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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가치판단에 대하여

연작 에세이 4 : 인격적 상징의 힘

by 격암(강국진) 2009. 11. 20.

가치판단에 있어서 임기응변의 능력내지 일반화의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우리가 주어진 메뉴얼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그런데 그 이유는 모두의 삶은 서로 다르고 우리는 엄밀하게 따지면 매일 매일 전과는 다른 상황에 놓여지기 때문이다. 정말로 정확한 메뉴얼만 가지고 판단과 선택을 해나갈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항상 임기응변과 일반화가 필요하다. 

 

정확한 지식에만 근거해서 행동하려고 하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현대의 교육은 불행히 고지식한 사람들을 양산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면 학교는 지식들을 가르치며 그 지식들이면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기 때문이다. 초중고과정만 해도 12년인데 그 기간동안 학생들이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을 외우고 시험에서 그걸 써서 답을 제출하는 것이다. 여기에 임기응변과 일반화가 개입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교과서에 나온대로 똑같이 답하면 정답이 된다. 교과서에 없는 걸 시험에 내면 학생들은 그런 걸 배운 적이 없다고 크게 항의한다. 평가가 없는 글쓰기처럼 그저 이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라는 것은 이런 교육과정 속에서 종종 시간낭비로 여겨진다. 교육의 단기적 목표는 평가를 잘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바깥의 현실세계는 시험지와는 다르다. 애초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뭘 해야 할지에 대한 정답이 써있는 교과서나 메뉴얼 따위는 없다. 우리가 일부러 명령을 받는 어떤 시스템에 스스로를 속박시키기 전에는, 그래서 남의 명령을 정답이라고 믿으며 살게 되기 전에는 현실에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정답을 알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환경에서 고지식한 사람들은 고장난 컴퓨터 처럼 행동한다. 이전에 만나보지 못한 상황과 부딪혔을 때 일반화의 능력이 없는 그들은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서 반응이 느려지거나 터무니 없는 행동을 한다.  

 

그렇다면 이 일반화의 능력이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경험과 데이터 속에서 규칙을 찾아냄으로써 생긴다. 그 안에 있는 내적인 구조를 찾아냄으로써 생긴다. 인공지능 분야의 예를 들어 말하자면 규칙을 찾기 이전의 지식이란 기계학습을 하기 전의 데이터와 같다. 데이터 그 자체는 지능을 보일 수 없다. 우리는 그 데이터를 제한된 내부 구조를 가진 학습기계로 설명해 내려고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규칙을 찾는 과정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일반화 능력이 생기고 그래서 전에 없던 새로운 상황이 되어도 어느 정도 합리적인 판단이 나올 수 있게 된다. 

 

상식이나 문화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지침이라고 할 때 그들은 그래서 단순한 지식의 누적일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하고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한다는 식의 메뉴얼화로는 상식이나 문화는 쓸모가 없다. 과거의 경험들이 모두 유실되어 사라지고 없는 것보다는 좋겠지만 이 경험들이 단순히 누적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문화가 되고 상식이 될 수 없다. 그들은 규칙과 내적인 구조로 통합되어져야 한다. 그 지식들은 특정한 모델의 형태로 압축되고 단순화되어야 한다. 인격화되고 이야기의 형태로 만들어 져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은 우리의 일상속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우리들이 가지는 최초의 중요한 인격적 모델은 대개 부모다. 우리는 부모를 관찰하고 그들의 행동을 학습한다. 그렇게 해서 매순간 부모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자연스레 행동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물론 성장에 따라 우리의 삶은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게 되고 우리의 인격적 모델은 부모 이상의 보편성을 가지는 것으로 교체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일 수도 있고 나아가 어떤 위대한 영웅이나 종교적 지도자일 수도 있게 된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일본에 대한 고전적 소개서다. 이 책에서 루스 베니딕트는 충, 효, 의리, 인, 인정 같은 것들을 일본의 덕으로 꼽는데 그녀가 이것들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모습을 가장 잘 표현준다고 하면서 소개하고 있는 것이 47낭인의 이야기다. 말하자면 일본인이란 누구인가, 진정한 사무라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것이 이 47낭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47낭인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어느날 47명의 낭인이 모시고 있던 영주가 모욕을 당하고 죽는다. 낭인들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 의리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 경우 이 영주에 대한 의리라는 의무는 쇼균에 대한 충성과 충돌하고 있었다. 47인의 낭인은 이 충성과 의리의 상충된 요구를 모두 지키기 위해 의리에 따라 원수를 갚고 불충에 사죄하기 위해서 모두 자결을 하고 만다. 그들은 이 복수를 위해 그들의 개인의 명예를 희생함은 물론 그들의 아내를 져버리고 여동생을 희생시키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사람들간의 은원이 모든 이야기의 초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핵심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누가가 어떤 의리를, 특히 상하간의 은원를 얼마나 열심히 지키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목숨 이상의 것을 내놓고 그것을 지켜낸 47인의 낭인은 진정한 영웅, 진정한 사무라이로 찬양된다. 우리가 이런 관점을 택할 때 만약 세상이 혼잡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의리와 충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느껴진다. 사람들이 은혜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엉망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사무라이라는 가상 인격체 혹은 문화적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가 어떤 선택의 순간에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사무라이라면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그 47명의 낭인이라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그들이라면 먼저 사람들간의 은혜를 따질 것이다. 이렇게 인격적 모델을 가진 문화속의 이야기는 일반화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가치판단에 지침을 제공한다. 

 

물론 이런 인격적 상징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라마다 다르게 존재한다. 이번에는 장조가 지은 <유몽영>의 몇 구절을 인용해 보자. 장조는 중국 청나라 초기의 사람으로 <유몽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살면서 그때 그때 생각나는 것을 적어놓은 소품집이다. 

 

“태평한 세상을 만나 호수와 산이 있는 고장에 나서 관장은 청렴하면서 고요하고 집안 살림은 넉넉하며 아내는 현숙하고 자식은 총명하고 지혜롭다. 인생이 이와 같다면 온전한 복이라고 할 만하다.”

 

“매화는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난초는 사람을 그윽하게 하며 국화는 사람을 소박하게 하고 연꽃은 사람을 담백하게 한다. 봄 해당화는 사람을 요염하게 하고 모란은 사람을 호방하게 하며, 파초와 대나무는 사람을 운치있게 하고 가을 해당화는 사람을 어여쁘게 한다. 소나무는 사람을 빼어나게 하고 오동은 사람을 해맑게 하며 버들은 사람에게 느낌을 갖게끔 한다.”

 

노장사상에 심취한 듯한 이 중국의 남자가 달밤에 달구경을 하면서 술을 한 잔하는 광경을 떠올려 보라. 그는 집 앞에 심은 나무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국화를 구경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동네의 동산에 올라 동내풍경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때까지 마시지 않고 안주가 적다고 불평도 하지 않는다. 왠지 그럴 것 같지 않은가? 이 사람이 마구 폭식하고 다이어트 하느라 고생할까? 동네의 터를 몽땅 헐어서 커다란 고층아파트로 동네를 다 채우자고 할까? 

 

우리는 이런 수필집을 통해 혹은 위인전을 통하고 완전히 허구적인 영웅담을 통해서 어떤 인격상을 우리에게 주입한다. 그리고 이렇게 습득된 모델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것을 가치있게 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지침을 준다. 당신이 간디에 열광하는 사람이라면 딱딱한 철학책을 읽고 그 논리를 생각해 보는 것보다 간디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쪽이 당신이 어려운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강력한 도움을 줄  것이다. 

 

문화에서 영웅이나 위인같은 어떤 인격적 상징이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징이 인간의 형태를 띄고 있을 때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런 상징은 더 쉽게 대중화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겪은 가장 큰 장애중의 하나가 바로 이 인격적 모델이 조선의 패망과 일제시대를 겪으며 심각하게 훼손되고 발전이 멈췄다는 점이다. 일제의 침략이란 문화적인 의미에서 보면 사무라이가 선비를 죽이고 조선사람도 모두 사무라이를 본받으며 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일제의 침략은 끝이 나고 우리는 해방을 맞이한지 70년이 넘었지만 한번 죽은 인격적 모델은 또렷히 부활하지 못했다. 우리는 사무라이가 될 수 없고 또 미국의 개척자나 영국의 신사가 될 수 없다. 되려고 해도 그들의 역사적 지리적 환경은 우리와 다르므로 그런 모델은 우리에게 명확한 지침을 내려주지 못한다. 

 

일제는 끝났지만 식민사관은 그대로 남아 우리의 과거에 대한 부정은 계속되었다. 조선시대에 발전시킨 인격적 모델은 선비라고 불리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발전적으로 수용하기 보다는 그것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단절되어져 있다. 아마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 살았던 플라톤이나 시저의 글을 읽어본 한국 사람이 조선시대의 이황, 이이의 글을 읽어본 한국사람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문화적으로 몽테뉴같은 유럽사람보다 정약용이 더 낯선 한국인이 더 많을 것이다. 세종대왕을 긍정하는 것이 반드시 모든 것을 세종이 했던 것처럼 한다는 뜻은 아닐텐데도 우리는 유교에 대한 저항때문에 조선 전체를 부정하는 정서에 오랜간 빠져 있었다. 이는 결국 공동체 파괴, 전통 파괴, 윤리적 파괴와 가치판단의 혼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격적 상징이 한 사회의 중심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적 분열과 자원낭비로 이어지고 심지어 그때문에 죽는 사람들도 나온다. 사람들은 뭐가 올바른 행동의 기준인지 알 수가 없다. 

 

이 규칙을 찾는 문제, 일반화의 문제는 당연히 우리의 경험이 다양할 때 더 심각해 진다. 이 말은 세상이 느리게 변하던 농업사회에 비하면 현대 사회에서 이 문제가 더 심각해 진다는 뜻이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는 우리가 습득하게 되는 데이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그 데이터를 나름대로 축약해 내지 못하면 우리는 선택장애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컴퓨터나 전자통신의 발달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인류역사상 가장 특이한 시대중의 하나로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식과 복잡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대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인류가 지금처럼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쓰기를 통해서 구전되어 내려오던 신화를 정리하고 더욱 더 정교한 인격적 모델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구술로만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격적 문화적 모델은 너무 조악해서 인간이 큰 사회를 이루며 살아갈 때 생겨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답을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싸움으로 이어져 공동체가 해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일단 글자로 기록되면서 정리되면 그 정교함과 복잡성은 차원이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문명화된 사회라고 불릴 수 있는 큰 사회 안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터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웅담과 글로 정리된 신화를 들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웠을 것이다. 인격적 모델은 인류 문명의 발전과 유지에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제 나는 통일성과 인격적 상징이라는 주제에 대해 한가지만 더 지적하고 이 글을 마치고 싶다. 이것은 어쩌면 이미 현재가 되어 버린 미래에 대한 것이다. 이런 인격적 모델의 힘은 대단하지만 그래도 역시 유한하다. 그러므로 오늘날처럼 사회가 폭발적으로 복잡해져 가는 시대에 단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 단 하나의 인격적 모델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필연적으로 다수의 게임을 하는 것처럼 분열된다. 각각의 게임속에는 서로 다른 규칙이 존재하고 우리는 각각의 게임속에서 서로 다른 인격적 모델을 사용해야 필요가 있다. 마치 연기를 하는 배우 카메라가 멈추면 다른 삶으로 돌아오듯이 말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장소와 상황 모두를 하나의 모델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경우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가하는 게임의 한계범위다. 게임들을 뒤섞으면 우리들의 판단은 뒤죽박죽이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가치판단을 하고 싶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우리가 지금 어떤 세계에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에 실패할 우리는 길거리를 대중목욕탕으로 여기고 옷을 벗는 비참한 실수를 하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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