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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가치판단에 대하여

연작 에세이 6 : 과학의 특징들

by 격암(강국진) 2009. 11. 23.

머릿말

 

과학은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큰 성취중의 하나다. 측정과 수학적 법칙의 발견을 통해서 인간은 이 세상에 대한 데이터를 다루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화와 미신적인 사고로 가득 찬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사회는 불투명성이 가득하고 부패가 넘치기 쉬우며 원칙은 실종되기 쉽다. 

 

과학의 영향력이 매우 큰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 사고에 익숙하다. 설사 그렇게 의식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현대사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과학적 논리에 크게 의존하면서 돌아가고 있다.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일에서 직장에서 하는 업무, 세금을 내고,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모든 일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의 시스템은 우리에게 과학적으로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과학은 만능도 아니고 부작용도 있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며 따라서 과학적 사실들로만 채워진 세계에서는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 과학적 논리에 중독된 사람은 혈육간의 정도 잊어버리고 심지어 자신의 감정도 물건 다루듯, 어떤 감기 증상 다루듯 냉정하게 조절한다. 우리는 성공을 향해 뛰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쉽게 발견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계가 된다. 과학은 빈틈없는 실험과 논리에 기초하기 때문에 저항은 대단히 힘들다. 우리는 어영부영 반대할 수 없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쉽게 논박당하며 따라서 과학적 논리대로 행동하도록 강요당한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 자체의 문제라고 여기고 과학적 사고를 극복하거나 해체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과학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오늘날 과학에 대한 대중적 이해는 진정한 과학에 대한 오해로 인해 비합리적인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쩌면 과학이란 이것이 과학이라고 확실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기 보다는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더 알아가야 하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어찌되건 현재의 과학과 대중 문화속에 나타난 과학은 우리의 제한된 과거 경험에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특징들은 특히 가치판단에 관련해서 문제를 만든다. 

 

과학의 특징 1 : 보편성

 

철학의 재구성을 쓴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는 현대 과학이 가지는 한가지 특징을 시공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즉 과학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보편성을 가진 법칙을 찾으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리학은 뉴튼의 운동법칙이나 중력법칙을 통해서 천체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설명해 내는데 성공함으로써 이런 접근방법이 매우 성공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물리학은 오랜간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과학 분야로 여겨져 왔다. 지금의 과학문화는 대개 측정으로 얻은 데이터에서 간결하고 보편적인 수학적 법칙을 찾아내는 방법이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물리학의 과거를 통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통해서 과학문화가 가지는 특징을 최소한 두가지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과학은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과학은 측정될 수 있는 것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특징은 언제나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한국인에 대한 보편적 지식중의 하나는 한국인의 평균 몸무게나 한국인의 평균소득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를 보다 보편적으로 만들어서 전세계인의 평균 몸무게나 전세계의 평균소득같은 수치를 고려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보편성을 추구하면 할 수록, 즉 더 광범위한 일반적인 상황들에서 생기는 데이터를 모두 함께 고려하면 할 수록 우리는 우리가 당면한 특별한 상황과 멀어지게 되고 따라서 우리의 삶으로 부터 멀어지며 가치평가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 당신이 어떤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는데 그 남자의 소득이 전세계 평균소득보다 크거나 작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당신이 우연히 부자나라에서 태어났다면 그 남자의 소득이 전세계 평균보다 크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반대로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작다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의 주변에는 똑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아서 이것은 마치 당신의 결혼상대가 눈이 두개라는 사실이 결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같은 질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조금 더 과학적으로 보이는 예를 생각해 보자. 우리 앞에 물 한 잔이 있다고 하자. 물은 물분자로 되어 있고 물분자는 수소원자 두개와 산소 원자 하나로 이뤄져있다. 이런 것이 소위 과학적 사실이다. 우리가 이같은 사실을 부정하기란 불가능하거나 매우 힘들다. 다시 말해 이같은 사실은 우리가 보통 진리라고 부르는 것에 매우 가깝다. 이 말은 누가 들어도 옳다. 

 

하지만 이런 보편성은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진 물 한잔에 놓여진 수없이 많은 특수한 의미를 제거한 끝에 우리는 보편성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그 물 한 잔은 몸이 아프신 어머니가 애써서 입시공부하는 자신을 위해 퍼온 물이었다. 그 물 한잔이 정말 단순히 물분자로 이뤄진 물이고 따라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가져다준 물이나 내가 직접 떠온 물과 같은 것일까? 

 

우리는 이 예를 통해 왜 과학이 가치중립적이 되는지, 왜 과학이 매우 강력한 지식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많은 경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지를 알 수 있다. 

 

과학적 태도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전에는 사람들은 비과학적으로 생각했더랬다. 즉 신령한 우물에서 퍼온 물에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는 식이다. 물한잔을 어머니가 떠오면 그 물에는 어머니의 기가 깃들어 있다는 식이다. 물 한 잔을 두고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미신이라고 부르고 그런 스스로를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위의 예를 통해 우리는 때로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과학이 보편성을 추구하는 특징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어머니의 특별함을 알지 못하게 한다면 그게 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과학이 미신과 환상을 물리친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과학의 특징을 생각하지 않고 과학에 중독되는 것은 마치 누군가가 장래 진로를 고민하는데 그 사람에게 1+1=2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1+1=2라는 지식은 옳은 말이고 보편적이다. 그렇지만 진로를 선택하고자 하는 그 특정한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과학은 보편적 법칙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히 보편성의 가치를 아주 크게 강조하게 된다. 이런 태도에 중독될 때 우리는 우리 눈 앞의 특수한 상황을 오히려 이해 할 수 없게 되고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없게 된다. 단 하나뿐인 나 자신과 자기 주변과의 관계의 의미를 알지 못하게 된다. 

 

과학의 특징 2 : 관념적인 것의 무시

 

과학은 흔히 관찰되고 측정된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믿음은 이미 양자역학이 만들어지던 20세기 초에 과학자들 스스로가 부정한 것이다. 양자역학의 창시자중 하나인 하이젠베르크는 부분과 전체라는 책을 썼다. 그는 그 책에서 일찌기 20세기 초에 아인쉬타인과 관찰과 이론의 관계에 대해서 토론한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그 대화에서 아인쉬타인은 관찰이 이론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이론이 우리가 뭘 관찰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양자역학은 이런 지적에 크게 힘입어 발달한 물리이론이다. 

 

하지만 21세기인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을 일방적으로 관찰에서 출발되는 행위로 이해한다. 오늘날에도 사실이 중요하다면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을 모으면 그것이 세상에 대한 진실을 보여준다고 사실을 확인할 것을 거듭 강조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예를 들어 팩트를 강조하는 기자들은 여기서 이런 단순한 과학도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이나 관찰을 강조하면 할 수록 우리는 관찰할 수 없는 것, 측정할 수 없는 것을 무시하게 된다. 관념은 허깨비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고 물질적인 것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우선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측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우리가 지금 모르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게 되기 쉽다.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나라별로 그 나라가 얼마나 민주적인가를 평가해서 순위를 매길 때가 있다. 민주적인 것을 평가하는 기준이 옳건 그르건 확실한 것은 민주주의가 뭔지 전혀 모르면 그런 기준을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는 전혀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과학적으로 민주주의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여기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산이 있다고 하자. 이 산의 나무며 돌이며 풀이며를 모두 가져다가 샅샅히 과학장비로 무게를 달고 분자구조를 분석한다고 한들 그 안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이 산은 너무 아름답다, 이 산의 나무와 돌과 풀에는 모두 아름다움이 스며들어 있다고 말하고는 그 산에서 조그만 돌조각 하나를 가져다가 추억과 그 여행의 상징으로 삼는다고 하자. 이것은 미친 짓이거나 문명적으로 뒤쳐진 인간이 가지는 생각일까? 과학적으로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과학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볼 때 우리는 때로 우리가 말하는 뭔가를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뭔가로 새롭게 정의하고 바꿔치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의식을 연구한다고 해보자. 의식의 정의는 무엇일까?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그러니까 어떤 과학자는 은근 슬쩍 그걸 뇌세포의 활동수준으로 말할 수 있다. 뇌세포의 활동은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은근 슬쩍 섹스로 바꿀 수 있다. 섹스의 빈도수는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의식이고 사랑일까?

 

우리가 보고 듣고 측정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는 것은 대개 관념적인 것을 무시하는 일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종종 무게도 나가지 않고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민주주의 같은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돈을 들이고 희생을 한다. 인간의 평등이나 자유는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에 가서 옛 일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런 곳에는 흔히 민주화 역사의 영령들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미국 워싱턴에 가보면 링컨이니 마틴 루터킹이니 참전용사들에 관한 기념물들이 늘어서 있다. 외계인들이 어느 날 지구에 온다면 그런 기념물들과 이집트의 피라미드며 귀신을 모시는 사당들이 서로 전혀 다른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현대 과학이 발달하기 훨씬 전의 사람들의 글들을 보면 우리는 옛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지능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기는 커녕 우리는 여전히 플라톤이나 예수님이나 부처님의 말을 공부한다. 우리는 그들을 미개한 야만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쉽사리 과거 사람들이 믿었던 비과학적인 것들은 그저 과학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미신이며 과학적 사고로 간단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진실은 정반대일 수 있다. 과거의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을 덜 가지고 있었던 대신 우리가 보지 못하는 유령과 정령을 사방에서 볼 수 있었다. 과학적 지식에 중독된 우리는 그들이 보던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을 어리석다고 비웃는다. 그들이 산과 들과 집을 볼때 그것들은 의미로 가득차 있었다. 우리들중 많은 사람들은 그저 분자조각들만 본다.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보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들을 비웃는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실은 과학이야 말로 가장 추상적인 관념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측정되거나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순진한 과학적 태도를 유지하면 나중에는 과학도 무시하게 될 수 있다. 뭔가 엉뚱한 것을 사실이라고 굳게 믿어서 자신만의 엉뚱한 미신을 만들고는 그걸 진짜 과학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이 경험있는 과학자에게 당신이 과학을 아냐고 외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유물론적이고 사실 중심의 사고를 하는 사람은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과학을 부정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가 하는 일들

 

진정한 과학자가 되지 못한 과학의 맹신자들은 우리가 모든 것의 본질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차차 가치있는 것이 뭔지를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과학적으로 말해서 나와 우리 아이는 아무런 연결점이 없다. 내 유전자를 주었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지 그걸로 무슨 의미가 탄생하지 않는다. 나는 왜 아이를 사랑하는가. 냉엄한 과학적 논리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아이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거나 유전자의 속박 때문에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포유류의 하나인 나는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보내는 아이의 표정에 현혹되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돌봐주고픈 욕망을 느끼게 설계되어 있다. 아이를 볼 때 우리의 머리속에서는 화학물질이 분비되고 온몸에 세로토신이 가득찬다. 

 

남녀간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유전자가 가진 종족번식을 위한 기능 중의 하나이다. 이성들은 서로에게 성적으로 이끌리고 아이를 낳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러므로 남녀간의 사랑이란 기본적으로 섹스다. 

 

내 아이나 내 연인뿐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떨어져서 영원한 타인이 된다. 거기에는 아무 연결점이 없다. 우리는 그들의 본질을 알고 있다. 그들의 본질은 단백질과 지방과 칼슘덩어리이며 유전자가 만들어낸 물질이며 포유류이다. 그들은 황인종이거나 흑인종이거나 백인종이며 미국인이거나 한국인이거나 일본인이다. 이런 것들이 그들의 본질이다. 

 

이런 객체화의 과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타인이 된다. 우리의 팔다리를 객체로 보는 순간, 우리의 팔다리는 기계로 대체되어도 상관없는 것이 된다. 한번 자신의 손을 보라. 손이란 무엇인가. 근육이 있고 피부가 있고 뼈대가 있으며 신경조직이 어떻게 그 손을 움직이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혈관이 피를 어떻게 나르고 공기와 영양분을 어떻게 나르는지 알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손을 전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은 이제 진정한 우리의 일부가 아니다. 손은 더 이상 나와 상호작용하면서 나를 결정하는 미지의 존재가 아니다. 손은 그저 명령을 내리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기관일 뿐이다. 그건 기계로 대체되어도 상관없으며 우리는 결국 그것이 더욱 강력하고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대체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산과 들과 강이 뭔지 전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것들을 간단히 다른 무언가로 교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원한다면 회복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는 그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얼굴을 객체로 보는 순간 우리의 얼굴도 그저 물건이 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더 멋진 얼굴로 바꾸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것들은 그저 물질, 마스크 같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자아의 한 조각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미 우리의 자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객체로 보는 순간, 심지어 우리의 감정조차도 남들의 것과 교환하거나 기계의 반응과 교환할수 있는 존재가 된다. 무언가를 객체로 만들고 그것의 본질, 그것의 작동원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것들의 가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약물이나 각종 방법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조작한다. 멋진 감정으로 우리를 채우려고 노력한다. 기쁜 감정은 이렇게 만들고 낭만적인 감정은 저렇게 만들고 실연의 감정은 저렇게 대처하면 된다. 이제 감정도 슈퍼마켓에서 사는 생선 한 마리 두부 한 모처럼 소비하고 사들일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무한히 작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팔다리를 이해한 순간 그것은 우리의 자아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을 이해하는 순간 눈은 비데오 카메라와 다르지 않은 객체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금새 뇌가 되고 마는데 사실 이것도 끝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피질이며 운동피질을 이해하고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는 변연계나 언어중추를 이해해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모든 것이 이해되어진, 교체가능한 기계가 되고 나면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해서 과학적인 결과, 과학적인 해석이 그것의 본질이고 그것의 전부가 되지는 않는다. 제 아무리 훌룡하거나 중요한 사람이나 아름다운 미인이 있다고 한들 그 사람을 물질 과학적으로만 본다면 거기서 의미는 사라진다. 한 명의 아내는 다른 한 명의 다른 여자와 같은 값어치를 가지고, 객관적 평가로 보았을 때 그녀가 더욱 아름답다면 젊고 예쁜 새로운 여자가 더욱 좋은 선택이 된다. 

 

우리는 이렇게 황당하게 사고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사회 시스템이 기계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강요한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라. 대중 매체에서 날마다 뭘 보여주는가를 생각해 보라. 오늘날 사방에서 사람들은 평가되고 숫자가 매겨지고 비교된다. 수산 시장에서의 생선과 다르지 않다. 자신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만 이렇게 행동하고 사고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과학은 우리를 그저 우리를 둘러 싼 환경의 일방적인 소비자가 되게 만든다. 

 

맺는 말

 

유령을 부리는 능력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마술사라고 할 것이다. 히틀러가 사람들을 이끌어 전쟁을 일으켰을때 사람들은 그가 마술을 부리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고 들었다. 그것은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유령을 만들어 낸다.

 

우리나라 여기저기에는 그리고 전세계 여기저기에는 원숭이바위니 큰 바위얼굴이니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 지명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풍경은 처음에는 그렇게 명확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 저기 해골바위가 있다고 말한 순간 우리는 거기서 해골을 본다. 일단 전에는 보이지 않던 그것을 한번 보게 되면 보지 못하게 되기가 힘들다. 

 

히틀러나 마르크스같은 사람은 남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만든다. 그들이 손을 들어 해골바위다 라고 외치는 순간 많은 사람들 앞에 해골이 나타난다. 그 해골은 이제 너무 명확한 실체가 된다. 해골이라는 유령을 불러내어보게 하는 능력은 과연 마술이다. 그 해골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문화적으로 뒤쳐진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마술사 중에 가장 강력한 마술사중의 하나가 바로 과학자다. 뉴톤이나 아인쉬타인은 모두 마술사다. 그들도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만들었다. 과학이라는 이 마술은 너무도 강력해서 사람들이 거기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과학이 나쁜 것은 아니다. 자동차는 수많은 사람들을 교통사고로 죽이지만 자동차가 사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편리한 도구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 문명을 버려봐야 우리는 아주 불편하게 살 뿐이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자동차를 사람 다니는 길에서 몰아서는 안된다. 

 

물 한 잔은 분명 과학적으로 물 한 잔일 뿐이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실험을 하면 그것은 다른 물 한 잔과 다를 것이 없다. 과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과학적 사고의 뒤에는 반복해서 들리는 가정과 습관과 말이 있다.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 중요하고 주관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신만이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것에 어떤 정의를 붙이고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천년전의 수학자가 증명한 수학공식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여기서 사실이면 어디서나 사실이어야 한다. 따라서 미국에서 사실인 주장은 한국에서도 사실인 것이다. 이런 보편성의 주장은 세상에서 의미를 빼앗아 간다. 과학적으로 말해서는 우리의 어머니는 그저 다른 한 명의 인간과 아무 차이가 없다. 

 

제이콥 브로노프스키는 <인간의 정체성>에서 과학은 문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언어로 취급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과학이 유일한 언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완결되어진 형태로 제시될 때 과학은 불확실성이 전혀 없는 것같지만 그렇지 않다. 일상 언어에 있는 단어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 때가 있듯이 기존의 과학이 가진 개념들도 모호함을 가지고 다시 해석된다. 예를 들어 에너지는 본래 추상적인 수학적 존재를 가르키는 말이었는데 그것이 질량처럼 우리가 보다 구체적으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허공에 그은 선이 편리를 위해 임시로 그어놓은 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학적 사실은 실체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절대적 선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과학과 자기를 성찰하면서 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그 임시의 것들을 지워가는 작업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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