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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가치판단에 대하여

연작 에세이 1 : 엉터리 일반화의 오류

by 격암(강국진) 2009. 11. 19.

 

 

버틀란트 러셀은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사람들이 철학을 하는 개인적 이유는 우리가 얼마나 적게 아는지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학은 우리에게 지식을 주지만 과학이 답을 줄 수 있는 문제는 세상에 너무나 적고 우리가 우리가 얼마나 적게 아는가를 잊어버리면 아주 중요한 것들에 대해 둔감해진다. 반면에 신학은 우리가 무지한 순간에 교조적인 답을 주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건방진 태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버틀란트 러셀에 따르면 철학이 할수 있는 주된 일은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가운데에서도 망설이다가 행동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엉터리 일반화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뭔가로 성공하면 계속 그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경험에서 배운다. 그리고 어떤 때는 경험에 집착한다. 그래서 잘못배운다. 축구를 잘해서 칭찬받았던 사람은 뭐든지 축구로 해결하려고 하고 주먹질로 인생문제를 해결하던 사람은 항상 주먹질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공부를 잘해서 인생문제를 해결해 온 사람은 그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엉터리 일반화를 통해 뭔가를 안다고 착각한다.

 

한국 사회의 기억

 

일반화의 문제는 여러가지 예를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여기서는 21세기 한국이라는 사회가 가진 경험의 기억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어떤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자. 일단 첫째로 우리는 가지는 것, 돈을 버는 것으로 행복해진 기억이 있다. 우리는 남의 식민지였고 전쟁터의 폐허에 서있는 전세계 최빈국이었다. 죽도록 목이말랐다가 물을 마신 경험이 있다면 물의 중요성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먹는 것과 돈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두번째로 우리는 남의 흉내를 내고, 기술을 배워서 성공한 경험이 있다. 해방 이후 이제 세계 어디가도 꽤 사는 나라 대접을 받는 지금이 있기까지 한국 사회가 해 온 것은 죽자사자 외국의 것을 배우고 모방하는 일이었다. 따라잡는 일, 외국에서만 가능한 것을 한국에서도 가능하게 만드는 일 그게 우리가 해 온 일이었고 잘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 와중에 전세계 누구보다도 빨리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세번째로 우리는 권위주의적 체제로 성공했다. 한국은 오랫동안 군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군인처럼 행동하라는 생각을 주입받았다. 그 시절 동안 한국이 빈민국에서 벗어나고 발전의 토대를 쌓았던 것은 부인할수 없다. 

 

이것들은 성공의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경험들에 다시 의문을 던질 수가 있다. 무엇보다 여기서 과연 우리의 성공이 진짜로 성공인가. 물질적 잣대로만 성공이 아닌가 하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즉 모든 방면에서 발전이 있었다고 말해야 하는가, 종합적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과연 더 행복해지기만 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가 있다. 

 

또한 물질적 잣대로만 보더라도 위에서 말한 인과관계가 올바른 것인가 하는 것에 의문을 표할 수가 있다. 과연 돈 돈 하고 돈을 추구했기에 우리는 부자가 되었는가. 혹시 돈 따위에는 초연한 어떤 문화가 우리를 부자 만들어 준 것은 아닐까? 남의 것을 열심히 배우고 베꼈기에 우리는 성장했는가. 혹시 우리의 발전은 우리 내부에 있는 본래의 우리 것 때문이 아닐까? 권위주의적 시스템 때문에 성공했을까? 혹시 우리의 성공은 권위주의 하고는 상관없거나 혹시 권위주의 때문에 우리의 발전이 오히려 더 느려졌던 것은 아닐까? 권위주의는 생각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것이 우리 발전의 근본 원인일까? 미래에도 이 발전의 법칙이 우리를 지켜줄까? 생각해 보면 이러저러한 일은 이러저러한 것때문에 생겼다라는 인과관계는 애매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쉽사리 일반화에 빠지고 그 관계에 확신을 가진다.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담은 많은 경우 읽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자신의 성공이유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가졌던것보다 그들이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해 훨씬 민감하다. 예를 들어 좋은 재능을 타고나서 자신을 후원해 줄 부자 집안에서 자라서 훌룡한 학자로 자라난 사람은 자신이 남보다 많이 가졌던 것에 대해 생각보다 그다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성공이 은사를 잘 만났다거나 인간관계에 조심했다거나 죽도록 꿈을 향해 뛰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은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빌게이츠와 똑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누구나 빌게이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성공담이 필요없거나 항상 틀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공의 원인에 대한 생각은 종종 틀리기도 해서 성공한 사람도 자신의 성공이유에 대해 잘못 알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봤을 때 대중들이 생각하는 우리 역사의 성공 원인은 과연 옳은 것일까? 이것에 의문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의 경험을 일반화하는게 당연히 옳다면 왜 다른 나라, 예를 들어 아프리카 빈민국은 우리만큼 성공하지 못할까. 그들도 열심히 서양을 베끼고 권위주의를 도입하면 될것이 아닌가.  

 

설령 과거에 그것이 성공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앞으로도 성공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비오는 날 우산 들고 나가서 돈을 벌었다고 해서 우리는 날씨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산이 잘 팔릴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엉터리 일반화와 예측

 

우리는 종종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때,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어떤 일반화가 통하지 않을때 그럴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합주가지수의 그래프를 보고 그것이 변하는 원리를 나는 알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 많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돈을 손해본다.

 

미래는 예측할수 없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블랙스완>에서 한권의 책 내내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탈레브가 하는 이야기중에는 추수감사절을 위한 칠면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 추수감사절을 위해 키워지는 칠면조가 하나 있다. 이 칠면조는 매일 아침이면 키워주는 사람에게 모이를 받는다. 어제도 그제도 한 달 전도 두 달 전도 매일 같이 아침이면 그 사람은 자기에게 다가와서 먹이를 주었을 뿐이다. 칠면조의 입장에서는 “봐. 사람이란 항상 우리에게 그저 먹이를 주는 안전한 존재야”라고 주장할 법도 하다. 그 칠면조는 사람이란 항상 아침에 모이를 주는 존재라는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의 아침이 되면 그 사람은 먹이 대신 칼을 들고 온다. 오랫동안 옳은 것으로 생각했던 법칙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 예는 옳은 진리는 귀납적으로 즉 증거에 의해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리 증거가 많아도 즉 제 아무리 칠면조가 여러 날 동안 문제없이 모이를 받았어도 다음날에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 매일같이 올라가던 주가가 내가 주식을 사는 순간 폭락할 수 있듯이 말이다.

 

우리가 칠면조는 아니지만 우리는 살면서 사소한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일반화를 수없이 많이 한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는 테니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던 교수가 있었다. 테니스를 잘 치면 연애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고 취직도 잘 되고 친구도 잘 사귀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 그는 테니스를 잘 치는 사람은 인격도 훌룡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물론 그 교수는 테니스를 잘 친다.

 

보다 심각한 일반화로 사회과학적 이데올로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사회과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 아니다. 제 아무리 설득력이 있는 사회과학적 이론이라고 해도 그것은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엄밀하게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수학에 비하면 일반언어를 사용해 논증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 개념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정확히 같은 조건에서 실험을 재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예측이 맞지 않아도 변명거리는 언제나 있다.

 

칼 포퍼는 확실하지 않은 지식이 과학이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프로이드와 마르크스의 사상을 싫어했다. 확실치 않은 것, 예측할수 없는 것을 확실한 것처럼,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주의의 빈곤과 열린사회와 그 적들 이라는 책을 통해 공산주의를 비판한다. 포퍼가 말하는 것은 당신은 당신이 뭘 모르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르므로 그나마 자신이 가장 현명하지 않냐라는 말을 남겼다.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가장 재능있던 제자인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를 배신했다고 말하고 이런 태도가 결국 전체주의에 대한 믿음의 기원이 된다고 주장한다.

 

역사나 사회는 이렇게 저렇게 변한다는 원리를 발견하는 통찰력을 가지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 원리라는 믿음에 빠지는 순간이 문제다. 우리가 자명하고 증명된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자명하지도 증명된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게 무슨 뜻인지도 애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또한번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한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만큼 가치판단에 있어서 실수하기 쉬워진다.

 

우리는 예측하기나 일반화하기를 피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화로 얻어진 모든 것은 잠정적인 도구로만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만큼 지혜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지혜로 부터 멀어질 때 누군가가 비싼 외제차를 가지고 있다거나 테니스를 잘 친다는 이유로 해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어제 좋았던 것이 오늘도 좋은 것일지 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지식이 무지를 늘려줄 때도 있다.

 

가치는 사실로부터 유추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가 세상 일에 대해 무지해도 상관없으며 언제나 현실파악에는 신경쓰지 않고 그냥 순수히 근거없는 느낌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물론 현실파악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으면 최소한 현실파악은 더 정확히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공부하고 책읽고 뉴스를 열심히 보면 세상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것조차 항상 사실이 아니다. 세상으로부터 우리 귀에 들어오는 정보에는 그것이 진실이라도 우리의 혼동만 증가시키는 것들이 많다. 다음의 예를 생각해 보자.

 

어느 날 새벽 3시에 당신은 순이와 철수가 사는 옆집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발견한다. 당신은 새벽3시에 철수는 깨어 있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아마도 순이의 목소리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목소리는 여자특유의 높은 톤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신은 그것이 거의 순이의 목소리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순간 당신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욕을 하는 것을 듣는다. 당신은 순이가 욕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순이일 것이라는 생각은 갑자기 근거를 잃는다. 이제 이것은 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 욕을 듣고 나자 이젠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위에서 말한 예는 어떤 진실이 현실의 정확한 파악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가시키는 상황이다. 즉 통상  진실은 언제나 불확실성을 줄인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우리는 욕을 하는 목소리를 조금 더 들었기 때문에 그게 누구인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지를 증가시키는 정보가 매우 일어나기 어려운 특이한 사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순이는 욕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정보가 이것은 순이라고 말해주는 상황에서 그 목소리가 욕을 했다는 단 하나의 정보는 상황을 뒤집어 버린다.

 

그런데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무지를 증가시키는 정보를 접하는 일이 거의 없지 않을까?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광고를 생각하면 이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광고는 때로 거짓 정보를 말하기도 하지만 광고에서 말하는 모든 정보가 진실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 제품에 대한 진짜로 중요한 정보는 그 광고에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종종 비록 전문성이 없더라도 그 제품을 써본 사람의 인터넷 사용기에서 진짜 중요한 정보를 얻는다. 왜냐면 광고에서는 진실 중에서 고객이 제품의 가치를 착각할 만한 정보만을 골라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광고의 정보는 고객의 무지를 증가시켜서 본래는 전혀 가치없는 제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사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이 광고의 본래 목적이다.

 

그러면 이것은 광고에 대한 것뿐일까? 그렇지 않다. 오늘날은 정보가 권력이고 돈이다. 그리고 세상은 너무 복잡해서 우리는 대부분의 정보를 미디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습득한다. 어떤의미에서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정보가 광고다. 지금의 정부는 인기가 있는가 없는가, 지금 주가가 올라갈까 아닐까. 부동산 거품은 꺼지는가 아닌가. 당신은 정보를 끌어모으고 그에 대한 판단을 하고 싶어한다. 문제는 당신은 과연 미디어로부터, 주변사람들로부터 얻은 정보로 도움을 받는가 아니면 오히려 더욱 혼란스러워지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남이 하는 소리를 많이 들으면 들을 수록 우리는 오히려 광고에 중독된 것처럼 되지는 않는 것일까?

 

정보를 더 잘 관리하는 사람, 미디어에 더 강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권력과 돈을 놓고 그들과 경쟁하려고 하는 일반 시민들에게 어떤 정보가 흘러가기를 원할까? 무지를 늘리는 정보일까 아니면 진짜 가치가 있는 정보일까? 미디어는 종종 오보를 낸다. 미디어가 오보가 없고 진실한 정보만을 준다고 해도 그 정보는 당연히 그런 정보가 세상에 퍼질 때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영향력을 생각하면서 배포된다. 나는 모든 기자들이 부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항상 부패하여 거짓을 말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자신이 믿는 대로 소신에 따라 말하는데도 그것이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당연히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더 많은 대중노출의 기회를 얻게 된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세상을 보면 나쁜 일이고 나쁜 사람이고 그 판단이 분명한 일도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면 신문이나 방송에선 종종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혼돈을 증가시킨다. 순이 목소리가 뻔한 데도 그 목소리가 욕을 했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철수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고 자꾸 상황을 기계적 중립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주가를 예측하는 사람들은 주가가 하락할 것이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주식시장이 활황세여야 돈을 버는 회사와 이익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심 타레브는 되도록 신문을 읽지 않고 티브이를 보지 않을 것을 권하고 있다. 그 자신은 그렇게 산다고 한다. 지식이 우리를 더욱 무지하게 만드는 경우가 세상에는 많기 때문이다.

 

어떤 법칙을 믿으면 정보를 선택하게 된다

 

가치판단에 있어서 일반화가 가지는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가 어떤 법칙이라고 생각하는 것, 즉 어떠 어떠한 것은 좋다는 판단이 이따금씩은 틀린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따금씩은 틀릴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습관과 타성에 젖어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쉽게 주목 할 수 있는 정보를 걷어차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정보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뻔한 사실을 놓쳐버리게 될 수가 있다. 우리가 법칙으로 믿는 것이 우리를 점점 더 나쁜 쪽으로 몰고가고 우리의 선입견을 강화시킨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동안에도 잠재적으로 위험도는 날로 커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인간적 품성은 반드시 그 출신 가문의 부유함과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을 평가 할때 주로 그가 어떤 집안 출신인가에 대한 정보만을 집중적으로 물어볼 것이다. 부모님은 뭐하시는지, 가문은 얼마나 유명하고 부자집인지 친인척 중에 명성이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은 누가 있는지를 열심히 알아볼 것이다. 반면에 그는 그 사람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어떤 취미가 있는지,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이 가진 정보를 바탕으로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한다. 그러나 수집되는 정보 자체가 그의 습관에 의해 크게 왜곡되어 있다면 그 정보를 기반으로 아무리 냉정히 판단을 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이미 왜곡을 피하기 어렵다.

 

뭔가를 보거나 듣기위해서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먼저 버려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성공에 대한 경험에서 오는 선입견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성공했지만 앞으로는 그게 아닐지 모른다. 앞으로의 한국이나 앞으로의 우리 삶에서는 어제의 성공법칙이 통하지 않을 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뭔가에 집착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고 뻔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돈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은 돈이 없는 어떤 사람이, 작은 서민 아파트에 사는 어떤 가족이 부자동네의 커다란 비싼 집에 사는 가족보다 더 훌룡하고 더 행복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납득하기가 힘들다. 그들은 서둘러 말한다. 하지만 저 사람은 훌룡한 사람이라는데 그럼 왜 돈이 없나요. 돈이 많으면 나쁜 건가요. 부자인게 뭐가 나쁜가요. 질문에 바뻐서 그들은 돈이 있고 없고의 방향과 수직한 방향, 그들이 보지 않은 방향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돈이 있건 없건 상관없고,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맺는 말

 

우리는 제한된 경험으로부터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단정해 버리고 일반화를 해 버린다. 그 일반화는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 우리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의 눈과 코와 입과 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어제 좋았던 것이 오늘도 좋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이 나에게도 좋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나라에서 좋은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안 좋은 것일 수도 있다. 가치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상식으로 관습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심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제 아무리 단단해 보이는 벽이며 오래된 벽이라도 한번 통통 두들겨 봐야 할 때가 있다. 그 벽은 우리의 일반화가 만들어 낸 환상의 벽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가 일반화를 하고 법칙을 찾는 근원이 되는 우리가 가진 정보도 왜곡에 가득찬 것일 때가 많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만을 본다. 사회는 우리가 믿기를 바라는 것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물론 대개는 스스로가 선입견에 빠져서 한쪽 방향만 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는 엉뚱한 방향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안에 가득찬 엉터리 일반화가 우리를 멍청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잘못 알고 있으니 제대로 알아야 겠다는 것도 충분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애초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 아닐까. 안다는 게 뭔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뭔가를 제대로 선택하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가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들을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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