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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국가란 무엇인가

진보적 시민주권론을 비판하며

by 격암(강국진) 2009. 10. 8.

2009.10.8

머릿말

 

조기숙 교수의 진보적 시민주권론이란 연작 칼럼이 나오고 있습니다. 상당히 공들여 쓴 칼럼이며 이 칼럼의 각론에 있어서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이야기라고 칭송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비판이라고 쓴 이유는 물론 이야기를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당연히 옳고 찬성할 부분에 대해 굳이 늘어놓고 확인할 필요는 없겠지요. 생각이 다른 부분, 우려되는 부분을 이야기해야 할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비판입니다.

 

제가 비판하고 싶은 것은 시민주권론 칼럼의 기본적 시각이 큰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며 한국과 미국의 차이를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약자의 호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공감대에서 출발하는 것은 시민주권운동이 성공하건 실패하건 어느쪽도 문제를 만들것입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시각

 

이 칼럼은 정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갈등이라고 정의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지배자에게서 어떻게 시민들이 더 많은 권리를 찾아올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절대적으로 옳은 말도 아닙니다. 바로 이런 시점이기에 이것이 약자의 호소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배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절대선으로 주장한다면 만약 정당한 정부가 선다고 해도 그 정당한 권위에도 계속 시민들은 도전하게 될 것입니다. 너무 조용한 독재사회가 답이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시끄러운 것이 답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참여정부때 이미 많이 목격하였습니다. 조중동과 한나라당 세력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얼마나 자주 정권의 권위를 훼손하였습니까? 그들은 여전히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렸지만 갑자기 그들이 민주주의 투사나 약자인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것에 무기력하게 당하게 된 것에는 바로 민주주의 운동이란 지배자로부터 피지배자의 권리를 찾아오는 것이라는 시각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조직과 기계의 불가피성

 

위에서 말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시각이 여러가능한 시각중의 하나라는 것은 전체를 시스템 이라는 이름으로 봤을때 즉시 알수 있습니다. 현대사회, 현대정당 그리고 현대의 기업들은 탈 규제를 외치고 변하기는 하지만 사실 완전한 조직의 붕괴란 있을수 없습니다. 단지 낡은 규제를 없애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넣는 것으로 조직은 확대되고 그 결과 언제나 조직은 국소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봤을 때 더더욱 방대하고 복잡하게 변해 왔습니다.

 

모든 사회는 복잡한 조직을 만들어서 여러가지 문제를 분업을 통해 해결하고 많은 힘을 협동하여 집중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도 모든 인간은 자유롭다면서 각자 자기 신발 자기가 만들고 모두가 사장이며 모두가 거래를 중단하고 외롭게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지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전체를 시스템으로 볼때 사회의 권력을 지닌자는 사욕을 위해서건 공익을 위해서건 시스템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국민연금을 만든다던가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던가 노인들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하는 자원을 마련하는 모든 통치, 복지행위도 여기에 듭니다.

 

그런데 통치행위는 시스템적 시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을 통제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설사 다수결에 의한 민주적 권위에 의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단적으로 단순히 말하면 시스템안에는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기계의 일부로 서로 서로간의 압력에 의해서 돌아갈 뿐입니다. 이라크 파병을 하는 노무현 대통령은 파병되는 군인들의 생명을 하찮게 생각하는 지배자입니까? 그걸 반대했던 사람들은 정부의 권위를 무한대로 무시하고 반대할 권리가 있습니까? 그럼 군대안가고 싶은 사람은 왜 처벌합니까? 누가 무슨 권리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처벌합니까?

 

양쪽의 시각중 어느것이 현대에 더 옳은 모델인가

 

두 시각은 모두 모델입니다.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둘중 어느쪽이 더 옳은 모델일 수 있으며 둘다 100% 절대로 옳은 시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군사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탈취당한 나라에 살고 있지 않으며 조선시대의 왕조에 살고 있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사회는 날로 복잡해져서 우리나라도 직업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국제 정세에 복잡하게 얽혀서 살아갑니다. 이럴때는 시스템의 시각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단순 지배라는 단어가 설득력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누구도 전체 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서 지배라는 말이 애매한데다가 시장을 이기는정부가 없다는 말처럼 시스템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의 시각이 더 설득력이 있을때는 지배자-피지배자의 모델에서 나오는 피지배자의 저항권같은 논리는 쉽게 논파당합니다. 왜냐면 통치행위는 대통령도 어쩔수 없이 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대통령의 통치행위에 사생결단으로 저항하는 것을 지배자-피지배자의 시각에서 정당화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시스템, 조직, 기계 뭘로 부르던 정부의 권력이나 지배자의 권력이란건 한 인간의 힘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기계의 힘입니다. 그것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도 우리는 조직이 필요하고 기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시작을 지배자-피지배자의 대립으로 시작하면 지배자 시스템과 싸우기 위한 조직을 만드는 가운데 내부적으로 같은 논리가 재생산 됩니다. 결국 기계와 싸우기 위한 기계, 시스템과 싸우기 위한 시스템을 만드는데 기계에 반대하는 시점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무력해지는 겁니다. 개혁당의 역사도 그렇고 이것은 최근 10년정도의 한국 정치에서 반복되어 일어난 문제입니다.

 

그럼 시민의 권리와 행복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시스템의 시각으로 봤을때 그럼 조직의 일부로 기계의 부품으로 시민의 권리는 압살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대로된 질문입니다. 이 세상을 시스템적인 시각으로 봤을때 개인의 행복과 자유는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시스템을 제대로 설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사실 이미 많은 토론이 이뤄져 있습니다. 정치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상 하는게 이 이야기아니면 위에서 말한 지배자에 대한 비지배자의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권을 잡으면 대부분 시스템의 설계 이야기만 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책토론입니다. 인터넷 정당을 만든다던가 하는 것이 정당조직에 대한 시스템 설계 이야기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으며 따로 방대한 논의가 필요할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두번째 입니다. 두번째 포인트는 바로 이 세상이 시스템으로 이뤄져있다는 것, 이 세상이 돌아가는 논리에 대해 시민들에게 알리고 이해를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말하자면 우리는 매트릭스에 빠져서 사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매트릭스건 우리는 매트릭스에 빠져서 살아야 합니다. 시스템과 기계와 조직을 모두 피한다면 우리는 원시시대로 갈뿐입니다.

 

다만 그걸 자각하고 이따금씩은 그 시스템에서 벗어나서 사는 것이 개인의 행복과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스템이든 시스템이 존재할 필요성은 긍정하되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것에서 벗어나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법은 필요하지만 법만 가지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인간들 때문에 세상이 돌아갑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삶의 질이라는 이슈와도 직접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질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크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필요한 건 문화운동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문화운동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정치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서 문화운동인 동시에 정치운동이 되버릴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수도이전 문제나 수도권집중문제, 학교교육문제같은 것을 봅시다. 사람들을 시스템적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도 방법이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즉 삶의 질이라는 문제로 눈을 돌리면 문제는 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변해있다는 것을 이해하는것인데 많은 한국대중들이 그런 시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인간이 조직의 부속품이상이라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뭐든지 법으로 한다는 것, 법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매몰되어서는 안됩니다.

 

미국과 유럽은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이런 문화운동을 이미 겪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시민들은 이런 메세지에 익숙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훨씬 탈권위화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 것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문화적 축제가 필요합니다. 

 

맺는말

 

이런 바탕을 내버려두고 조직에 저항하는 구도로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그런 운동은 문제를 만들기 쉽습니다. 먼저 앞에서 말한대로 새로운 조직도 불안정해집니다. 조직의 기본 강령이 조직에 저항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기인의 추종자들이 몰려서 다수결로 전체를 지배하는 형태가 되기 쉽습니다. 파시즘에 저항하기 위한 파시즘이 됩니다. 이겨도 허무하며 이기기 어렵습니다.

 

설사 그런 문제를 피해간다고 해도, 다음 정권에서 정권이 바뀐다고 해도 한국 사회는 진정으로 개혁되지 못합니다. 온갖 반칙을 권력에 도전하는 정의로운 사람의 행위로 말하는 세력들이 그 정권을 흔들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국민들의 삶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방향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럴때만이 진정한 개혁이 이뤄지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전과 시민주권의 성장이 있을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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