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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가치판단에 대하여

연작 에세이 3 : 상식의 원천

by 격암(강국진) 2009. 11. 20.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내가 고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서울이기는 하지만 서로 떨어진 곳에서 다녔다. 그런데 두 학교가 서로 아주 달랐다. 중학교의 아이들은 짓꿏은 정도를 넘어 거의 범죄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루도 교실에서 주먹싸움이 벌어지지 않는 일이 없었고 싸우면 아주 심각해서 피가 튀기는 흉흉한 분위기였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몽둥이로 두들겼다.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포커를 하고 음란물을 돌려봤으며 여자선생님의 치마속을 들여다봤다. 주먹이건 공부건 지식이건 운동이건 뭔가 잘난 놈들은 노골적으로 잘난척하면서 살았지만 머리가 좀 떨어지거나 담이 약한 녀석들, 특기나 친구가 없는 녀석들은 비참하게 놀림감이 되고는 했다. 

 

세상은 본래 이런 줄 알았던 나는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났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주먹 싸움을 단 한 번도 내 눈으로 목격한 적이 없다. 한번은 전혀 거친 사람이 아닌 내가 나에게 장난을 치는 녀석에게 거칠게 굴었다가 아이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중학교의 상식에 따르면 남자라면 그럴 때에는 참지 말고 주먹을 날려야 할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상식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나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매우 놀란 것처럼 반응했다. 마치 바바리맨 같은 사람을 본 것같았다. 

 

왜 이런 것일까? 내게는 한가지 설명이 있다. 당시에는 학교에서 부모님 직업 조사를 공개적으로 했다. 그래서 나는 두 동네가 이런 쪽에서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칠었던 중학교에서 대부분의 부모는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회사원은 적었다. 온화하고 순종적이었던 고등학교의 경우 압도적 다수의 학생이 회사원이나 공무원 부모님을 가지고 있었다. 이걸 알게 되자 나는 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부모가 자영업자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의 아이들은 자영업자처럼 행동했다. 부모가 공무원이거나 대기업 사원인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것처럼 행동했다.

 

자영업자인 아버지와 대기업 사원인 아버지의 행동양식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자영업자인 아버지는 크던 작던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모든 판단을 주체적으로 하며 그에 대해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고 무엇보다 결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실용주의는 어떨 때는 법과 규칙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규칙이란 어느 정도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반면에 대기업 사원이나 공무원인 아버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직 내에서 자신의 임무를 해내는 것이다. 거대 조직에서 자신의 일이 가지는 최종적 가치를 이해하기는 힘이 든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규칙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해가 안되도 시킨대로 하는 것이다. 거대 조직에서 각 사원들이 각자 판단하고 각자 움직여 질서를 무너뜨리면 그 조직은 금방 망할 것이다. 다른 사람과 협동하고 조직 내부의 정보에 민감한 것이 중요하다. 바깥 세상은 2차적인 문제다.

 

하나의 행동 패턴은 내부적 구조를 가지고 얽혀 있는 것이다.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것과 법과 규칙을 무시하는 것은 이 경우 얽혀 있다. 지루하고 수동적인 것과 규칙을 잘지키고 원만한 것은 역시 얽혀 있다. 우리는 쉽사리 창의적이면서 조직의 규칙에 순응하는 행동방식을 조합해 낼 수 없다. 행동 패턴을 좋은 목적을 위해서 고치려고 할 때도 한 쪽을 수정하면 다른 쪽에서 문제가 나타나기 쉽다. 

 

물론 얽혀져 있는 것은 그것뿐 만이 아니다. 사람들간의 여러가지 관습들이 서로 다 얽혀서 언어의 습관, 예절, 바람직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어지는 태도 등이 모두 다 달라진다.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관철할 수 있는 인간이 존중받는 곳이 있는가 하면 항상 온화하게 타인과의 화합에 신경쓰는 사람만이 가치 있는 사람으로 존중받는 곳이 있다. 항상 자기가 남자라는 사실을 폭력으로 증명해야 하고 어른들의 세계를 잘 아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너무 순진하다고 할 정도로 얌전하고 세상을 모르는 아이들이 있는 곳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남의 행동을 그냥 1차적으로 이해한다. 이런 식으로 그 이면에 깔린 상황에 근거해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거친 아이들이 보기에 얌전한 아이들은 원래 지루한 아이들이고 선생님 말에 쉽사리 겁에 질리는 겁쟁이일 뿐이다. 얌전한 아이들이 보기에 거친 아이들은 원래 거칠고 나쁜 아이들이고 참을성도 없는 아이들이라고 설명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 상식이 어디에 가나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부모들이 특정한 환경에서 행하는 특정한 행동의 경향을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는 오랜동안 집이 세상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내 직업이 이러저러해서 나는 이렇게 행동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설사 설명한다고 해도 대개 그런 걸 이해 할만큼 아이의 지성이 성숙해 있지도 않다. 부모도 자각하지 못하는 부모의 특수한 행동방식은 아이의 보편적 상식이 된다. 아이는 부모의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알고 세상에 던져진다. 그것이 그들의 상식이 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특수성을 깨달아 자신에 대한 생각을 일찍 고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평생 고치지 못하기도 한다.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상식의 원천

 

토마스 루이스, 패리 애미니 그리고 리처드 애넌이 쓴 <사랑을 위한 과학>에서는 어린 아이와 부모와의 정서적 공명을 대단히 강조한다. 그들은 공원에서 걷다가 넘어지는 아이를 보라고 말한다. 아이는 넘어지면 먼저 부모의 얼굴을 점검한다. 만약 어머니가 경계심이나 근심을 보이면 아이는 운다. 어머니가 기뻐하면 아이는 어머니를 보고 미소를 짓거나 웃는다. 아이는 불완전한 걸음에 대해 그 자신의 평가보다는 어머니의 평가를 더욱 신뢰한다. 아이는 아직 자신의 감정에 대한 평가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있어 부모는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된다.

 

유년 시절은 우리가 가진 상식의 중요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원천 중의 하나다. 따라서 상식이란 녀석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를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는 우리가 더 어렸던 시절로 더 단순한 삶을 살았던 때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그 시절에는 부모가 대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모가 뭘 결정하면 일은 그렇게 된다. 티비를 더 볼 수 있는지 없는지, 밥은 뭘 먹게 되는지, 장난감을 사도 되는지 마는지 다 부모가 결정한다. 부모는 상식의 원천이다. 아이는 질문하지 않고 그들의 행동, 판단을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상식은 마치 등에서 등으로 불길이 번지듯이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전달된다. 부모는 아이에게 사물의 기초가 되는 기본적 가치 판단을 전해 준 사람이며 아이들은 그 기반 위에 자신의 경험을 쌓아올린다. 

 

하지만 부모의 행동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겪은 어떤 사건들로 인해 깊은 정신적 제약에 빠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제약이 상식의 원천으로 자리잡게 된다. 대개 그런 사건은 매우 고통스런 사건이므로 우리는 어른의 눈으로 그 사건을 다시 직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건 아팠던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건과 관련된 감정의 기억은 계속 어린 아이의 것으로 남는다. 즉 어린 아이의 감정이 성인의 상식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한 소년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구들은 방과후에 종종 서로 어울려 제과점에 가서 단팥빵을 사먹고는 했다. 그러나 용돈이 없는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단팥빵을 사먹을 돈이 없는 자신이 부끄러웠고 돈이 많은 부자가 부러웠다. 더구나 항상 단팥빵집에 가는 아이들 중에는 그가 좋아하는 소녀도 있었으므로 이 일은 특히 괴로운 일이었다. 이 소년은 수십년 후에도 이 때의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소년은 자신감이 없는 어른으로 성장하여 나는 본래 남들보다 못하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소년은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부자가 되고 습관처럼 단팥빵을 사먹는다. 이미 그것을 같이 먹어줄 친구들과 그 소녀는 어디에 갔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단팥빵을 사먹는게 30년은 늦었다. 그래도 그는 단팥빵을 종종 먹는다. 이제는 그 첫사랑 소녀의 얼굴도 희미하지만 단팥빵을 먹는 버릇만 남았다. 이 이야기는 사실일까 아닐까? 그는 그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인간의 기억은 종종 자꾸 바뀐다.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가 돈벌기에 미치고 싶어서 스스로가 만들어 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어렸을 때의 일을 잊어버린다. 귀찮아서 혹은 두려워서 우리가 가진 상식의 원천들을 살펴보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상식은 극히 평범하지 않은 부모를 만났거나 어떤 평범하지 않은 경험을 한 것에서 출발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른이 된 우리는 종종 어린 시절을 굳이 되새김질 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상식이 가치판단이 어떻게 이뤄지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를 조정하는 상식이 실은 어린애의 유치한 감정때문에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냥 가진 상식대로 습관대로 그렇게 선택을 하고 가치판단을 하고 산다. 하지만 우리가 그 원천을 기억해 냈을 때 그건 실로 어처구니 없이 작은 일일지도 모른다. 어릴적에 먹지 못했던 단팥빵 같은 것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겉은 대단해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어린 애일 수 있다. 우리가 내적 성찰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상식 체계의 교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상식체계를 벗어나고픈 욕망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때로 그렇게 하고 싶어한다. 갇혀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뭔가가 잘 안 된다는 느낌이 든다. 뭔가 표면적이고 지엽적인것이 아니라 원천적이고 뿌리에 있는 것이 잘못 된 것같다. 그러나 상식의 체계를 바꾼다는 일은 물론 쉽지 않다. 무엇보다 상식이란 개개의 사실들의 단순집합이 아니라 내부적 구조를 가진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하나만 바꾸거나 교체하기 어렵다. 우리는 확증편향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지금 상식이 맞다고 말해주는 경험과 증거에 더 주목한다.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둔 아이는 그런 아버지를 극적으로 싫어할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자라서는 또 쉽게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 경우도 많다. 그건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상식을 전해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경우는 참아서는 안된다. 이러이러한 경우에 통하는 건 주먹밖에 없다. 이러저러한 인간은 좀 맞아야 한다는 식으로 컷기 때문이다. 상식은 단일한 규칙들의 합이 아니라 내부적 구조를 가진 종합세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식을 깨는 것은 언제나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위험한 일이다. 알고 있는 상식을 부인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은 있는 집을 부시고 새로운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건 일종의 비약이고 모험이기 때문에 새로운 집이라는게 지어질 수 있는 건지는 항상 확실한 것은 아니다. 알고 있는 상식을 한번 포기했는데 더 좋은 상식 체계에 안착하지 못한다면 우린 그저 사는 데 확신만 없어지는 불안한 상태가 될 뿐이다.  상식을 깬다고 하다가 그나마 있는 작고 아담한 집의 담벼락에 커다란 균열만 만들고 끝날지 모른다. 그래서 보수적인 노인들은 종종 깊은 생각과 경험없이 마구 상식을 무시하는 젊은이들을 철이 없다고 한다. 그래 봐야 망가지는 것은 자기 인생일 뿐이라는 것이며 원한다고 깨끗이 과거를 지우고 다시 돌아올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상식을 너무 쉽게 넘어서는 사람들 중에는 환자들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병을 우리는 정신분열증이라고 부른다. 정신분열증의 정확한 원인도 치료법도 지금은 없다. 다만 뇌속의 물질인 도파민이 크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현재의 정신분열증 치료제는 이 도파민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다. 도파민의 양을 고의적으로 바꿔주면 멀쩡한 사람도 일시적으로 정신분열증적 증세를 보이게 만들수 있다고 한다. 이 정신분열증의 대표적인 증세들이 환각이고 상식을 넘어서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믿게 되던가 세상은 내일 망한다던가 아내가 알고 보면 외계인이라던가 하는 황당한 만화적 상상을 진심으로 쉽게 믿게 되는 것이 정신분열증 환자들이다. 

 

우리는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쉽게 믿는 사람을 어리석거나 미쳤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황당한 이야기를 모두 거부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상식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대개 처음에는 다 황당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생각은 언제나 분명히 틀렸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상식, 새로운 사고도 대개 주류적 생각으로 발전하기 전에는 분명히 틀린 것이며 황당한 망상이라고 간단히 무시당한다.

 

우리는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식체계에 갇혀서 탈출하고도 싶다. 모든 혁명은 위험이 따르니 위험은 감수해야하겠지만 무모한 혁명은 우리의 삶을 파괴할 뿐이다. 혁명적 물리이론을 주장했던 양자역학의 아버지 하이젠베르크는 혁명을 주장하는 젊은 학생에게 이런 조언을 준다. 혁명은 지금의 시스템안에서 최선을 다한 후에 온다는 것이다. 혁명가로서는 매우 보수적으로 들리는 이런 말을 한 후에 그렇게 해서 혁명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필요한 혁명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하고 우리의 힘을 거기에 집중했을 때만 그 혁명은 성공적일 수가 있다고 하이젠베르크는 말한다. 이것은 자기의 상식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도 기억할만 이야기일 것이다. 

 

과학이론과 상식체계

 

과학적 이론의 발전을 논할 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과 뉴튼역학 혹은 뉴튼역학과 양자역학은 종종 비교되고 논의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뉴튼역학과 그 내부적 논리가 전혀 다르다. 그래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별들과 달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예측했다. 다만 뉴튼역학처럼 만물에 모두 작용하는 만유인력으로 천체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며 뉴튼 역학이 그 적용범위와 논리의 일관성에 있어서 훨씬 뛰어날 뿐이다. 뉴튼역학은 양자역학이 뉴튼역학에 대해 그렇듯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조금 개량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넓은 간격이 있으며 생각의 비약이 있다. 그 생각의 비약결과 우리는 수많은 다른 일들에 대한 실험과 이해가 가능해 지게 되었다.

 

우리가 가진 상식체계라는 것도 과학이론이나 수학이론과 비슷한 면이 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가 가진 상식체계 아래서 최대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세계만이 아니라 개인적 인간관계, 사회적 구조, 삶의 목적, 유희, 죽음의 의미 등 비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간단한 상식체계를 지키며 살아가지만 그것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나쁠 때 우리는 상식체계 전체의 보수가 필요하다. 이것은 과학이론에 있어서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말해지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다만 과학이론의 연구와 개인의 상식체계를 다루는 데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과학이론의 경우 수많은 사람들이 방대한 사례들에 관하여 그 일관성을 엄밀히 검증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일단 뉴튼역학이 받아들여지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완전히 폐기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과학적 이론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개인의 상식체계, 가치관, 세계관, 형이상학은 엄밀한 실험을 통해 논리로 증명되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같은 조건에서 같은 결과를 낸다는 재현성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다. 누구도 같은 인생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인의 삶은 훨씬 제한된 경험에 국한되어 있다. 우리가 테니스를 치면서 뉴톤역학방정식이나 양자역학 방정식을 풀지 않는 것처럼 한정된 경험을 하는 개인의 삶에서 가장 정교하지만 복잡한 가치 판단의 체계가 필요하지는 않다. 국수집을 경영하려고 경영학 박사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보편적이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이나, 우리의 코앞에 있는 문제로 부터 한없이 멀어진다. 국수집 주인은 국수집 주인의 철학이 있으면 그만이고 학교 선생님은 학교 선생님의 철학이 있으면 기본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 사실 개인적 능력과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모두가 일반 상대성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모두가 가장 정교한 철학을 공부할 시간과 재능이 있을 리 없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상황이 이랬다. 문제는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우리가 그런 태도를 지키기 어려운 환경에 있다는 것이다. 한 세대 정도의 시간안에서 사회적 환경이 급변하는 시대는 개인들을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다. 그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가치판단체계 때문에 결국 모든 가치판단을 남에게 의존하게 되거나 도저히 이해도 안 되는 복잡한 이야기에 매달려야 한다. 

 

맺는말

 

상식의 중대한 원천은 가치판단을 내리는 권위다. 삶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는 어떤 권위에서 솟아나는 상식을 목격하고 습득하고 있다. 그 권위는 가정의 권위고 조직의 권위고 사회의 권위일 수 있다. 불행한 것은 이 원천이 매우 불안정할 때이다. 어떤 부모들은 가치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위선적이고 자기 일관적이지 않다. 그래서 하루는 이유없이 아이들에게 상냥했다가 하루는 이유없이 아이들의 작은 잘못에 미친 듯이 화를 낸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이들은 불안한 상식적 기반을 가지게 된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으며 필사적으로 그 이유를 찾지만 그 결과는 대개 만족스럽지가 않다. 나는 본래 못난 아이라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거나 어떤 기괴한 상식체계에 안착하여 거기에 머물지 모른다. 가정만 그럴것인가. 학교도 마찬가지고 사회도 마찬가지다. 상식의 원천인 가치판단에 대한 권위가 흔들리고 위선적이고 일관성이 없을 때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한국에는 식민지시대와 독재시대에 존재했던 권위들이 저지른 일들 때문에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종종 자학적 인간관, 국민관을 가진다.

 

상식은 쉽게 무너뜨려도 안 되고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다. 대개 개인의 재능과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거대한 비약을 함부로 시도하고 자신이 가진 상식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경우 그 사람의 행동은 자기 분열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설사 할 수 있다고 해도 남의 상식체계를 대책없이 고치고 뒤흔드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니다. 자기 혁명은 자기가 해야 한다. 사려깊지 못한 진보주의자는 옛 집을 부실 뿐 들어가 살 새 집을 주지 않는다. 사실 그들 스스로가 기계주의적인 논리 중독에 빠져서 일관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들은 매우 편협하게 한 가지만을 말할 때가 많다. 그들은 전체적인 정신적 균형보다는 한 가지 분야의 시시비비에 종종 몰두한다. 마치 우리의 정신은 이런 저런 부품들을 단순 조립하면 만들어 지는 것같다. 전체적 통일성은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속에서는 망각되기 쉽다. 상식이란 통일된 시스템으로 존재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살인범이나 아동성폭행범들이 자기 변명을 위해 진보적 논리를 써먹는 일도 많다프로이드의 이론도 범죄자들에 의해 나는 아마도 아버지의 학대 때문에 정신적 장애가 있어서 이런 일을 하나보다라며 남용 있다남녀평등에 대한 이야기도 결혼이라는 굴레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바람둥이들이 자신의 연애 행각을 변명하는 자주 쓰인다서구식의 독립적 생활 태도를 주장하는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로부터는 당연한 듯이 도움을 받아 챙기는 경우도 있다이런 경우들에서 진보적 사고새로운 지식은 오히려 독이 되고 있다그것은 진보를 위한 새로운 윤리적 규범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있는 윤리적 토대를 해체하여 이기적인 인간을 양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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