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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도 진보는 막시즘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by 격암(강국진) 2009. 11. 17.
머릿말

한국에서 보수를 말하는 정치인들은 뻔뻔하기 짝이 없다면 진보를 말하는 사회운동가나 지식인들은 대부분 막시즘적인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즉 그들은 선과 악의 선을 긋는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아픔은 저 악의 세력때문이며 선의 세력이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면 좋은 세상이 올거라고 말한다. 

이러한 선긋기는 대개 경제수준이나 고용형태에 따라서 나뉘어지는데 즉 노동자와 자본가, 서민층과 경제기득권층 이런 식의 구분을 하고 이 구분에 근거하여 현정부를 비판하고 여러가지 사회적 아픔을 설명한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용산 참사같은 것을 언급하면서 이런 것에 무관심한 저 기득권층을 무찌르자. 저소득층이나 노동자들, 여자들이 합치면 해낼수 있다. 뭐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이다. 

엉터리 진보적 주장들에 대한 비판

위에서 말한 선긋기와 그로 인한 선악구분으로 세상을 바꿀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이런것으로는 좋은 세상이 올수 없으며 오히려 힘든 사람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뿐이다. 이길수도 없으며 싸우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을 서로 싸우게 만든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교통사고를 내는 사람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저런 사람들을 무찌르고 사회에서 매장하면 교통사고 없는 좋은 세상이 올거라는 말은 사실일까? 일정부분은 사실이다. 분명 부주의하게 운전하는 사람, 술먹고 운전하는 사람은 처벌받아야 하고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몰아내고 나면 교통사고 없는 세상이 올까? 그런 식으로 교통사고를 줄이는데 한계가 있지는 않을까? 선과 악의 구도에 몰두하다보면 보다 중요한 것을 잊게 되기 쉽다. 왜 우리는 자동차 사용을 모든 곳에서 허용하는가, 왜 교통신호체계가 이모양인가,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을 돕는 보험체계는 어때야 하는가를 논하는 것이 억눌러진다. 

한국에서 돈가진 사람들을 기득권으로 규정하고 돈없는 사람들이 돈가진 사람을 정치적으로 이겨내자는 발상따위를 한다면 승리는 거의 불가능하다. 현재도 그렇지만 빈부격차가 커지는 미래에는 경제적 상위 10%나 5%만 똘똘 뭉쳐도 도저히 그 연합을 나머지가 이길수가 없다. 그런데 돈가진 사람을 적으로 보는 그 선긋기는 오히려 돈가진 사람끼리 뭉치게 만든다. 

저 사악한 기득권층때문에 우리가 살기 힘들다고 말하고 나면 통쾌하지만 바로 그런 표현, 그런 선긋기때문에 부자동네에서는 가진 것없는 사람들은 우리가 좀 느슨하게 해주면 우리걸 다 훔쳐가려는 빨갱이라는 허무맹랑한 말들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래서 부자들은 전부 함께 뭉쳐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는 결코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회가 아니다. 현재의 부자들은 너무 행복하니까 그들을 좀 불행하게 만들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자는 것이 비전이 될수가 없다. 모두가 더 행복해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 될뿐이다. 

자동차사고의 예에서 보았듯이 우리가 고개를 돌려야 할것은 시스템이다. 물론 모두가 시스템을 말한다. 교육개혁을 말하는 사람은 교육시스템을 말하고 소득분배나 조세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그런 분배시스템을 말한다. 

그러나 그런 표면적인 것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우리가 발전할수 있는 한계는 이미 도달했다. 우리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루었고 해방후 최대빈민국에서 이정도 행복한 나라를 만들었다. 죽겠다고 야단이라지만 해방이후으 혼란상에서 발전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발전했다. 그런 표면적 시스템을 뜯어고쳐서 말이다. 그러나 그게 한계에 도달했다. 그게 문제다. 

대안은 있는가. 

대안은 있다. 다만 대안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선입견때문에 사람들은 그 대안을 알아듣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같다. 한나라당을 쳐부시면, 이명박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몰아내면 좋은 세상이 온다는 주장은 아주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진짜 대안은 그보다 더 미묘한 것이다. 더 침착하고 참을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단순하게 말하면 배금주의 이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고 그보다 더 깊고 크게 말하면 기본적 가치 판단을 내릴수 있는 능력이 혼란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너머에는 세상을 보는 형이상학의 문제가 있다. 

나는 대안을 한줄로 짮게 쓸수가 없다. 책한권으로도 정확히 쓸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면 세상을 정의하고 기계적으로 분석하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그 대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일단 사물에, 모든 사람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대해 이러저러하다는 생각, 즉 자신이 그것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그것의 전부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철학책을 보면 어디나 나오는 말이며 굳이 철학책을 보지 않아도 우리는 무한한 사실들에서 일부를 취하고 다시 개념화를 하고 이름을 붙여서 사실의 일부만을 알고 보고 느낄 뿐이다. 한그루의 나무, 한 아이 어떤 것도 우리는 아주 일부만을 안다. 그 뒤에는 무한한 미지의 신비가 있다. 

두번째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수학공식은 정해진 가정위에서 언제나 진리이고 산이나 강은 아주 천천히 변하지만 세상모든 것은 그보다 빨리 확실히 변하고 있으며 그것은 사람도 우리 자신도 예외가 이니다. 

여기에 신경이 미치면 우리는 사물에 대해 겸허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르니까 그렇다. 과거의 그것도, 현재의 그것도 미래의 그것도 우리는 모른다. 모르니까 겸허해 질수 밖에 없다. 나를 모르고 상대방을 모르는데 청수부아주머니는 나보다 아래고 사장님은 위라는 생각이 말이 되는가. 나무와 산과 강에 대해 겸허해 져야 하지 않을까? 

이 대안은 쓰자면 무한대로 쓸수 있지만 그래봐야 소용은 없다. 중요한것은 체험하는 것이다. 철학은 이해하는게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길가의 코스모스와 소통하는 느낌, 그래서 그것을 함부로 꺽어버릴수 없다는 느낌을 느끼는 것은 논리로 하는게 아니다. 그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정확히 같다. 세상과 사랑에 빠지고 사람들이 만들어 내온 개념과 문명은 중요한 것이지만 도구라는 사실을 느껴야 한다. 자신이 아는 세상, 물질적인 세상을 등지는게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도 소중히 여길수 있어야 한다. 다만 그너머를 봐야 한다. 이때문에 나는 환경문제와 참선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쓴적이 있다. 자연은 보호할 약자거나 아껴서 쓸 자원이 아니다. 자연과 소통하는 느낌이 없으면 환경문제의 진전은 없을 것이다. 

일단 이 느낌을 체험하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것은 느껴서 공부하고 실천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세상일에 모두 관여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책을 읽어야 하는가. 어떤 말을 나눠야 하는가는 바로 앞에서 말한 이 느낌이 인도해 주는 것이다. 그 바탕위에서 진보적 운동이 이뤄져야 한다. 

서양철학에 대한 언급

철학에는 비약이 필요하고 말을 넘어서는 곳에 진실이 있다는 말은 미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한말이며 우리나라 전래의 고전에 불경에 두루 나오는 말이다. 

내가 쓴것을 굳이 한줄로 쓰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라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물론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많은 선입견이 얽혀있다. 들뢰즈의 철학에 대한 해설서를 본적이 있는데 비슷한 것을 무엇무엇되기의 철학이라고 거기서는 표현하고 있었다. 

내글을 이해하는 데는 화이트헤드나 들뢰즈를 알필요가 없는데도 내가 굳이 화이트헤드나 들뢰즈를 언급하는 것은 나의 학식을 자랑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나는 그들의 철학에 대해 전문적이지 않다. 단지 이런 종류의 말에 붙는 선입견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형이상학적 이야기를 엉터리 무당의 이야기나 득도했다는 도사의 이야기같은 것으로 오해한다. 그들은 어서빨리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법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를 말해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어떠한가, 자신들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는가는 관념적이라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본다. 

나는 위에서 화이트헤드를 언급했는데 그가 뉴톤에 대해 언급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확인하는재미있는 예가 된다. 과학은 고대에서 부터 있었는데 근대과학의 아버지라고 할 뉴톤시대에 그 발전속력에 커다란 변화가 일었다. 그 변화는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이글은 과학발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므로 관련된 일부만 이야기하면 그변화의 중대한 한부분은 분류에서 측정으로 사고방식이 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색으로 말하면 흑과 백을 이야기하다가 그레이 스케일 즉 회색의 정도를 수치로 말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과학에는 정량화가 없었다. 그런데 뉴톤이후 과학은 세상 사물의 시간에 대한 변화를 수치적으로 예측하고 설명하는 일이 되었다. 즉 그리스 시대에는 물건을 던지면 왜 올라갔다가 떨어지는가 하는 식으로 생각을 했다면 뉴톤은 물건이 날아가는 괘적을 시간의 함수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뉴톤이전의 사람들은 말하자면 흑백논리에 익숙했을 것이다. 세상 여자들을 예쁜 여자와 못생긴 여자 두개로 나눈다. 체형을 뚱뚱한 사람과 마른 사람 둘로 나눈다. 정량화한 논리란 이런 것이다. 몸무게와 키를 아예 말하거나 제일 예쁜 사람을 백점, 제일 못생긴 사람을 빵점으로 했을때 저여자는 65점 이런 식이다. 

흑백논리건 계량화건 다 인간이 만들어 낸것이지만 이 차이는 사실 엄청나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얼마나 세상을 단순하게 보는가. 나는 흑백논리에 의거해서 사고를 진전시켜 나가지 않는가.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 사실은 이렇다. 한국은 과학혁명이 사회에 미친 영향이 작아서 그 사고가 뉴톤 이전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많은 분규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이런 예를 든것은 세상이전에 자기 머리에 든것이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강을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두사람이 앉아서 수치와 논리로 밤을 세우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더구나 그들의 머리에 들어있는 논리나 사고방식이 흑백론의 단순한 것이라면 대화는 금방 어딘지 알수 없는 곳으로 가고 만다. 

맺는말

우리는 모두, 적어도 대부분은 살면서 아픔을 겪는다. 아픔을 겪을때 인간은 습관적으로 그원인을 찾는다. 그 원인에 대해 너무 속단을 해서 남에게 이것은 저것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누굴 돕는 일도 아니고 자신을 돕는 일도 아니다. 

유교경전에도 뭔가를 이루고 싶으면 일단 정지하라고 했다. 중용의 중은 희노애락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라고 했다. 서양 윤리의 기본이 되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기도라는 것일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기도는 옆사람에게 무슨 부탁하듯 하는게 아니다. 마음의 평정을 찾으면 그마음에서 저절로 솟아오르는 답이 있다. 그걸 찾는 것이다. 

세상을 쪼개서 선과 악을 만들고 미움을 만들어 저것만 없어지면 다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아파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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