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9.17
머릿말
물고기를 잡자고 하면 누가 필요할까. 답은 어부다. 짐승을 잡자면 사냥꾼이 필요할 것이고 아이를 가르치자면 선생님이 필요할 것이다. 해답은 질문에 의해서 정해진다. 그러니까 어부는 물고기가 없는게 문제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고 사냥꾼은 짐승을 잡아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고 선생님은 아이를 교육시키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라고 말하기 쉽다.
한국 사회의 발전이란 주제역시 한국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구체적 방안 이전에 한국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주장에 의해 대부분의 틀이 정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적 진영의 기본시각은 항상 이것이 저소득계층과 기득권 계층간의 계급적 다툼이라고만 말하는 것같다. 그러므로 기득권의 탐욕을 막아내는 것이 이 시대 진보의 당연한 가치가 된다. 한국을 바라보는 진보적 시민의 통상의 시각은 기득권과 깨어있는 시민 그리고 기득권에 세뇌당한 저교육층으로 한국이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이 당연한 것을 의심해서는 안되는 걸까. 이 당연한 것에도 어떤 의도가 있으며 이 당연한 것을 의심하는데서 새 길이 열린다고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예를 들어 조선시대 내내 조선의 주류 지식인들내지 권력은 유교적 질서의 확립에만 골몰했을뿐 서양의 기술과학문명을 받아들이거나 상공업의 발전따위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어느 정파에 속해있건 조선을 지배하던 지식인층은 결국 유학자이기 때문이다. 유학자는 유학의 전문가가 필요한 세상이어야 큰소리를 친다. 그리고 그 패러다임에 빠져 있는 한 조선은 구원받을 길이 없었다.
싸움이 있어야 하는 곳
선거가 끝나면 그리고 지지율 조사 자료가 나오면 여러가지 사람들이 국민들의 반응이 왜 이런가에 대한 해석을 내놓는다. 사람은 수천만명이 있는데 나온 결과는 지지율이라는 숫자 몇개이므로 수천만개의 변수를 하나의 변수로 이해하려는 것이라 가능한 해석은 수없이 많다.
그래서 보통 정치평론가들은 한국에 몇명의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그림을 잡는다. 예를 들어 기득권 시민, 진보적 시민, 저교육층 시민 같이 세개의 인물상을 등장시킨후 오늘날의 정세를 보았을때 기득권 시민은 뭐가 화나서 이렇게 행동하고 진보적 시민은 이러저러해서 화가 났고 저교육층은 이러저러하니까 이렇게 행동한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과학자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조잡한 것이다. 한 클라스로 묶을 수 없는 것들에 마구 동그라미를 쳐서 클라스로 묶고 설명을 가져다 붙인다. 무작위로 만들어 낸 물감자국을 보면서 나비나 도둑이나 사람얼굴을 볼 때 그런 답들은 물감자국 자체보다는 보는 사람의 심리적 상태와 선입견을 더 많이 반영한다. 한국 사람이 이러저러한 구성으로 이뤄져 이러저러하게 행동한다는 분석 역시 그런것 아닐까? 현실보다는 보는 사람 맘대로 왜곡되는거 아닐까?
차라리 한국인을 나누지 말고 한국인 전체에 있어서 지금 필요한게 뭘까. 뭐가 전체 한국인의 문제일까를 고민하는 게 새로운 방향이 아닐까? 이런 경우 한국내부에서 좌와 우가 싸우고 기득권과 서민층이 싸운다는 그림은 일단 무시된다. 이런 경우 우리가 고민하게 되는 것은 예를 들어 한국 전체에 만연해 있는 권위주의, 대충 대충일을 처리하는 태도, 돈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배금주의, 사회전체가 공유하는 가치관의 약화따위가 더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 말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주로 말해지는 것은 역시 모든 책임은 기득권에 있다는 것이다. 즉 기득권이 권위주위를 지키고 기득권이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고 기득권이 배금주의를 퍼뜨리고 기득권이 비윤리적이다는 식으로 말하며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다시 필요한 것은 기득권을 타도해서 악의 뿌리를 없애는 것이 된다. 결국 싸움은 다시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싸움이 되고 만다.
이 그림의 큰 문제점으로 즉각 느껴지는 것은 이 구도는 결코 집권세력의 구도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고용자에 대한 노동자의 시각,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에 대한 약자의 시각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집권세력의 정치사상이 될 수가 없다. 그런 시각은 결국 혁명이 성공했을 때 스스로가 고용주가 되고 지도자가 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었을 때 어떤 행동강령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뭐뭐뭐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만 있을 뿐 뭘해서 생산하고 부를 축적하고 발전할것인가에 대한 수단이 불투명하다. 지금의 왕을 끌어내리고 내가 왕이 되면 그냥 착한 왕이 되겠다는 식의 태도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렇기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필연적으로 배신자라는 이름을 달게 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부는 어느 정부보다 평화적이고 절차를 따르고 반부패한 정부였지만 그래도 그들은 국가의 경영자였고 사회적 강자로 취급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착하다고? 도 착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에 없는 것 : 문화적 정체성
한국 정치의 빈자리라는 글에서 한국 정치에 없는 것은 한국이라는 말을 쓴적이 있다. 한국은 이제 문화적 정체성의 확립이 필요하다. 먹을게 없어서 불행하고 굶어죽는 단계는 지났으니 과연 뭘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게 필요하지 않겠는가. 사회적 자유도 많이 증가했다. 본래 더 많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더 원칙과 규칙을 명확히하고 그것을 지키는 일이 필요한 법이다. 외국의 영향도 더 커지고 있다. 외국 문물이 매우 제한적으로만 한국에 들어올 때는 한국적인 것 중에 꼭 지켜야할 것과 관용을 보일 수 있는 것의 구분이 덜 필요하지만 외국사람과 외국 문물이 정신없이 쏟아져 들어올 때는 이에 대한 고민과 공감대가 꼭 필요하다.
문화적 관습이나 도덕, 법율은 결국 넓은 의미의 규칙이다.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규칙이 정확히 정의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제한의 자유만 강조된다면 그 사회는 가장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라 가장 끔찍한 부자유스러운 사회가 될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서로 자동차를 운행하는 방향이 다르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문화적 관습도 다르다. 어느 쪽이 꼭 틀린 것도 아니지만 문제는 영역의 구분없이 둘을 마구 섞을 때 일어난다. 그럼 차가 같은 노선에서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일이 일어난다. 한국 사회가 추구하는 나름의 가치가 없을 때 한국은 문화적 속국이 되고 문화적 혼란으로 난장판이 되어버린다. 이런 것을 우리는 필리핀에서 보고 다민족이 싸우는 이스라엘에서 본다. 단순한 싸구려 물품의 생산공장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와 소통하며 살아야 하는 오늘날 국가공동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런 것을 쉽사리 국수주의나 폐쇄적 민족주의와 동일시하여 비판해서는 안된다. 사실 외국인에게 열린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한국적인게 뭔지를 더 잘 알아야 한다. 극단적인 예지만 에스키모들은 방문객에게 자신의 아내와 동침하도록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이야기의 진실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나라가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한국에 와서 당신에게 같은 것을 요구할 때 당신은 그래도 좋다고 할 것인가? 당연히 아니면 왜 당연히 아닌가. 그건 한국적 관습이 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미묘하고 보다 복잡한 문제에 있어서 수많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에 온다. 그들이 이런 건 본래 된다고 할 때 우리가 우리의 문화와 가치에 대해 어떤 부분은 관용해도 되고 어떤 부분은 아 이건 한국에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면 한국은 쓰레기통이 되고 말 것이다.
한국의 중대한 문화적 자산이 중대한 산업적 자신이라는 것도 생각해야 하는 일이다. 관광문화산업은 한국의 미래산업으로 전도 유망한 산업이다. 그런데 외국인이 뭘보러 한국에 오겠는가.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한국에 없는 것 : 엄밀한 과학적 합리주의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은 삼성, LG, 현대자동차 같은 회사들이다. 우리는 금융으로 먹고 사는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에는 과학적 합리주의가 보편적이 아니다. 과학적 합리주의는 결국 엄밀성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신용사회, 선진사회에서 모든 시스템은 매우 빨리, 매우 큰 규모로 움직인다.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들은 그만큼 자신들의 행동에서, 적어도 사회적 활동 내지 경제적 활동에서 매우 엄밀한 과학적 합리주의를 실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 사회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더치 페이도 잘 정착이 안되고 복잡한 권위주의적 사회예절과 호칭문제로 얽혀있다. 사람들은 대충 대충 뭘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 보다는 인맥을 쌓고 원칙을 구부리고 항상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오히려 성공하기 쉬운 사회다. 과학적, 기술적 지식의 가치는 아직도 크게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 지식이 많은 사람은 흔히 별종으로 취급된다. 보다 불분명하고 중의적인 표현을 쓰는 인문계의 사람이 보다 세상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라면 빌게이츠는 회장을 할수 없거나 보다 권위적으로 굴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원하건 원하지 않건 한국사회는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있다. 대학과 회사들이 모두 그런 압력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분란이 일어닌다. 사회는 보다 엄밀한 기계처럼, 정밀도가 높은 부품을 요구하는 로켓이나 대형 컴퓨터처럼 변해가려고 하는데 그 구성요소가 되는 사람들은 정밀도가 떨어진다. 따라서 자꾸 변화는 늦춰지고 사고가 난다.
4대강사업같은 국책산업을 평가하거나 사회적으로 분란이 있었을 때 언론에서 행해지는 보도와 토론등을 보면 이런 것을 알 수가 있다. 엄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사람들이 환경평가나 외국의 사례같은 기본적인 사실을 확인해 줘야 대화가 보다 현실적이고 결론에 가까운 이야기로 나갈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본적인 사실들이 마구 흔들리고 가짜 뉴스가 넘치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시간이 지나면 전에 1조라고 보도되었던 환경파괴 영향이 몇십억으로 줄어들기도 한다. 전문가는 상식을 뛰어넘는 사실들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상식으로도 말이 안되는 사실들에 대해 횡설수설하기 위해 언론에 불려나오는 것같다. 광우병의 진실은 뭔가. 청계천 개발의 진실은 뭔가. 4대강 사업에 대한 토론에서는 매우 경험없는 사람이 매우 몰상식하게 들리는 말을 하는 것을 전문가들이 입막고 듣고만 있어야 한다. 결정 프로세스의 부품들이 덜컹거리기 때문에 사회적 대결은 언제나 극단으로 가서 말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고 그냥 실력대결로 밀어부치기가 되고 만다.
결론
국민통합은 많은 사람의 꿈이다. 그런데 정치가들은 국민분열로 먹고 사는 사람이 많은 것같다. 그들이 말하는 통합이란 상대편의 완전한 무력화를 말한다. 통합은 철학적, 정치적 일관성이 없는 것을 변명하기 위한 말로나 자주 쓰일 뿐이다.
집권하는 진보, 싸우기 위한 진보가 아니라 정말 보다 인간다운 세상을 위한 진보라면 뭐가 한국의 문제인지에 대한 문제설정부터 고민해야 하는게 아닐까. 문제설정이 달라지면 해결사도 달라진다. 지금의 해결사로 정치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사실 해결사로 적합지 못하다는 판정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밥그릇 싸움문제가 된다. 오히려 그래서 자칭 진보건 보수건 결국 변화에 저항하는 역할을 열심히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도 같다.
보다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려면 그 세상을 만들 해결 꾸러미를 가지고 가야 한다. 해결꾸러미에는 진단서와 처방전과 부작용을 해소할 방법이 모두 있어야 한다. 정치가들은 솔직히 국민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라고 하고 싶다. 당신의 진단과 당신의 처방과 당신의 부작용해소법은 뭐냐고. 정치는 그저 권력과 밥그릇을 두고 싸우는 싸움터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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