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많은 경우 선택의 상황에서 그저 우왕좌왕하고 우리가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을 외면하고 만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흔들리는대로 왔다갔다 하면서 선택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착각하기 조차한다. 우리는 가장 안전한 중간 길을 택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답은 결국 남의 답일 뿐이다. 특히 상황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여러가지 남의 답을 짜맞춘 답, 짜맞춰져서 흉내낸 인생은 답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무엇보다 나를 지킨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제대로 선택을 할 수가 없다.
한국의 서점에서 발견하는 생활의 분열
우리 사회가 가진 분열증의 하나는 서점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점에 가면 출세와 성공을 위한 책들이 잔뜩 쌓여 있다. 10억 버는 법, 주식투자의 비결, 인맥관리술, 명문대 들어가는 방법, 인생의 전략 이렇게 세워라 등등이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욕심을 버리자는 내용을 담은 책들도 당당히 인기좋은 베스트 셀러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 아이들을 놀리자. 느리게 살자. 자연에서 살자. 가진 것 없이 살자. 마음의 평화를 얻는 참선의 방법. 욕심 버리는 방법. 세계를 여행하며 자유롭게 사는 삶. 뭐 이런 책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출세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책을 보건 안 보건 첫번째로 언급한 책들이 표현하는 그런 길을 간다. 그러다 힘들면 그들은 반대쪽 소리를 듣는다. 가진 것 없이 살기. 욕심을 버리기 이런 말을 하고 여행도 떠난다. 갈 용기가 없으면 마음만이라도 귀라도 기울인다. 실제로 완전히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다 버리고 떠나서 살다보면 대개 그것도 싫다. 그런 이야기에 귀만 기울이고 있었던 사람도 이젠 그 소리가 지겨워진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돌아온다. 다시 돌아와 앞을 보니 아귀다툼을 벌여야 하는 출세의 길이 보인다. 뒤를 보니 원시인처럼 힘겹게 가진 것 없이 불안하게 사는 삶이 보인다. 그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 사람은 이런 말로 자신을 위로한다. 나는 중용의 도를 실천하고 있는 거야. 적당히 섞어서 중간으로 사는 거지. 어차피 앞도 뒤도 막혀 있는걸.
아이들에게서 발견하는 우리의 분열
아이들은 요즘은 초등학교부터 학원으로 다니기 바쁘다. 엄청난 사교육비를 들여야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괴롭다. 잠도 못 자고 친구랑 놀 시간도 없는 그들은 나름대로 보상을 해줘야 한다. 돈이 있는 부모들은 그래서 핸드폰이나 비싼 장난감을 사주고 좋은 옷을 입히며 맛있는 외식을 시켜준다.
때로는 아예 미국같은 외국으로 아이들을 내보내서 교육을 시킨다. 이건 돈도 많이 드는 일이지만 가족이 헤어져서 사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기러기 아빠가 된 남자들도 많다. 물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모와 떨어져 말도 잘 안 통하는 곳에 가서 고생을 한다.
이런 불쌍한 아이들을 보고 그 반대로 가자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그들은 소위 진보적 교육, 대안적 교육이라는 것을 시킨다. 진보적 교육에서 종종 강조하는 것은 경쟁에 반대하는 것이다. 일제고사를 보고 자기 전국 등수 따위를 알려주는 것은 이러한 시점에서 나쁜 것이다. 아이들이 끝없는 경쟁에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도 없앨 수 있다면 없애는 게 좋다. 명문대 비명문대도 없애는 게 좋다. 그래서 진보적 교육에서는 자율을 강조하고 자유롭게 노는 아이들을 추구한다. 요즘 강조되는 소위 창의력 교육이라는것도 그렇다.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 자유시간을 많이 가져야 아이들은 창의력이 생긴다. 뭐 이런 주장속에서 아이들은 자유시간을 만끽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 양 극단위에 서 있다. 돈도 부족하고 아이들도 고분고분하지 않을 뿐더러 아이들을 마구 재촉할 만한 잔혹함도 부족한 부모들은 그저 적당히 학원에 보내고 적당히 남을 따라한다. 무엇보다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 확실한 자기 판단이 없기 때문이다. 애들이 불쌍하다고 진보적 교육에만 의존하려니 아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경쟁에서 이기자며 마구 밀어부치자니 무시무시한 실패담이 사방에 널려 있다. 탈선한 아이. 폭력적인 아이. 탈선하는 아이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닐까? 게다가 돈도 너무 많이 들고 아이들의 재능이나 끈기의 정도를 보아도 그렇게 한다고 크게 성공할 것 같지도 않다.
그들도 역시 중용의 도를 내세우며 우두커니 서 있다. 그들도 말한다. 어차피 앞도 뒤도 막혀 있는 걸. 적당히 섞이면서 중간으로 사는 게 제일 안전한 거야. 이것은 옳은 것일까?
더 많은 선택들 그리고 공통점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는 수없는 선택적 상황들의 예를 볼 수 있다.
외모지상주의는 어떤가. 예쁜 게 나쁜가 좋은가. 우리는 외모를 꾸미는 데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가.
환경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우리는 환경에 무한한 값어치를 매겨야 하는가 아니면 그런 것은 그저 무시해도 좋은 일인가.
학벌주의는 어떤가. 학벌을 강조하는 것은 좋은가. 아니면 학벌 따위는 모두 지워버려야 하는가?
우리는 이런 예들을 무한히 나열할 수 있다. 이런 예들이 어떤 것들인가를 알아차리고 나면 더더욱 쉽게 그런 예들을 발견한다.
이런 예들은 어떤 것들이 좋은가 나쁜가에 대한 것이다. 바로 가치 판단에 대한 것이다. 우리 아이의 키는 얼마인가는 사실에 대한 것으로 측정을 하면 정확한 값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교육이 '좋은' 교육인가는 뭘로 측정해야 할까.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인가. '좋은' 사람이란 어떤 것인가. 가치 판단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의견 속에서 – 혹은 종종 그보다 많은 다수의 의견 속에서 - 우리는 우왕좌왕한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가치 판단을 한다. 사실 모든 중요한 판단들은 가치 판단들이다. 중요하다라는 말 자체가 가치를 말한다.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은 사실 판단 중에도 중요한 판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그 경우 가치 판단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리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그냥 따르고 있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종종 미국이나 유럽의 무슨무슨 수치는 이러저러한데 우리의 수치는 아직 그에 미치고 있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수치는 사실 판단이지만 그 뒤에는 미국이나 유럽이 대신 내려주는 가치 판단, 미국이나 유럽처럼 되는게 좋은거라는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수치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우리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빠져 있는 함정들의 공통점은 바로 가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뭐가 좋은지 잘 모른다. 더 나쁜 것은 모두가 답을 모르면서 서로 서로를 베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스스로 좋다 나쁘다의 기준이 없어서 남의 말을 듣고 어떤 잣대에 따라 가치 판단을 사실 판단처럼 내린다. 훌룡한 교육이란 종종 당장 이번 달에 나온 시험점수와 동일시되고 훌룡한 학교란 종종 대학교 진학율과 동일시된다. 훌룡한 신랑감이란 종종 월급봉투의 크기와 동일시되고 행복한 가정이란 종종 살고 있는 집의 크기로 결정된다.
그렇지만 뭔가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결과가 좀 신통치 않다. 우리는 고장난 자판기 앞에 있는 사람처럼 스위치를 계속 눌러본다. 이리저리 눌러보지만 다 시원찮다. 나오는 것은 점점 더 시원찮은데 우리는 중용의 덕을 발휘해서 이쪽 스위치 한번 누르고 저쪽 스위치 한 번 누르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래도 그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믿는다.
중간 길이 가장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를 가지지 않고 이렇게 여러가지 방법들을 돌아가면서 써보는 게 과연 가장 안전하고 상식적인 길일까? 예를 들어 요리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된장찌게를 만들 수도 있고 치즈를 넣는 그라땅을 만들 수도 있다. 둘다 제대로 요리법을 따른다면 아주 맛있는 요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된장찌게를 만들다가 옆에서 그라땅을 만드는데 그게 맛있어 보인다고 된장찌게에 치즈를 넣으면 그게 맛있을까? 그라땅을 만들다가 옆에서 된장찌개를 만든다고 나도 된장을 넣으면 그게 맛있을까?
가치나 의미는 물건에 붙은 가격표처럼 하나 하나의 행동과 선택에 따라 붙은게 아니라 문맥과 다른 행동과 다른 선택과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주 재미있는 영화의 최고의 장면들만을 잘라다가 그걸 하나로 이어붙인다면 재미있는 영화가 되지 않는다. 주연만 있는 영화가 있을 수 없듯이 멋진 클라이막스는 그걸 클라이막스로 만들어 내기 위한 다른 장치들, 다른 준비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고를 때 과연 이것은 좋은 것일까 하는 것도 문맥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없는 사람은 자꾸 자기의 삶의 방식을 바꾼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삶의 방식을 보고 뒤죽박죽으로 섞기만 한다. 된장과 치즈가 다 들어가 엉망진창이 된 요리 앞에서 과연 여기에 소세지를 넣으면 좋을까 나쁠까하는 질문은 대답하기 어렵다. 설사 어떤 답을 찾았다고 해도 더 큰 문제는 나를 지키지 못한 것이며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정체불명의 요리에 새로운 재료를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같은 어려운 문제에 계속 부딛히게 될 것이다.
오늘날에는 세상이 복잡해서 사람들이 입장이 서로 많이 다르고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사는 모습도 여러 가지 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여러 가지 논리와 철학에 근거한 굉장히 다양한 생활방식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능력이 없을 때 이리저리 휘둘리게 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대대로 같은 지역에 살면서 비슷한 상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고 고립된 마을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으며 지구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의 삶도 발달한 미디어를 통해 보게 된다. 그럴 때 우리가 중간 길을 간다고 하는게 어떤 결과를 줄까. 최악의 결과가 되지 않을까?
외국 생활을 하는 가정의 아이들을 보면 문화적 혼돈에 빠져 있는 경우를 쉽게 본다. 미국에서 크는 한국아이지만 이 아이는 미국아이도 한국아이도 아니다. 부모는 한국과 미국 문화의 장점만을 흡수한 초우량 교육을 원했겠지만 그 결과를 보면 오히려 치즈를 넣은 된장찌게 꼴이 된 것 같은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아이는 미국 문화 속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지만 그에 따르는 엄정한 책임감은 외면한다. 부모에게 의존하려고 할 때, 부모에게 뭘 부탁해야 할 때는 한국아이가 되지만 부모로부터 자유를 원할 때 부모의 간섭이 싫고 자신의 의무가 거론될때는 자유로운 미국아이가 된다. 한마디로 연약한 철부지가 되버리고 마는 것이다. 정체성의 혼동이 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적어도 대부분의 보통 사람에게는 고약한 일이다. 나이만 먹었을뿐 실상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초등학교때 이후 더 알게 된 것이 없는 것같은데 자꾸 세상은 점점 더 무서운 선택을 우리에게 할 것을 강요한다.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나 가족, 부하직원, 이웃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지도 모를 선택을 해야한다. 예를 들어 아이는 어떤 학교에 보내고 어떤게 올바른 삶이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부모가 되면 선택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마음속 저 밑에서는 누군가가 말한다. ‘세상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결국 남을 보고 베낀다. 문제는 그 옆집 사람도 똑같은 이유로 나를 보고 베끼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뭐가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일까? 영혼없는 사람이 만드는 영혼없는 아이?
우리가 말하는 중간 길이라는 건 사실 종종 최악의 길이다. 이리저리 우왕좌왕하고 선택은 내리지 않고 시간만 보내다가 사실은 어느쪽이든 확실히 선택하고 그렇게 살았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좋았을 것이라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린 댓가를 치루게 된다. 사실 자기라고 불릴 것따위는 애초에 가져본 적이 없었다라고 기억되는 사람이 많다. 바로 그래서 사는게 더욱 어렵다. 남을 따라하자니 자신이 없는데 내 의견이 뭔가를 생각해 보면 그것도 희미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기를 가지고 자기를 지키는 법일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뒤죽박죽으로 살기 아주 쉽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나를 떠나가도 여전히 나를 지켜주고 나에게 남은 것이 있다라고 생각할수 있는 자기가 우리는 필요하다. 그것을 발견하고 키우고 지키는 것이 바로 인생의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러나 나를 지킨다는 것을 말하기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나를 지킨다라는 문장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문맥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네 맘대로 해라는 말과 같은 것이기도 하고 다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맺는말
우리는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취한다. 그것이 우리의 선택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선택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우리는 지식에 근거해서 판단을 잘 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적절히 극단적인 것을 피해서 살아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뒤죽박죽으로 내부적 일관성을 잃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걸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 보일 정도다. 눈을 감고 도로를 건너는데도 살아남는다면 살아남는다는 사실이 신기한 것이 당연하다.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럭저럭 살수 있는 것,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상식이란 걸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한 사회에 사는 사람은 대개 공감하는 것, 그것이 상식이다. 우리는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일에 대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는 상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상식이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 상식에 따라 선택을 한다. 그런데 이 상식이란 게 뭘까. 상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뭔가가 좋다는 것은, 상식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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