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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가치판단에 대하여

연작 에세이 5 : 합리적 사고의 기초

by 격암(강국진) 2009. 11. 23.

머릿말

 

우리가 꿈에서 건물을 보고 바다를 보고 사람들을 만났다고 하자.  우리가 그 꿈에서 깨어 났을 때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 꿈속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만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뭘 봤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꿈에서 깨어나 보면 그 누군가라던가 우리가 본 풍경도 다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들은 우리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꿈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만든 세계속에 있었다. 우리의 기억과 생각이 그 꿈속의 세계를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잠이 들지 않은 지금 우리는 어떤 세계 속에 있는가? 그 세계도 그저 객관적으로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일 수는 없다. 우리가 매일 매시간을 사는 이 세계란 결국 우리가 이해한 대로의 세계, 우리가 인식한 세계이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잠을 자지 않을 때도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계는 우리의 기억과 생각의 방식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벽돌로 만들어진 집과 같은 것이라면 이 집은 인간이 나타나기전부터 객관적으로 존재해온 그런 집이 아니다. 그 집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집을 잘 만들었을까?

 

합리적 사고의 시작

 

합리적 사고의 시작은 언어에 있고 언어의 시작은 사물이나 행동에 이름을 주는 것에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고양이라고 부르고 어떤 것은 꽃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어떤 행동은 먹는다라고 하고 어떤 행동은 달린다라고 한다. 이렇게 사물과 행동을 분류하고 그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사고를 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일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사물에 정의를 주는 일이고 사물의 본질을 따지는 것이다. 즉 말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다. 체계적인 사고의 기본이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뭔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렇게 뭐뭐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하는 일이 많다. 우리는 요즘도 종종 먼저 장사란 무엇인가라던가 결혼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런 단어들의 뜻을 분명히 한 후에 그에 기초해서 하고 싶은 말들을 전개해 나가곤 한다. 

 

이러한 태도를 철학자 칼 포퍼는 본질주의라고 불렀다. 본질주의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직관에 의해 알아 낼 수 있고 그에 적당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 본질을 알아내는 것이 우리의 사고와 지식의 목적이다. 본질주의자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플라톤인데 그는 사물들의 본질적 형태를 이데아라고 부르고 우리가 보는 현실은 그 이데아로 이뤄진 세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잘 발달된 언어는 인간이 후천적으로 배운 것이라는 점에서 비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은 본래 방대한 지식을 처리하도록 진화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하기 이전에, 그리고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한 후에도 수십만년전동안 인간은 그저 작은 무리속에서, 비교적 변하지 않는 환경 안에서 살아왔다. 인간은 도시에서 살고 직원들을 둔 회사의 사장이 하는 결정을 하면서 진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타고난 유전적 기초는 현대사회처럼 복잡하고 빨리 변하는 환경에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많은 지식을 다뤄야 하는 상황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발달된 하나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자연상태 그대로의 인간을 인위적으로 문명인으로 만드는 행위다. 이것은 마치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자연 그대로의 인간에게 날개를 달아 하늘을 날게 하는 것과 같다. 발달된 언어의 학습이 없이 인간은 체계적 사고를 할 수 없고 타고난 유전적 경향대로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인간은 문명사회의 윤리나 법규따위는 모르는 야생짐승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런 문명적이고 인위적인 지식을 배운 적이 없는 인간을 순수한 인간이라고 부를 때 나는 언어를 학습한 인간 특히 쓰기가 발달한 이후에 문명화된 인간을 사이보그라고 부르곤 한다. 이 문명화된 인간이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그가 언어라는 사고의 뼈대를 주입받았기 때문이다. 그 뼈대가 우리를 침팬지같은 짐승 이상의 존재로 만든다. 언어를 익히는 것은 그 언어가 발달된 이래 축적되어온 엄청난 양의 지식을 우리의 몸에 주입하는 것이다. 

 

당연히 사물을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는 일에 반드시 한가지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와 프랑스어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이런 의미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사고를 하는데 있어서 아주 기초적으로 다른 방식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찌기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이때문에 하나 이상의 언어를 익히는 것이 교육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알 때 우리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의 사고는 더 깊어질 것이다. 

 

인간의 심리적 오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어를 배우는 것만으로 우리가 충분히 합리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벽돌같은 튼튼한 자재가 없다면 집을 짓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겠지만 벽돌이 있다고 해도 그 자체가 집인 것은 아니고 벽돌로 지은 집도 잘못지으면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인간의 유전적 한계와 본능은 언어를 습득한 것만으로 전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심리적 오류를 범하고 수없이 많은 근거없는 편견들을 만들어 낸다. 사람은 패턴을 찾아내는데 매우 우수하다. 너무 우수한 나머지 있지도 않은 패턴을 찾아낸다. 설사 과학적 통계적 증거가 있어도 무슨 불치병처럼 어떤 믿음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혈액형과 성격이 관련되어져 있다는 주장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 없다. AB은 사교관계에 서툴고 o형은 박애주의자라는 식이다.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는 성격이 다르다거나 가르마를 오른쪽으로 타는 사람과 왼쪽으로 타는 사람이 성격이 다르다는 믿음도 여전히 믿는 사람들이 있다. 

 

 커다란 사무실에서 그저 우연히 왼편에 앉은 사람과 오른편에 앉은 사람을 나눠도 그 두 집단은 뭔가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많은 집에서는 홀수번째로 태어난 아이들과 짝수번째로 태어난 아이들은 서로 다르다는 믿음이 쉽게 생긴다. 말띠 처녀가 어떻다는 둥 띠가 서로 궁합이 맞아야 한다는 둥하는 이야기도 있고 서양에서는 점성술은 여전히 대단한 인기라서 신문들이 날마다 별자리에 기반한 운세를 싣는다.

 

근거없는 믿음은 일반인들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과학자들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19세기에는 성격이 두개골의 모양과 관련이 있다는 골상학이란 것이 유행을 했다. 이것은 두뇌의 특정 부분을 많이 쓰면 그 부분이 발달해서 용기나 양심 같은 것을 머리 모양에서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가짜과학이다. 그때는 이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두개골이 분류되고 연구되고 두개골의 여러가지 부분들에 이름이 붙여졌다. 20세기 들어와서 골상학은 더이상 과학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19세기에는 상당히 유명했던 탓으로 많은 신경과학책의 서두에서 흥미를 주기 위해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선입견은 쉽게 만들어 지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선입견때문에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게 된다. 앞에서 말한 본질주의적 접근에 의해 뭐뭐는 이렇다라고 정하고 나면 그 정의가 애초에 틀렸어도 혹은 한때는 유용한 개념이었어도 이제는 세상이 변해서 그런 말들이 지금의 세계와 맞지 않게 된 후에도 우리의 사고는 낡은 시스템에서 떠날 수가 없게 된다. 우리는 그런 생각들이 엉터리라는 명백한 증거가 눈앞에 있어도 그걸 볼 수 없는 장애인이 된다. 

 

우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들

 

세상에서 우리의 생각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다시 우리의 생각을 강화한다. 이런 일의 좋은 예는 유태인과 팔레스타인간의 분쟁같은 민족 분쟁이다. 이런 분쟁에서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들이 증언하는 바에는 항상 공통점이 있다. 서로 똑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가 엄청나게 다르다고 말하면서 누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는가 하는 분류에 따라 죽고 사는 문제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유태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은 팔레스타인 사람의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유태인은 화성인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토성인인 것은 아니다. 유태인은 수 천 년간 유럽을 떠돌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수천 년을 살았다. 2천 년전의 조상 운운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사실상 그 지역에 살았던 2 천 년 전의 조상의 피는 양쪽 모두에 존재한다. 

 

그러나 일단 사람들은 선을 긋는다. 이 사람들은 유태인 저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사람. 그리고 나면 우리와 저들은 달라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 다르다라는 생각은 차별을 만들어 낸다. 유태인은 종종 유태인에게 잘 해주고 팔레스타인 사람은 이방인처럼 대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차별은 싸움을 만든다. 싸움은 원한을 누적시킨다. 원한은 다시 차이를 더 크게 만든다. 그러다가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저들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않으면 저 사람들이 우리를 죽일 것이다. 이런 태도는 우려하던 일을 실제로 만들어 낸다. 어린 아이들이 총칼을 들고 폭탄을 짊어진다. 분류하는 사고, 본질주의적인 사고는 이데올로기 중독을 만들고 실제로 사람들을 죽인다.  

 

비슷한 일은 세상에 수도 없이 반복되어 왔다. 우선 우리는 편을 가른다. 그리고 나면 그 양편은 서로 다른 것이 되고 그 각각의 집단 내부는 서로 똑같은 존재들이 된다. 

 

젊은 세대들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도 지역감정이라는게 있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전라도 사람들/경상도 사람들은 모두 똑같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는 서로 다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좌파/보수는 모두 똑같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서로 다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노동자/자본가는 모두 똑같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남자/여자는 모두 똑같다.)

 

동물과 인간은 서로 다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동물/인간은 모두 똑같다.)

 

일단 어떤 관념과 생각들이 정착이 되고 나면 우리는 그것이 그저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일 뿐인지 아니면 그것이 엄연히 태양이나 달처럼 존재하는 객관적 현실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특히 일단 그것이 한 집단의 믿음이 되고나면 그걸 바꾸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인간 사회의 비극은 종종 이 생각을 고칠 수가 없어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한국이 처한 상황은 특히 나쁘다. 식민시대를 거친 한국은 학문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지도 않은 관념의 체계를 가져다가 그걸 조악하게 번역했다. 그러니 우리의 머리를 채우는 관념들의 체계가 얼마나 허술 하겠는가. 보수를 자칭하는 몇몇 사람은 진보는 빨갱이라는 말로 정리해 버린다. 몇몇 사람들은 자기나름으로 진보보수를 정리하고 무슨 연극 공연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진보할테니 너는 보수를 맡아라. 그런데 너는 보수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말하던 한 사람은 언젠가 내게 진보주의자란 도덕적으로 우위에 서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해 준적이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당연히 진보는 선 보수는 악이다. 이렇게 세상을 보면 보수들은 그 정의상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것이 당연하다. 이런 식으로 보수를 정의하면서 저 보수들은 왜 저렇게 파렴치하냐고 묻는다는 것은 괴상한 일이 아닐까. 게다가 사실은 반대여야 하는거 아닐까? 진보는 기존 질서, 기존 윤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던가? 기존 윤리에 따르면, 즉 보수적 윤리에 따르면 진보가 윤리성이 떨어지고 보수가 더 윤리적이어야 옳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말장난들은 거의 쓸모가 없다. 하지만 이 세상을 이해해보고자 독서를 해본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들의 홍수속에서 당황한다. 대부분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바보가 되는 것같고 판단이 멍청해지는 것도 같으며 판단장애에 빠져드는 것같다. 거대한 분류 시스템속에서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책이 함정같다. 

 

현대 과학이 만들어진 방법  

 

그렇다면 분류를 피하면서 세상을 구성하는 전혀 다른 방식도 있을까? 세상에 대한 수 많은 지식을 다룰 새로운 방법도 있을까? 있다면 그런 방법은 인간 사고의 합리성을 한단계 크게 향상시키지 않을까? 

 

그런 방법은 있다. 그리고 사실 그 방법은 이미 널리 쓰이고 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는 <과학과 현대사회>에서 17세기이래 서구에서 근대과학을 만들어 낸 혁신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즉 과학혁명기의 사람들은 사물을 분류하는 걸 멈추고 측정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게 과학혁명의 핵심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을 끝없는 목록을 써서 분류하고 또 분류했다. 서양의 주류적 사고도 현대과학을 탄생시킨 과학혁명의 시기에 도달하기까지 오랜동안 이런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갈릴레오와 뉴튼의 시대에 놀라운 태도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계량화다. 

 

계량화란 주어진 문제와 관련되어 측정할 수 있는 양들을 찾고 그런 양들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속력이나 가속력, 무게, 힘등, 측정가능한 양들을 정의하고 그런 양들이 어떻게 서로 수학적 연관성을 가지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과학의 폭발적 발전을 낳았다. 

 

계량화는 왜 단순한 분류를 거부하는가? 새로운 과학은 본질주의적 접근과 뭐가 다른가? 계량화를 하면 숫자가 등장하고 수학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동쪽과 서쪽이라고 말하는 대신 기준점에서 서쪽으로 10미터 지점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동쪽과 서쪽이라는 두개의 지역을 가지는 대신 연속되는 수많은 위치들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뚱뚱한 사람과 마른 사람으로 분류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을 가지게 되는 대신에 그들의 몸무게가 측정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가지게 된다. 부유층, 중산층, 빈곤층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소득분포를 가지게 되는데 이 분포는 사람수가 많을 때 거의 연속적인 모습을 가진다. 

 

계량화는 종종 분류에 따른 이름을 사라지게 만든다. 일상어를 기반으로 전개되던 논리는 이제 수학적 도구를 통과해서 전개 된다. 언뜻 생각하기에 대단치 않은 이 변화는 일상언어의 한계를 초월해서 세상에 대한 지식들을 다룰 수 있게 해준다. 수학은 일상어보다 더 엄밀하고 더 추상적인 언어다. 그래서 더 많은 지식을 더 엄밀하게 다룰 수 있다. 좋은 예는 뉴튼의 운동법칙과 중력법칙들이다. 이 세상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현상들이 뉴튼의 운동법칙과 중력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법칙들은 수학적 표현이 지극히 단순하다. 게다가 지극히 엄밀해서 우리는 실험을 통해 우리의 과학적 이론들이 옳고 틀린 것을 비교적 쉽게 판정할 수 있다. 포퍼는 이것을 과학의 반증가능성이라고 불렀으며 과학인 것과 과학이 아닌 것을 말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이제 우리는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을 통해, 더 정확히는 이 계량화를 통해 우리는 합리성의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모든 일에서 계량화가 가능한 것도 성공적인 것도 아니다. 많은 일상생활속의 사고는 수천년전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게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학문분야는 물리학을 본받아 계량화를 시도하고 있고 있다.

 

흑백 논리와 백분율 논리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리의 일상속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이런 계량화의 한가지 예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치고 싶다. 누군가를 가르켜 뚱뚱하다 그렇지 않다라고 부르는 일을 우리는 종종 많이 한다. 하지만 어디서 어디까지가 뚱뚱한 것일까? 75kg을 조금 넘지 않으면 괜찮다가 75kg을 조금 넘으면 갑자기 뚱뚱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

 

착한 사람, 상냥한 사람, 예쁜 여자, 지적인 남자, 키가 큰 사람 등 우리는 이런 이분법을 무수히 일상적으로 쓴다. 그런데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는 양편을 가르고 일단 한쪽편으로 분류되면 다 똑같은 것으로 잠재적으로 취급한다. 따라서 소매치기나 살인범이나 범죄자라는 점에서는 똑같은 것이고 3천원을 훔치나 3천억을 훔치나 훔친 건 훔친거라고 말하곤한다. 우리는 말의 애매함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감정이 개입되거나 어떤 파벌로 갈라지게 되는 경우 이런 애매함은 적극적으로 악용되어 사람들의 판단과 주장은 금새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하루는 우리 아이들이 가볍게 싸웠다. 막내가 큰 딸아이를 놀렸다는 것이다. 딸아이는 나에게 막내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않냐고 묻는다. 물론 놀리는 말은 하면 안 된다. 하지만 그 날은 다른 일로 생각하던 것이 있어서 내가 물었다. 

 

"너는 막내가 0에서 100까지 점수를 매겼을 때 얼마나 잘못했다고 생각하니?" 

 

0은 잘한 것이고 100은 매우 잘못한 것이다. 답은 60이었다. 즉 그 아이도 잘못은 잘못이지만 그게 그리 엄청난 잘못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싸움이 나는 이유는 아이들이 흑백논리로 싸우기 때문이다. 잘못이냐 아니냐로 싸운다. 0이냐 100이냐로 싸우는 것이다. 막내는 그런 정도의 말을 굳이 아빠한테까지 가서 이르는 누나가 너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싸움은 이유없이 커진다. 

 

억울함이나 분규는 종종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보기 때문에 만들어 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세상을 숫자로 보는가. 이런 걸 백분율 논리라고 할 때 우리는 흑백 논리를 주로 쓰는가 백분율 논리를 주로 쓰는가. 누가 맛있어 맛없어라고 하는 대신 이건 80점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가 괴상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대충 말하고 대충 소통하기 때문에 있지도 않은 오해가 생겨난다. 선을 맘대로 그을 때마다 너무 억울하게 느끼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서도 이렇게 사고나 평가에 있어서 숫자를 도입하는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이 때로 성공적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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