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4.2
큰 딸인 예나를 한국에 있는 여름캠프에 보낸 적이 있다. 돌아와서 한국에 가니까 뭐가 다르더냐고 했더니 그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언니들은 나이를 엄격히 따져서 놀더라는 것이다. 즉 나이따지고 위아래 따져서 패거리 구분을 하는 것이 한국 어린이 캠프에서 느꼈던 외국과의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 하긴 현대의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아예 나이따져서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 관습자체가 없다. 서로 이름을 부를 뿐이다. 나이를 크게 인식하지 않는다. 만나면 먼저 나이부터 따지는 한국과는 풍토가 다르다. 내게는 예나의 대답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한국은 권위주의와 차별 때문에 교육을 망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누가 이 권위주의와 차별을 유지하는가 우리 자신, 한국인들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교육은 고의로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층층이 차별이 있는 곳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는 가를 생각해 보기위해 여기 회사가 하나 있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이 고참사원이고 신입사원에게 교육을 시켜서 부하직원으로 써먹어야 한다. 당신은 부하직원에게 책을 복사하는 것을 시키고 그렇게 복사된 것을 당신이 제본한다고 하자. 부하직원에게 복사를 시켰더니 기가막히게 잘 한다. 참으로 도움이 된다. 그런데 만약 그 부하직원이 제본까지 잘 한다면 당신은 기뻐해야 할까? 천만에. 자칫하면 당신의 존재 의미 자체가 없어진다. 당신은 당신이 제본을 그만두고 그 위의 단계인 판매라던가 인사같은 것을 할 때까지, 그 부하직원의 능력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는 주요한 방법은 그 부하직원의 시야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하직원에게 도대체 왜 복사를 하는 지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리고 제본을 어떻게 하는 지 따위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어쩌면 일부러 틀린 정보를 줘서 세상에 대한 어리석은 견해를 가지게 만들런지도 모른다. 그쪽이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그 부하직원의 약점을 잡고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네가 나한테 잘못보이면 인생 매장당하는 수가 있다고 협박도 해야 할지 모른다. 추월은 용서할 수 없으며, 부하직원의 능력은 오직 복사라는 제한된 공간에서만 늘어나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회사에서는 전체 사원교육에 비용을 더 들인다고 해도, 더 뛰어난 인재를 신입사원으로 뽑는다고 해도 전체적 능력향상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서로 서로 견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보는 부장은 부장사이에서만 말단은 말단 사이에서만 흐르게 된다. 뛰어난 경력사원을 뽑아서 들여와도 마찬가지고 성과를 내는 대로 월급을 준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층층히 계급을 만들어 견제를 하게 되는 비민주적인 구조다. 애초에 이런 시스템 아래서는 생각이란걸 안하게 되고 자기 분수 지키고 윗사람 의중을 잘 살피는 능력이 최고로 가치있는 능력이 된다.
한국은 이런 층층의 구조를 지키는 권위주의가 만연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무엇보다 전에 말한 바대로 우리의 언어생활과 호칭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이미 이런 층상구조를 탈피하려고 노력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인간관계전반의 문화가 바뀌지 않고서는 이 문제는 그대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돌고 돌아 결국 교육에 관한 상식과 태도에 있어서 큰 차이를 만들게 된다.
소위 선진국의 학생과 선진국의 교육이란 건 한국과 뭐가 다른 것일까. 선진국의 학부교육과 한국의 학부교육을 비교했을 때 가장 차이나는 것은 기술적인 강의 수준이 아니다. 이는 내가 일찌기 대학시절 영국에서 교환학생을 하면서 느낀 점이다. 학부 때 전공과목 공부에서 문제를 푸는 건 어떻게 보면 한국 학생이 더 잘한다. 즉 기술적인 교육은 한국도 선진국 못지 않다. 차이가 나는 것은 학생의 태도와 넓은 시야를 주는 교육이 안되는 것인데 사실은 대학교육에서는 이 후자가 압도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선진국의 학부에서는 학생들이 최첨단 연구현실에 대해 더 일찍 소개받고 관심을 가진다. 교수들이 로보트를 연구하는 지, 우주론을 연구하는 지, 바다를 연구하는 지, 그런걸 왜 하는지 어린 나이의 학생들에게 소개한다. 물론 학생들은 그 기술적 세부사항을 잘 모르지만 지금 무슨 연구들이 현실세상에 일어나는가를 일찍부터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선진국의 교수들이란 대개 이런일의 중요성을 보다 강력하게 인식하고 기술적인 문제를 제치고 문제를 흥미있고 쉽게 설명하는데 더 능숙하다. 말하자면 선진국의 학생들은 처음부터 사업가로 길러지고 한국의 학생들은 처음부터 컨베이어 벨트 위의 무지한 직공으로 전문화 되어 길러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선진국의 학생들이 자동차 산업의 중요성과 전망을 배울 때 이쪽은 나중에 그게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르는채 브레이크의 제작과 조정기술에 대해 배우는 식이다. 선진국의 교육이란 철학과 비전과 넓은 시야를 강조하는 것이다. 기술적인 것은 흥미가 강하면 어떻게든 배울 수 있기 마련이다.
차이는 물론 교수에게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생도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나는 영국에서 대학교 입학을 앞둔 한 고등학생을 만났다. 그와의 만남이 나에게 신선했던 것은 사학과에 합격한 그 학생이 역사를 공부하겠다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는 상식적인 상황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 학과에 들어가는지 확실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학생은 아마도 여가시간에도 역사에 대한 책을 취미로 읽을 것이다. 그게 좋아서 대학에 온 학생이니까. 대학에 가면 뭘하고 싶냐고 하면 미팅이나 여행이나 넓은 독서따위를 말하는 사람들과는 너무 달랐다.
물론 영국이나 미국에도 대학에 들어가면 놀겠다고 하는 학생은 얼마든지 있다. 한국에도 이렇게 열의에 가득찬 학생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내 느낌으로는 좀 차이가 있다. 한국학생들은 항상 정해진 교과서를 순서대로 공부하는데 익숙하다. 자신이 관심있어 하는 것을 파고 드는 것이 아니라 1학년 공부 다하면 2학년 것을 하고 그 다음엔 3학년 것을 한다는 식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항상 사회전반에 세상은 층층의 구조가 있고 너는 1학년때는 이걸하고 2학년때는 저걸한다는 식의 인식이 강하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어릴때부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순서대로 내 나이와 위치에 맞게 정해진 것만 공부하는데 익숙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기 보다는 내 의무를 다한다는 느낌이다. 그 결과 대학생이건 교수건 한국에서는 과학을 전공한다는 사람들이 과학에 대한 잡담을 하지 않고 공학을 전공한다는 사람들이 공학에 대한 잡담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말 그들은 자신이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일까.
이런 차이는 선진국의 학생들이 자기 연구를 언제 시작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선진국 학생들은 뛰어난 학생들의 경우 상당히 일찍 연구를 시작하고 연구가 본격화된다. 반면에 한국의 학생들은 이것이 매우 늦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군대도 가지 않는 선진국 학생들은 20대 말 전에 상당한 연구경력을 쌓게되는 반면 한국의 학생들은 종종 자기 연구주제 자체를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 매우 늦다. 그래서 가장 창의적인 젊은 시기가 헛되이 다 흘러가 버리고 만다. 교수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연구에 있어서도 독립성이 떨어진다.
빌 게이츠가 대학교를 2년도 안다니고 사업을 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나중에 대학끝나고 대학원과정이 끝나고 내가 뭐가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자고 하면 그것은 너무 늦다. 진짜 중요한 강의는 인터넷 사업이 요즘 전망이 좋다는 식의 강의일것이다. 그러나 많은 한국의 대학생들은 그런 강의는 내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프로그램밍의 자세한 테크닉을 설명해 주는 강의를 들으면 내용이 알차다고 생각한다. 대학생은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알아야 한다. 고등학생이 안다면 더욱 좋다. 중학생이 안다면 더더욱 좋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어리건 많건 서로 대화가 통하면 대화하는 것이고 대화가 안되면 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이리저리 잣대로 나누어 차별하고 각자의 작은 층속에 빠져든다. 그러니까 5학년은 3학년하고 동등하게 대화를 하지 않고 학벌이 높으면 학벌대로 깃수가 높으면 깃수대로 모여서 마치 아랫층 사람들은 전부 우리 수준이 안된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지연 학연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패거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만 겨우 터놓고 솔직한 대화를 한다. 아랫사람과 대화를 할 때는 되도록 뭐든지 아는 척한다. 체면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과연 제대로 된 공부를 할수 있을까? 효율적인 정보교환이 일어날까?
남이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아서 일찍부터 추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세상은 빨리 변하고 있다. 대학생들은 대학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을거라고 믿겠지만 대학 교수들은 사실상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하는지 모른다. 알 수가 없다. 물론 확신을 가지고 가르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고 나면 뭘 가르쳐야 하는지는 누구도 확실히 모른다.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고 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있으니 혹시 쓰일지도 모르는 기술적인 것을 전부 배우자면 끝이없다. 그렇게 잡다하게 배우다보면 결국 자기가 뭘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교과서만 공부하다가 나이만 먹는다. 10년뒤 20년뒤에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어떻게 아는가. 결국 학생이 스스로 선택해서 스스로의 관심사에 따라 공부해야 한다. 교수는 그저 자기가 아는 것을 가르칠 뿐이다. 어느 교수가 뭘 가르친다고 해서 그것만 쭉 따라서 배우면 뭐가 될거라고 생각하는 건 대개 착각이다.
한국은 이런 비민주적인 구조적 풍토는 그대로 두고 아직도 한국교육에 대해 말할 때 대학을 운영할 돈이나 학생선발에 대한 것만 주요한 화제로 삼고 있다. 더 많은 돈이 대학에 있으면 잘 할 수 있다, 대학입시만 더 잘 치루면 인재를 뽑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정부나 기성 세대는 고등학생이며 대학생들, 연구원들이나 대학교수들을 더 쥐어 짤 수 있는 방안이나 어린 학생들을 결과야 어찌되건 달콤한 말로 유혹해서 이공계로 밀어넣을 수 있는 방안들을 연구한다. 더 많은 채찍질과 당근이면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돈을 쓴다고 해도 훨씬 부자나라이고 나라규모가 훨씬 큰 미국이나 일본의 연구비만큼 쓸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전세계에서 인재들이 모여드는 미국, 인구가 몇배나 많은 일본보다 재능있는 인재의 수가 한국에서 훨씬 더 많을 수가 있겠는가. 미국보다도 일본보다도 더 비민주적인 풍토를 그대로 두고 그런 것을 기반으로 학문적 선진국가를 이룩하겠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한국에서 교육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역없는 민주적 분위기가 교육기관에 존재해야 할것이다. 그게 어떡하면 가능한지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같이 공부하는 분위기, 누구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배우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걸 대학뿐만 아니라 사회전체로 퍼뜨리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학문적이든 기술적이든 발전이 일어나려면 일단 높은 곳에 앉아있는 분들, 층층이 계급을 만들어 너와 나는 다르다고 말하며 소통을 중단시키고 있는 분들이 내려와야 한다. 기분은 좋겠지만 교수가 해를 달이라고 하면 달이라고 믿는 학생들만 있으면 한국교육은 계속 선진국 교육이 되지 못할 것이다.
언뜻 들으면 쉬워 보이지만 아직도 한국에서는 여기저기서 ‘어디서 어린 놈이’같은 말이 수시로 튀어나온다. 그 어린 놈이라는게 이미 성인의 나이에 접어든 사람들일 때도 그렇다. 한국에 민주적 분위기를 퍼뜨리는 것을 사람들은 항상 달가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 때 한국의 교육, 고의로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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