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한살림 선언에 대한 찬탄과 아쉬움

by 격암(강국진) 2009. 10. 28.

20년전 오늘 그러니까 1989년 10월 28일 한살림 선언이라는 것이 만들어 졌다. 이 선언은 한살림 운동의 공부모임을 장일순, 박재일, 최혜성, 김지하가 정리하고 최혜성이 대표집필한 것으로 1989년 10월 29일 한살림 모임 창립총회에서 채택하였다. 그 내용을 담은 파일은 여기에 있다. 

 

한살림선언.pdf

 

이 선언은 전체 5장으로 이뤄져서 각각 산업문명의 위기, 기계론적 모형의 이데올로기, 전일적 생명의 창조적 진화, 인간안에 모셔진 우주생명 그리고 한살림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각 주제를 다룬다. 

 

20년이 지난 지금 이 선언문을 읽어보면서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낀다. 문제의식이 확고하고 올바르며 깊고 넓은 공부가 행해졌다는 것에서 놀라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서양과학기술문명을 넘어서겠다고 하면서 그것에 대해 동양의 정신을 가져다 댄 것은 한계로 느껴지는 것이다. 

 

서양과학기술문명을 넘어서는 것은 결코 동양의 정신이 아니다. 동양과 서양의 정신은 서로 다르고 장단점이 있다. 동양의 정신이 단점이 있기 때문에 서양과학문명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서양과학기술문명을 넘어서려면 둘다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하고 서양과학 기술문명이 세계를 메운 현상태에서는 서양과학기술을 적대시하고 비판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에 철저해 질 수 있어야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해보자면 우리나라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는 더더욱 과학적 합리주의도 깊게 뿌리 박히지 못한 상태였다. 원자론적 사고방식은 분명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지만 과학적 합리주의를 포기할 때 우리가 돌아갈 곳은 반문명주의로 이 운동은 기껏해야 조선시대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 이해되기 쉽다.

 

기계론적 사고를 비판하지만 효율적이고 투명한 작업의 효과를 부인하는 것으로 서구 과학기술문명이 극복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굶어서 비루먹은 사람이 비만을 걱정하는 뚱뚱한 사람을 보고 먹는 일의 가치없음을 외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법의 준수정신이며 공공의식은 약하고 일처리는 대충하고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계론적 시각을 비판하는 것에 멈춘다면 설득력이 있을 리가 없다. 

 

우리가 오늘날 우리의 전통적 사고를 칭찬하는데 그것은 서구의 합리주의를 그 극까지 깨닫고 몸에 익히고 그것을 초극할 수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침략당하는 티벳이나 무기력했던 조선을 보면서 도덕사회의 구현을 연상시키는 교조적 도덕의 설교는 설득력이 있을리 없다. 

 

물론 이 모임의 정신적 대부인 장일순씨는 다른 공부를 통해서 정신적 도야를 쌓았을 것이며 만약 국민모두가 장일순 선생같다면 이런 사회운동은 성공할 수 있고 사회는 모든 면에서 발전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살림운동이 성공하려면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의미정도는 국민이 모두가 새기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그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분명 하나는 아닐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을 보면 가장 빠른길은 합리주의에 대한 거부, 기계적 문명화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철저해 짐으로해서 그것을 이해하고 초극하는 길 일것이다. 그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고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살림선언에서는 서구 과학기술문명의 긍정이 그 폐혜와 동시에 지적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서둘러 서구과학기술문명을 배우고 높은 수준으로 가자고 해야 했을 것이다. 다만 그 한계를 기억하자고 해야 했을 것이다. 그 한계너머에 바로 한살림운동이 주장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때 이 선언은 대충 대충 일하고 가난한 것을 그저 참자는 운동으로 이해되기 쉬웠고 실제로 그 정도에 머물고 만 것이 아닐까 싶다. 상식을 초월하게 부패했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합리주의의 폐해를 논하는 것은 더욱 시대착오적이었다. 

 

 

한살림선언.pdf
2.12MB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