런 것일까? 하루는 부모님 직업 조사를 학교에서 거수로 했다. 그리고 나는 큰 차이를 발견했다. 거칠었던 봉천동 중학교에서 대부분의 부모는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회사원은 적었다. 온화했던 화곡동 학교의 경우 압도적 다수의 학생이 회사원이나 공무원 부모님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가 자영업자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의 아이들은 자영업자처럼 행동했다. 부모가 공무원이거나 대기업 사원인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것처럼 행동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그에 적응하여 행동하게 된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은 누구에게 고용을 당한 사람이 아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이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규칙을 지키는 게 아니고 결과를 내는 것이다. 그는 규칙을 따르는 사람이기 전에 규칙을 만드는 사람이다. 사장은 나는 규칙을 잘 따랐고 잘못한 게 없다는 것으론 충분치 않다. 성과가 있어야 한다.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을 직접 봐야 한다.  

 

그러나 커다란 조직에 고용된 사람은 다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규칙을 지키고 협동하고 주어진 자신의 임무를 해내는 것이다. 어차피 커다란 조직에서는 자신이 하는 일이 최종결과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알기 힘들다. 그러니 자신의 일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도 알기 어렵다. 그들은 전체적인 판단을 내릴 정도로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판단을 내리는 일은 그들의 일이 아니다. 조직이 망해가는 것 같아도 그저 자신의 몫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두가 중구난방으로 움직인다면 조직은 더더욱 빨리 망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속한 조직내부에 정신을 집중시킨다. 다른 사람과 협동하고 조직내부의 정보에 민감한 것이 중요하다. 바깥세상은 2차적인 문제다. 내 생각은 2차적인 문제다. 

 

문화적 혼동이란 종종 자기 비하 같은 나쁜 결과를 만들어 내는 법이다. 중학교 때 나는 내가 너무 남자답지 못한 것을 걱정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나는 내가 너무 거친 사람인 것을 걱정했다. 그리고 재빨리 나 자신을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켰다. 이것은 결국 주관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주변 사람을 그저 따라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정도가 남자다움을 지키는 선이고 이 정도가 절대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 매우 나쁜 짓 수준이다라는 것을 주변 사람의 반응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 몇 가지 사실을 다시 환기시켜 주는 것 같다. 첫째, 아이는 결국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상식을 배운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에게 내 직업이 이러저러해서 나는 이렇게 행동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의 특수한 행동방식은 아이의 보편적 상식이 된다. 아이에게 부모란 절대적인 사람이고 아주 어렸을 때는 어른 사회를 배우기 위한 유일한 창구다. 아이들이 자신이 애착을 가진 어른들과 어떻게 만나고 시간을 보내는 가 하는 것이 아이들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알고 세상에 던져진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특수성을 깨달아 자신에 대한 생각을 일찍 고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평생 고치지 못하기도 한다.

 

둘째로 나 자신에 대해 혹은 주변에 대해 쉽사리 도덕적 판단을 내렸던 것은 잘못이었다. 어떤 문화적 차이를 발견했을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착오는 한쪽의 문화를 당연시하고 절대시하여 다른 쪽은 도덕적 혹은 유전적 열등함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다. 왜 어떤 아이들은 규칙을 잘 안 지키는가? 그것은 그들이 그저 나쁜 아이들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왜 어떤 아이들은 교과서 이외에 관심이 없는가. 그것은 그저 그들이 본래 지루한 성격을 타고 났으며 멍청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주변을 무시하는 건방진 태도를 가지게 한다.

 

셋째로, 문화적 특성들은 서로 무관한 것들이 아니라 서로간에 인과적으로 얽혀있는 것들이라 장점도 단점도 같은 원인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문화에는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구조가 있다. 자영업자들이 자영업자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럴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큰 조직에 속한 회사원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그럴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각자의 상식이나 가정 문화에는 나름의 기본적 이유가 있어서 그런 행동 패턴을 만든다. 그런데도 표면적인 차이만 살펴서 둘을 조합하려고 하면 내부적으로 서로 모순을 발생시킨다. 규칙을 엄하게 생각하는 것과 성과중심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방식을 조화시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만약 보다 심층적인 이해가 없이 의식적으로 표면적인 것들만 바꾸려고 들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기 쉽다. 결국 주관 없이 주변 사람들을 따라 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기 내부에서 자기 행동에 대한 확신이 없으므로 차라리 어느 한쪽의 문화를 확고히 믿는 것보다도 못하다. 자신감 없고 뼈대가 없는 것 같은 인간이 되고 만다. 옳다 그르다의 기준이 내 느낌이 아니라 주변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내가 비판받거나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부분을 고치려고 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친구들이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지 않은 것을 답답해하면서도 규칙을 엄중하게 생각하는 태도를 배우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혼란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아이들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나의 부모님이 아니고 학교가 회사나 가게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타인과는 다른 자기를 깨달아야 하고 무엇이 일반적인 것이고 무엇이 특수한 상황에 적응한 결과 나온 것인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결국 교육에 있어서 내가 누군지 즉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배운다는 것이란 그 시작이자 몸통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방에서 좋다고 생각되는 것만 배워다가 조립해서 하나의 인간을 만들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는 일관성에 문제가 생기므로 자기비하나 불행한 느낌에 빠질 뿐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자식들이다. 아이들의 혼란은 부모들의 책임이다. 아이도 부모도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가, 자신이 누군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문화의 차이, 자기 정체성의 차이는 여러 단계에서 일어난다. 한 나라 안에서도 가족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고 직업과 소득 수준에 따라 다르며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문화권과 문화권 사이에서 다르다. 나는 내가 고등학교 때 겪은 일과 비슷한 일은 사방에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내가 저지른 실수를 사람들도 역시 저지른다.

 

미국의 거리에서 만난 한 나이 지긋한 재미교포 노인은 한국에 대해 매우 비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 따위는 빨리 모두 잊고 그저 미국을 따라해야 한다는 소식을 피력했다. 아마 자식을 키울 때 최대한 미국사람을 따라하라고 말했을 것 같다. 유태인이라던가 미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을 보면서 우리나라와의 차이를 느끼고 이를 쉽사리 도덕적이나 유전적으로 판단해 민족적 자학을 하는 사람도 있고 지나친 민족적 자긍심으로 다른 나라 사람을 깔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 가족은 지난 10년 동안 세 개의 나라에서 각각 몇 년간씩 살았다. 그러다 보니 분명히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이는 어떤 특정한 국가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부모를 두고 그 문화 안에서 자라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아이는 한국인 부부를 부모로 두었다. 그것은 기억해 둘만한 중요한 일이다.

 

사실 알래스카나 아프리카나 인도에서 태어난 아이가 혹은 뉴욕이나 홍콩에서 태어난 아이가 어떤 아이가 되는가에 그 나라, 그 부족, 그 지역의 특색이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민족이나 부족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지극히 자명한 이 사실이 우리의 아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종종 잊혀지고 만다.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말할때도 교과서나 대입시험제도나 학교 평준화 같은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고 교육의 내용이라기 보다는 형식에 해당하는 문화의 비핵심적 부분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말해진다.

 

이스라엘이나 미국이나 일본의 아이들과 비교하면 우리의 아이들은 어떤 사회에서 크고 있는 것일까. 한국의 어른들은 무엇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 이전에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내가 어떤 세상에서 컷는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과연 합리적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혼란에서 자유로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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