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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국가란 무엇인가

사회적 분열과 이름붙이기

by 격암(강국진) 2009. 10. 6.

2009.10.6

머릿말

 

오늘날의 정치 논쟁을 보면 노자 도덕경의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는 도를 도라할것 같으면 항상 옳은 도가 아니요 이름을 붙여 이름부를 것 같으면 항상 맞는 이름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단어들이 본래의 뜻을 잃어버릴정도로 남용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를 만들어 내고, 사회적 화합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본질적 가치가 잊혀지고 있지도 않는 가상의 적에 대한 분개로 사람들은 피곤해지며 합리적인 태도보다는 패거리를 지키자는 충성주의와 권위주의가 한국을 채우는 것같다.

 

미신이 혼돈을 만들어 내는 경우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들을 몇가지 거론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이야기중에는 혈액형과 성격이 관련되어져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예를 들어 AB은 사교관계에 서툴고 o형은 박애주의자라는 식이다. 혈액형이 성격과 관련있다는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 단지 사람들은 사람들을 구분하고 그 안에서 착시된 법칙을 볼뿐이다. 이런 착시된 법칙은 실상 아주 쉽게 만들어 진다. 사람은 본래 법칙이 없을 때도 법칙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성격을 가지고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식시장에서 그래프속의 법칙을 자기만 봤다고 착각을 한다. 그리고 돈을 투자하고 돈을 잃어버린다. 19세기에는 성격이 두개골의 모양과 관련이 있다는 골상학이란 것이 유행을 했었다. 이것은 두뇌의 특정부분을 많이 쓰면 그 부분이 발달해서 용기나 양심같은 것을 머리모양에서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가짜과학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두개골이 분류되고 연구되고 두개골의 여러가지 부분들에 이름이 붙여졌다.  20세기 들어와서는 이것은 과학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19세기에는 상당히 유명했던 탓으로 신경과학책의 서두에서 대부분 흥미를 주기 위해 언급되고 있다.

 

이런 예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더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말띠 처녀가 어떻다는 둥 띠가 서로 궁합이 맞아야 한다는 둥하는 이야기도 있고 점성술은 여전히 서양에서 대단한 인기라서 신문들이 이것을 싣는다. 우리나라 신문에서도 오늘의 운세라고해서 나이만으로 오늘의 운세를 점쳐주는 '용감한' 행위를 한다. 그러니까 1969년생 닭띠는 모두 오늘 운이 좋다던가 하는 식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지만 일단 분류가 일어나고 구분이 생기면 착시된 법칙을 찾아내는 일은 아주 쉽게 일어난다.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는 성격이 다르다거나 가름마를 오른쪽으로 타는 사람과 왼쪽으로 타는 사람이 성격이 다르다는 주장같은 것이 쉽사리 통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임대단지의 사람은 이러니 저러니 하는 말도 이렇게 생기는 것이다. 

 

복잡한 사회속에서 단순한 구도는 미신에 가깝다.

 

정치나 사상, 사회와 관련해서 사람들은 여러가지 말로 사람들을 나눈다. 예를들어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신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자와 자본가로 사람을 나눈다. 영남사람은 어떻고 호남사람은 어떻고 하는 이야기도 있고 페미니스트들도 있고 가부장적인 사람들도 있다 . 그런데 이런 말들이 오늘날 특히 한국의 현실에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런 말들은 과연 위에서 언급한 미신과 크게 다른 것일까?

 

이런 분리를 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을 두부분이나 4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의미있는 행위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참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거짓일 가능성도 높은데 왜냐면 현대인의 삶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변화하면서 더 복잡해 지고 있다. 

 

마르크스 시대에 노동자와 자본가를 나누는 것은 의미있는 행위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육체노동자의 수가 훨씬 줄어든데다가 부동산, 주식시장의 발달로 평범한 소시민들도 투자를 하는 시대에 그 분류는 정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은 흑백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그것은 점성술이나 혈액형으로 본 성격보다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보-보수의 구분이 정치문제에 있어서 설명해내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나온것은 이미 수십년은 된 이야기다. 설명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사실 거의 미신으로 가는 길 직전에 있다는 이야기와 차이가 별로 없다.

 

이름붙이기는 매우 나쁜 것이다. 1, 선입견

 

과학적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특히 우리가 아메바나 암석을 구분하고 있다면 설사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분류를 도입해서 이론을 만들어 본다고 해도 특별히 나쁠 것은 없다. 아니 오히려 여러가지를 시도해 본다는 점에서 권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포함되며 인간이 관련된 경우 이름붙이기는 무해한 것이 아니라 매우 해로운 것이다.

 

21세기에도 점성술이 믿어지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한번 생긴 믿음과 선입견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 분류가 사실과 맞건 아니건간에 한번 이름을 붙이고 나면 사람은 그 선입견을 없애지 못한다. 처음 보는 학생이 하나 있다고 하자. 당신이 처음에 이 학생을 우등생이라고 불렀으면 그 이후 이 학생의 이미지는 점점 더 좋아질지 모른다. 성실하고 착하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같은 학생도 빈민가 출신이라고 불렀으면 이미지는 다른 식으로 발전될 수 있다. 위험하고 우리랑 좀 다르고 삐뚤어진 시각을 가지고 있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사람이 가지는 선입견은 본래 이렇게 자기확증을 추구한다.

 

이 글을 쓴 이유가 사실 이 문제때문인데 그래서 함부로 사람들을 이러니 저러니 분류하고 그런 분류법을 아는 것을 지적인 성취로 자랑하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개인적으로 화가 날 때가 많다. 진보들은 빨갱이로 매도되는 것을 극히 싫어하고 지긋지긋해 한다. 사람들은 진보 = 김일성 추종자 이렇게 구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진보들중에도 참여정부를 신자유주의자라고 불러서 공격했던 사람은 많다.

 

그것은 이런 식이다. FTA에 찬성하십니까? 여기서 네라고 하면 신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나의 개인적 특징은 모두 날아간다. 좀 더 참을성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저 몇개의 질문으로 알 것 다 알았다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가장 시장의 자유를 많이 외친 이명박대통령이 시장주의자라고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물가가 오르니까 관리종목을 정부가 정해서 관리하겠다고 외치는 시장주의 정부가 있는가?

 

분류의 오류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일단 선을 그으면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차이를 보고 그 차이는 차별이 되고 차별은 원한을 만들어내고 원한은 전쟁을 만든다. 미국 인디언과 유럽개척민이 그렇고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유태인들이 그러하며 영남과 호남사람들이 그렇다. 선배와 후배가 그렇고 직급에 따른 구분이 그렇고 대학 이름에 따른 구분이 그렇고 박사냐 아니냐에 따른 구분이 그렇고 남자와 여자가 그렇고 교수와 대학원생이 그렇다.

 

선을 그으면 선안에 있는 사람과 바깥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저들과 우리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비하가 벌어지고 비하는 싸움으로가서 시간이 흐르면 주장이 현실을 창조한다. 즉 그들은 우리와 달라서 우리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그런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저소득층과 고소득층이라는 구분이 그렇고 국민임대아파트와 자기 소유아파트 거주자들이 그렇게 한다. 공장직원들과 경영진이라는 구분이 그렇다.   

 

이름 붙이기는 나쁜 것이다. 2 : 가치의 실종

 

게다가 이름붙이기라는 것은 착각을 만들어 낸다. 여기 학생들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이들을 성적으로 둘로 나눌수 있다. 우등생과 열등생이다. 그리고 그걸 기반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다보면 우리는 다른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기 쉽다. 즉 성격이 온화하다던가, 옷을 잘입고 다닌다던가 키가 크다던가 작다던가 하는 특징들은 '중요하지 않은' 특징이 되버리는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당신은 시장의 자유를 믿습니까?라고 묻을때 당신이 그렇다고 한다면 당신은 신자유주의자로 분류되기 쉽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당신은 노자를 좋아합니까라던가 당신은 여행을 종종 다닙니까라던가 당신은 미적분을 할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세상을 신자유주의자와 사민주의자들간의 경쟁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은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보면 사민주의의 뿌리가 되는 막시즘이나 시장 주의자들이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주로 경제적인 것을 논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환경이 정신적 태도까지 결정한다는 믿음이 있다. 그러니까 재벌집 아들이야기는 들어보나 마나고 빈민굴출신 사람생각은 들어보나 마나다. 평등에 대한 믿음은 좀 다를지 몰라도 성공한 사회란 모두 부자가 되는 사회라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 어떤 사람이 자본론을 읽었다고 하면 아 그렇군요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이 노자를 읽는다고 하면 그러던가 말던가다. 어떤 사람이 효자냐 아니냐는 정치적으로 중요할까 하지 않을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는 정치에 국한해서 말하고 있다고 할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 사람은 그가 세상을 자르는 기준에 효는 별로 중요한게 아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엉터리 이름붙이기는 가치를 실종시키고 특정한 가치를 강조한다. 사람들을 모두 부자와 가난뱅이로 이름붙이기로 하고 그 안에서 대우의 차이가 있다면 모두가 부자로 분류되기 위해 노력할것이다. 능력도 안되면서 비싼 차를 타고 비싼 옷을 입고 비싼 레스토랑에 가고 돈이 많은 척하고 큰 아파트를 자랑할 것이다. 정 안되서 가난뱅이로 분류되고 차별받는 사람은 항의하지만 그 들중의 상당수도 부에 의한 분류에 세뇌되어 있다. 즉 그들도 모든 가난뱅이가 부자되는 사회를 꿈꾼다는 것이다. 세상을 부의 정도에 따라서 보는 눈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름붙이기가 이렇게 위험한데 그 기준이 하물며 외국에서 만들어져서 우리말로 번역되서 우리멋대로 해석해서 적용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백해무익할 것인가. 사회적 의미가 다르다는 점에서 자유는 프리덤이 아니고 정의는 저스티스가 아니다. 인민은 그 단어자체는 나쁜 뜻이 없는데 북한에서 쓴다고 나쁜 이미지가 붙었다. 평등이 도대체 뭔가. 민주주의가 도대체 뭔가. 다들 중도 좌파 중도 보수 운운하는데 외국과 이미지가 다르니까 좀 잘해보라고 서로 핀잔이다. 진보가 보수에게 보수가 뭔지 강의하려고 한다. 프랑스의 남인과 서인은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신들은 뭐라고 말할것인가. 그런 구분은 쓸모가 있을까? 그러면서도 그런 구분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분류의 불가피성

 

사람들은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분류는 불가피하다고 말할 것이다. 맞다. 나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분류와 이름을 피할 수 없다. 뭔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분류를 하고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이며 이것을 지나치게 피하려는 순간 대화는 선문답처럼 변해 버릴 것이다. 모든 과학적 논리는 정확한 관찰에 기반한 정의로부터 연역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한국에는 불필요한 분류가 너무 많다. 불필요한 이름이 너무 많다. 사람들은 서로 서로를 그냥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고 온갖 종류의 직함으로 부른다. 한국 처럼 사람들을 분류해서 부르는 선진국은 없다. 유럽이나 미국은 물론 일본도 한국만큼 그렇지는 않다. 불필요한 분류는 혼란만 만든다. 우리는 그런 말들을 줄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말들을 쓸 경우에도 우리는 언제나 말에 휘둘리지말고 원천적 경험, 원천적 느낌에 대한 존중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름에 너무 빠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다 같이 잘살기 위해서 사상을 도입하고 개념을 도입하고 분류를 하는 것이지 사상에 가져다 끼워맞추기 위해서 사람들이 존재하는게 아니다. 그 분류에 잘 안맞으면 넌 좀 이상한 진보라던가 좀 이상한 보수라고 말하는 대신 진보니 보수니 하는 도구가 잘 안먹힌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저러한 사람들로 이뤄져있다는 주장 그것도 유럽이나 미국이나 일본같은 다른 나라의 현실을 보고 느낀 지식인의 말에 완전히 빠져서 한국을 그 눈으로만 보는 경우가 참 많은 것같다. 그런 경우 마취당하고 세뇌당하지 않으려면 읽으면서 계속 주문을 외워야 한다. 이건 외국이다. 이건 외국이다. 이건 번역이다. 이건 번역이다하면서 말이다. 사안에 따라 영국의 보수가 한국의 진보보다 더 급진적이다. 나라 규모가 다르고 사회문화적으로 축적된 재화가 다르며 이웃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다. 그들이 우리처럼 식민지를 겪었나? 북한과 마주보고 있는가? 그러나 뛰어난 외국 지식인들의 책을 읽으며 그 특수성을 일반성으로 착각하는 일은 언제든지 일어난다. 그리고 그 사상과 그분류법으로 한국 사람들을 찟어놓는데 열심히 노력할 수 있다.

 

분류는 하지만 근본에 대한 느낌과 접촉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분류는 인위적인 것이고 본질은 그대로 있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멋진 예술작품이 이런 저런 장르는 이러저러한 기법을 쓰고 본래 이러니 저러니 하는 지적인 분류로 창조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을 잊지 않는 평안한 마음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장자는 이런 이야기를 악기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에서 하고 있다. 멋진 사회를 만드는 일은 어떨까. 열심히 흥분해서 세상을 찟어발기면 그렇게 될까?  

 

맺는말

 

이름붙이기가 해롭다는 주장은 익숙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다시 환기시키면서 잊혀진 가치에 대한 생각도 환기 시키고 싶다. 거대한 구분은 개인을 실종시킨다. 나를 누군가 보수나 자유주의자로 구분하는 순간 나는 단지 보수나 단지 자유주의자가 된다. 거대한 구분이 실종시키는 것 중의 하나는 하나 하나의 개인이 서로 다른 생명이라는 가치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리니지를 하는 젊은이는 어떤 사람일까? 이사람은 보수인가 진보인가 시장주의자인가 계획주의자인가. 아무 상관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삶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을 100년이나 50년전의 이름으로 분류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단순한 이름붙이기는 인간에 대한 단순한 이해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매우 매우 전문화되어 있다. 사회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택시기사와 커피숍점주와 프로게이머와 대학교수와 IT업계의 근로자의 생활 환경이 전혀다를 때 그들을 단순히 분류하는 것은 얼마나 용감한 행위인가. 사람들은 이걸 느낀다. 그래서 세상에는 무당파가 잔뜩있다. 한나라당 지지자도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때문에 세상이 나쁘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한나라당에 실망해 있다. 민주당도 민주노동당도 마찬가지다.

 

이름붙이기를 한다. 가열차고 속시원하게 싸우는 사람이 환호를 받는다. 그리고 진짜 싸움이 난다. 분노가 생긴다. 이름붙이기를 함부로 할 때 정치 사회에 대한 관심이나 참여가 싸움과 분노를 증폭하고 그걸로 생계를 꾸리기 위한 것이나 그걸로 분노를 푸는 것이 되는 모양이 되기는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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