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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선과 모터사이클관리술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09. 10. 7.

2009.10.7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 기술이라는 책을 최근에 다시 읽었습니다. 이 책의 중심주제는 퀄리티라는 형이상학적 존재를 기반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을 설명하는 것인데 이렇게 보면 굉장히 거창하고 실제로도 거창합니다만 어찌보면 대단히 단순한 책일 수도 있습니다. 이 퀄리티라는 것은 노자에서 말하는 도와 상통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과도 통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뭐 모두가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초월적 존재들이니까 사실 같은 것이라는 말에는 애매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도던 불성이던 퀄리티건 이 세상의 근원적 기반은 인간의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따라서 논리의 위에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정확히 표현할수 없지만 그것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타는 방법, 아이스크림의 맛, 사랑하는 감정따위는 분명 존재하는 것이지만 아무리 길게 그것을 묘사한다고 해도 정의나 묘사가 체험이나 존재 그 자체를 대체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를 도라고 하는 순간 도가 아닙니다. 자전거는 이렇게 타는 거라고 말로 표현한 순간 그것은 진실에서 멀어집니다. 내 친구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는 순간, 나의 너에 대한 감정은 이거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진실에서 멀어집니다. 

 

그런데 논리적 분석은 항상 정확한 정의에서 출발합니다. 정의가 없는 것은 논리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런 인간의 단순화, 개념화, 분류는 때로 오히려 인간에게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나와 살고 있는 아내를 나는 아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내 연인입니다. 내 친구입니다. 내 동반자입니다. 이 모든 이름들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입니다. 나와 아내의 관계를 모두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의 아내를 아내라고만 인식할때 오히려 진실에서 멀어집니다. 나는 나의 아내를 단지 아내일뿐인 존재로 격하시킵니다. 

 

 세상의 진실에 접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따라서 자기 수양입니다. 도를 느끼는 능력을 향상시키고 자연스럽게 응당 해야 하는것을 하는 태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장사상일뿐 아니라 불교와 유교 모두에서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유교의 경전인 중용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희노애락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고 부르고 이런 감정들이 일어나되 절도있는 상태를 화라고 부른다. 중이란 천하 모든것의 근본이고 화란 천하 모두에 통하는 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이라는 것이 불성이나 노자의 도 그리고 프리지그의 퀄리티와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비슷한 성질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의되지 않는 것이며 어떤 판단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중용이라는 말은 단순히 양극단을 피해 적당히 절충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개념화를 하기 전에 자연스레 근본을 볼수 있는 시각을 가지라는 말처럼 해석됩니다. 사실 그냥 적당히 섞어라라는 것이 중용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이와 대척되는 서양문명의 특징이 나오는 데 그것이 바로 절대적 진리의 추구입니다. 이것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세계이며 수학적 과학적 진리의 세계입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사실을 추구하며 세상을 보는 눈에는 이 세상은 비록 도달하기는 어렵지만 정확히 정의 할수 있는 것들의 기계적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책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 생각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식과 문명의 축적이란 개념입니다. 수학적 진리는 정확한 정의에 근거해서 해석적으로 논리적 분석에 의하여 도출되는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어떤 논리적 사슬을 만들고 나면 중간 사슬을 몰라도 기계부품처럼 가져다가 쓸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논리적 결론들은 과학기술적 지식처럼 축적됩니다. 

 

이것은 오랜 시간이 지날 때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공자와 노자와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능가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과학기술쪽은 전혀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것을 가르켜 우리는 절대적 지식의 추구 혹은 진리의 추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리를 앞에서 말한 도쪽으로 이해한다면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여기서의 약속이라고 해둡시다. 

 

진리추구는 엄청난 장점이 있습니다. 도를 멋있게 말했다고 해서 절대적 진리 추구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사실은 그게 오늘날의 인간문명 자체의 근본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축적해서 오늘날의 문명을 만든것입니다. 그러나 장점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저자인 프리지그가 지적하는 것은 진리추구의 엄청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문명에는 커다란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오류의 피해는 인간문명이 발달할수록 커지게 됩니다. 

 

인간이 도와 불성과 중과 퀄리티 등등에서 멀어지는 순간 인간은 윤리적, 가치관적, 백지상태에 빠집니다. 과학에는 가치판단이 없습니다. 논리는 가치를 파괴합니다. 어떤 것의 아름다움은 과학이나 논리나 수학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도를 진리로 격하하고 진리가 전부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진실여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프리지그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그들이전의 소피스트들을 윤리적 상대론자, 감정에만 호소하는 사람으로 비판한 것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그들은 정의되지 않는 무한한 도를 절대적 진리로 대체해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분노합니다. 

 

이런 착각 아래서 인간은 점점 더 문명안에서 스스로와 주변사람과 세상에 대한 무의미의 늪에 빠져듭니다. 모든 것은 객관화되고 그와 동시에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이 사라집니다. 아주 엉성하게 객관화하는 예를 든다면 이런 겁니다. 저는 제 아내를 키와 몸무게 그리고 미모와 학력과 유머능력등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자기 소개서를 쓰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순간, 그런 묘사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그 묘사를 바탕으로 교체가능한 존재가 됩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상품으로 변한것처럼 느끼는 그것이 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온세상에서 모두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시각들은 우리가 가진 세상에 대한 여러가지 관점이 근원적으로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아파트를 짓고 도로를 건설하고 학교를 만들고 회사를 만듭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우리가 확신에 차있는 어떤 것이 사실은 매우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죠.   

 

장자의 서두는 온통 아주 커다란 존재와 작은 존재를 비교하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커다란 시각은 황당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것이 결여되었을 때 뭔가 인생전부가 크게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것을 도와 진리의 비교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같습니다.  이런 시각이 가지는 또하나의 장점이자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서양문명을 배우는 고통에서 상당부분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절대적 지식의 추구가 전부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서양문명에서 나오는 여러가지 자질구레한 정보 모두를 고통스럽게 따라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윤리학이란 무엇인가, 평등이란 무엇이고 민주주의가 뭔가에 대해 그들이 오랜 시간동안 방대하게 축적한 책과 논리를 번역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작업은 끝도 없고 고통스러운 것이 수많은 단어들이 역사적 배경과 결부되어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파고 파고 파서 백과사전처럼 방대한 지식을 쌓아올려도 그것은 그저 흉내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짜르트 음악을 평생 연구한다고 모짜르트를 또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적 존재가 도에 있다고 할때 시각은 전혀 달라집니다. 서양문명은 이제 그저 참조할 대상이 될 뿐이며 우리는 우리내부에서 진실을 느낄 능력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불안감, 엄청나게 많이 존재하는 공부할 거리에 대한 부담감을 단번에 날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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