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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를 구원하려고 하는한 노동자는 구원할수 없다.

by 격암(강국진) 2009. 10. 31.

요즘 들뢰즈에 대해 여러사람들이 쓴 글을 보다보면서 나는 한가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의 추구에 몰두하는 글이 아니라면 실천적 윤리나 행동지침을 들뢰즈에게서 얻어내려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특히 노동자에 관련되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즉 일종의 막시즘적 사회변혁의 수단으로서의 들뢰즈의 역할을 생각한다는 느낌이랄까. 


더 적나라하게, 오해를 무릅쓰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안에서 노동자를 선동하고 노동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의지를 느낀다. 그들은 어떤 진리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말하듯 신비한 들뢰즈의 개념들을 늘어놓고 이에따르면 우리는 몇개의 계시를 얻었다. 첫째, 우리는 약자를 돕느다. 둘째, 우리는 권력에 저항한다. ... 이런 식이다. 그러면 노동자들이 벌떼 처럼 환호하고 이를 따라서 사회가 바뀌는 것이다. 그 계시들이 지향하는 사회로, 그러나 실제로는 그 철학적 문장들을 쓰고 있는 사람의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배하는 사회로 말이다. 이것은 어설프게 가장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회지배욕, 권력욕이다. 


사람들은 노동자의 친구가 되려고 하고 노동자를 도우려고 하고 노동자를 구원하려고 한다. 이런 것은 나쁘지 않지만 동시에 깊고 깊은 의미에서 시작이 틀려있다. 노동자를 구원하려고 하는한 노동자는 구원할수 없다. 실은 아무도 구원되지 않고 구원될수도 없다. 그러면서 진리는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 


내가 이 애매모호한 말을 잘 설명할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이정우씨의 천하나의 고원에 보면 되기에 대한 설명이 길게 나온다. 동물되기라던가 여자되기를 말하면서 이런 것은 소수자되기의 예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노동자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는 노동자되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 되기란 짐승되기가 짐승의 행동을 단순히 흉내내는 것이 아닌것처럼 화이트컬러 지식인이 공장에 가서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저소득 노동자 가정에 가서 그들의 불우한 처지를 동정하고 그들의 가족인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실제로는 우리는 짐승이 아니고 그 화이트컬러 지식인은 육체노동자가 아니며 그 가족의 일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런척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사람중에는 무책임하게 남의 인생에 끼어들어 잘난척 지식을 늘어놓고 그들의 삶을 위태하게 해놓는 사람도 있다. 사실 그들의 인생은 대개 위험하지 않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그들이 구원해 주겠다면서 인생을 흔들어 놓은 그들이다. 


무엇보다 처음한발부터 잘못되어져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은 단순히 노동자가 아니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을 노동자라는 개념으로 뭉뚱그려놓은 수많은 사람들중의 하나, 어떤 평균적이고 일반적인 인간으로 만나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구원한다고? 잘생각해보니 들뢰즈가 바로 이러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들뢰즈를 읽고 노동자를 구원하려고 한다. 평화의 설교를 듣고 이말이 전쟁에는 어떻게도움이 되나를 생각하는 식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우리는 모두 변하고 고정되지 않은 존재다. 누구도 누구를 구원할수도 없고 구원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누구를 노동자라느니 뭐니하면서 불쌍한 존재,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고정시킨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쌍한 짓이다. 실은 동정을 받아야 하는 것은 그 노동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그 지식인인지도 모른다.  


도올이 숭산스님이 하버드에서 강론를 했을때 이런 대화를 봤다고 한다. 한 여성이 숭산스님에게 사랑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숭산스님은 거꾸로 그녀에게 사랑이 뭐냐고 되묻고는 잠시후 아무 말없이 이게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 서양여성은 이해를 하지 못하고 말이 없었는데 숭산스님은 덧붙여 이렇게 말했단다. 당신이 묻고 나도 당신에게 묻는다. 이게 사랑이다. 도올은 이 대화를 매우 극찬한다.


그 서양여자는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한 지적인 분석, 지적인 시스템을 기대하며 질문했는데 숭산스님은 실존을 보여준다. 아이스크림이 뭐냐고 묻는 사람에게 하얗고 달콤하고 이러저러하게 생기고 하는 식의 설명을 하는게 아니라 입에 아이스크림을 집어넣는것이다. 


들뢰즈의 노동자되기를 지적인 설명으로 백번천번말한들 핵심은 다르곳에 있다. 누군가를 만나고 그 만남이 진정으로 만나는 것일때 우리는 뭔가를 주고 받는다. 구원이 일어난다면 그것에서 일어난다. 그들은 뭔가를 느낀다. 나도 뭔가를 느낀다. 그들은 스스로 변할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당신의 생활과 태도를 보고 배금주의라는 것에서 벗어날지모른다. 사랑이 뭔지 알게되었을지 모른다. 수많은 노동자중의 한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단하나 존재하는 한 존재로 자신이 지금 당장 해야 할일에 대해 뭔가를 느낄지 모른다. 당신이 어떤 개념으로그들을 만나는게 아니고 실존으로 그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구원한다는 것인가. 구원받은 사람도 없고 구원할수도 없다.  


그런 만남이 없이 개념과 이데올로기와 물질로 도움받는 것도 물론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세상일은 알수가 없어서 거기에는 확신이 없다. 특히 알게모르게 그들을 자유롭게 만드는게 아니라 누군가의 자기자신의 노예로 만들고 정복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일수 있다. 


약자를 도웁시다라던가 권력자와 싸워이깁시다라는 명제를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고상한 철학이 이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 줄것을 기대하며 철학을 읽는 사람은 시간낭비를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도 자기 자신에게도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할것이다. 들뢰즈가 아마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검소하고 절제있는 생활은 자기 철학의 근거가 아니라 결과라고. 즉 욕망, 소비 이런 것은 나쁘다라고 미리 생각해서 그렇게 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약자를 돕자는 생각을 하는한 그수준을 넘어설수가 없다. 약자를 돕는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애초에 돕는 사람도 도움을 받는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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