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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세대, 인디언, 간디와 마틴 루터킹

by 격암(강국진) 2009. 10. 23.

얼마전에 신문에서 Y세대라는 말을 하고 브라보 세대라는 말을 하는 기사를 냈다. 이 세대는 연령적으로 보아 우석훈씨가 88만원세대라고 부르는 세대와 겹치며 Y라는 말은 소위 X세대라는 세대 다음세대라는 뜻으로 붙인 것같다. 그런데 이렇게 세대를 이름붙이고 그 평가를 하면서 싸우는 것을 보니 한가지 중요한 점이 무시되고있는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사람을 합치는 운동과 나누는 운동의 차이점이다. 나는 간디나 마틴루터킹의 비폭력 투쟁은 88만원세대같이 세대를 정의함으로서 계급적 투쟁을 촉발시키는 것과 반대방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치는 계급투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이 글은 간디나 마틴루터킹처럼 비폭력 투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거라면 이미하고 있다. 촛불집회가 그것이 아닌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질감을 강조하고 나누는 지혜와 동질감을 강조하고 합쳐지는 지혜중 결국 종국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후자라는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분류를 통해 계급투쟁 구도를 그리는 막시즘적 그림을 사용하는 진보는 오늘날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통하기 어려울 것이다. 

 

브라보세대니 하는 말보다 88만원 세대라는말이 내용적으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어떤 일군의 사람들의 공통된 조건을 읽어내고 그것을 지적하는 일로서 그것이 폄하되어지고 나쁜 일로 이야기되어서는 안될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에 있어서 그것은 세상을 좋게 만들 방향보다 패배하는 방향쪽으로 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인디언의 예를 들어 보자. 인디언은 유럽사람들에 의해 철저히 학살되었다. 남북아메리카에 걸쳐 7천만은 되었다고 하는 인디언이 거의 다 학살당했다고 하니까 그야말로 엄청난 학살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런 학살에 대해 왜 세계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유럽 사람들은 크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까. 그건 인디언와 유럽사람 사이에 강한 구분의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그 선을 그은 것은 아마도 유럽사람이었을테지만 누가 그었는가 이전에 그 선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선이 그어지면 얼마가지않아 서로간의 차이가 더욱 크게 말해지고 과장되고 서로를 경쟁관계나 위협관계로 인식하기가 매우 쉽다. 서양 카우보이 영화에 보면 늘상 나오는 것이 피에 굶주린 도끼든 인디언이고 인디언을 쏴죽이는 것은 집안의 개를 죽이는 것보다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왜? 그들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어차원에서 인지상정으로 이러는 것이다.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사람들 머릿가죽이 벗기는 그런 일을 당해야 옳다는 말인가?

 

인디언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집단을 정의하는 것처럼 88만원세대라고 어떤 사람들을 세상의 다른 사람과 갈라서 저들을 보라, 저들은 이렇게 저렇게 나쁜 처지다라고 하는 것, 적어도 그것에서 멈춰서는 것은 상황을 좋게 만드는 것보다 더 나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그런 구분은 대개 미움을 만들어 내고 피해의식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결집을 촉구한다. 우리는 착취당하고 있다. 뭘해야 하겠는가. 뭉쳐서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런 구분은 88만원세대안에 드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88만원 세대란 88만원세대를 정의하는 말인 동시에 88만원 세대가 아닌 세대 즉 비 88만원세대도 정의해 준다. 

 

누군가가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 사람월급을 빼돌려서 다른 사람들이 먹어치우고 있다. 물론 월급을 많이 먹은 사람이 있고 적게 해먹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월급을 빼앗긴 사람을 제외한 사람들은 이제 '정의'가 실현된다면 월급을 적건 크건 토해내야 할것이다. 이것은 역풍을 만든다. '인디언이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 인디언은 저런 취급을 받아도 싸다.'는 것이 그것이다. 즉 88만원 세대를 뭉쳐서 격하시키고 그들이 받는 대접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시장논리가 원래 그렇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요즘 애들은 일은 안하고 요구하는게 많은 세대라는 비하일 수도 있다. 88만원 세대가 뭉쳐서 비 88만원세대를 한방치고 다시 한방 맞으면 결국은 어디로 갈까. 어린 세대는 인디언이 아니니까 학살하지 않을거라고? 다들 자기자식만 빼돌리고 젊은 세대를 더욱 철저히 옭아매려고 하지 않을까?

 

여기서 간디와 마틴 루터킹의 비폭력투쟁의 정신을 잘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중요한 것은 단지 비폭력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그 뒤에 있는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투쟁을 하는 것은 내 것을 달라는 것인데 왜 비폭력으로 할까? 상대편이 적이고 악이라면 투쟁해서 말살해야 하지 않는가? 당연히 무장봉기를 통해 영국과 싸워 이겨야 하지 않는가? 간디와 마틴루터킹은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학살당하는 인디언의 역사, 차별당하는 팔레스탄인 사람들의 역사를 반복할 뿐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비폭력을 통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적능력과 자제력을 가진 선의의 인간이며 훌룡한 시민이다. 우리가 다르지 않은데 왜 당신들은 우리를 다르게 하냐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폭력 투쟁의 핵심이다. 

 

모든 국가나 사회는 공동체정신에 의거해서 공동체안에서 같은 사람들에게 같은 대접을 해주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누군가를 학살하고 착취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다르다라는 딱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게 없다면 모든 시민은 모두 불안에 떨 것이다. 누가 잡혀가서 저렇게 비참하게 죽을지 어떻게 알것인가. 인디언을 마구 죽이는 카우보이 옆에서도 백인 아이나 여자는 안심을 한다. 왜냐면 그들은 인디언이 아니므로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도 기성세대의 한사람으로 88만원 세대의 아픔에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하지만 단순히 피해의식으로 사회에 대든다던가 우리는 더 힘들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기성세대를 미워하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책임을 씌우는 것으로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들중에 자기 세대의 아픔이 없는 세대는 하나도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자기 밑의 세대가 복받았다고 생각한다. 

 

88만원세대가 뭉쳐서 해야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시민으로서 인간으로서의 훌룡함을 나타내는 일이 아닐까. 먹고살기도 힘든데 나가서 돌이나 던지고 행진이나 한번 하라면 하겠지만 좋은 일하기 같은 것에 지속적으로 참여해라같은 말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저놈들이 나쁘다. 저놈들때문에 니들이 고생한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박수쳐주는게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과연 진짜 승리로 가는 쪽이 어느쪽인지. 

 

'시민으로서 인간으로서의 훌룡함을 나타내는 일'이 뭔지는 각자생각해 봐야 할것이며 내가 여기에 줄줄이 쓸 수는 없다. 그러나 대충 2가지로 분류는 할수있지 않을까. 하나는 소위 착한일이다. 이웃을 돕고 서로 돕는 일이다. 두번째는 투쟁이다. 386이 우리사회에서 대접받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그들이 한국정치를 뒤집을 정도의 참여정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이 없었다면 386세대는 훨씬 낮게 평가받았을 것이며 자기몫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과와 실력을 보여야 댓가를 받는것은 언제나 진리다. 요즘 88만원세대도 촛불집회같은 것에 많이 참여해서 그런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비폭력투쟁이라는것이 특히 좋다. 절제를 보여준다는 것은 바로 시민과 인간으로서의 훌룡함을 보여주는 일이다. 

 

결국 88만원세대가 주도하는 문화운동이 있어야 한다. 자신들의 메세지를 사회에 퍼뜨리고 자신들의 입장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런 음악, 그런 그림, 그런 시와 소설과 책 그런 문화행사가 있어야 한다. 계급간의 투쟁이라는 구도를 넘어서는 견해를 보여주는 시선에 대해 학습하고 발굴하여 선전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문방송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주로 나누는 투쟁에 많은 시선을 보낸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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