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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가치판단에 대하여

연작 에세이 8 : 현대인의 문제

by 격암(강국진) 2009. 11. 23.

머릿말

 

현대인들은 반복되는 문제를 겪고 있다. 우리들은 대부분 우울하다. 우리들은 대부분 너무 바쁘다. 우리들은 종종 삶이 의미없는 것처럼 느낀다. 왜 그런 것일까.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삶이냐>에서 무한한 진보라는 위대한 약속  –자연의 지배, 물질적 풍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방해받지 않는 개인적 자유의 보장, 모두가 상류층으로 살 수 있다는 꿈- 은 환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달았다.

 

첫째,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둘째, 자기가 독립된 주인이 된다는 꿈은 우리의 사상, 감정, 취미가 정부와 산업, 그리고 이들이 지배하는 매스미디어에 의해 조종되며, 우리는 모두 관료적 기계장치속의 톱니바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면서 끝나버렸다. 세째, 나라와 나라간의 빈부격차 그리고 나라안에서의 빈부격차는 늘어만 간다. 넷째, 기술적 발전은 모든 문명의 공멸을 가져올 정도로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의 양식과 존재의 양식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존재의 양식을 이해하고 그렇게 살 때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처방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현대병에 대한 진단은 이미 백년 이상 전부터 내려져 있다. 1936년에 나온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기계의 일부가 되어 작업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의 일반대중이 오늘날 이 문제를 깊이 자각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현대의 한국도 대화 없는 가정, 감정표현이 없어진 기계적인 가장, 권위주의가 더더욱 사람들을 기계로 만드는 것을 강화하는 사회의 모습이 넘쳐나는 곳이 아닌가? 기계여야 한다는 당위성과 기계일 수 없다는 반항심이 충돌하고 있을 뿐 이 전쟁에 평화는 좀 처럼 오지 않는다.

 

기계에 익숙해진 사람들

 

앞의 이야기들에서 분명해졌어야 하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가 그 자체로 거대한 기계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정밀한 기계다. 기계는 부속품으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그 부속품들이 고장이 나면 기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전체 기계가 멈춰선다. 따라서 사회는 그 부속품들이 고장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도록 최선을 다한다. 우리들은 그런 기대를 담은 메세지에 익숙하다. 직업정신을 발휘하라, 프로가 되라 같은 말 말이다. 자기가 맡은 몫의 일을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 하는 정신을 우리는 교육받고 실행한다. 내가 망가지면 온 사회가 멈춰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비극을 피하기 위해 성실히 일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사회라는 기계는 이제 엄청나게 복잡해서 각 부품이 엄청나게 정교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수학공식처럼 내구성이 무한하지 않고 쇠로 만들어진 기계도 아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기계는 현실사회에서 종종 아주 빨리 소모되고 만다. 보통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직업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우가 좋은 이유는 그만큼의 댓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복잡한 기계는 아주 전문화된 부품을 요구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수십 년 간의 훈련과정을 통과해야 적합한 인재가 된다. 즉 적합한 부속품으로 만들어진다. 그러고 나면 엄청난 부하가 그들에게 퍼부어지고 결국 그 사람은 고작 몇 년 후면 교체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물론 그 댓가로 그들은 편안한 노후를 보장받는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사회는 괜히 거대화되고 복잡해진 것이 아니다. 그만큼 더 많은 것을 생산해 내는 능력을 키웠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이런 작업에 들어갈 재원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는 각 부속품들이 자기몫을 하고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이지 그것이 무슨 부속인지 부속품이 행복한지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따라서 부속품들의 재고가 있는 한 각 개인은 교체 가능하고 표준화된 똑같은 존재일 뿐이다. 과학적인 논리로 만들어진 기계는 사물을 물질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측정가능한 것의 보급에는 신경을 써주지만 그 이상의 것은 사회의 책임으로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개인이 교체가능한 복제품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문제다.

 

오늘날 어떤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대개 극한의 훈련과정을 요구하고 막대한 작업의 부담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강력한 직업의식 즉 부품의식을 가진다. 스스로를 그 직업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직업에서 시대에 뒤지거나 능력이 다한 경우 커다란 정체성 혼란을 겪고 사회로부터 버려졌다는 사실을 이전 보다 더욱 견딜 수 없어한다. 

 

점증하는 비극

 

오늘날 현대인의 비극은 오히려 더욱 더 커지는 것 같다. 사회적 변화의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사회적 구조의 복잡성도 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오늘날 세상이 전보다 빨리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대간의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현재 그러니까 2009년보다 한 세 대전인 25년전을 생각해 보자. 1984년에는 핸드폰이 없었고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았으며 한국사람은 해외여행을 가고 싶으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갈 수 있었다. 생수를 사 먹는 일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고 여배우들이 누드 사진을 찍으며 젊은날의 추억 운운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일본과의 사이는 지금보다 훨씬 나빠서 일본 제품을 쓰는 사람을 매국노라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아직 냉전시대가 계속되고 있었고 우리나라가 중국과 사이가 좋아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전문화된 부품으로서의 개인에게 심각한 문제다. 전문화된 인간은 단시간 내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경우 자신의 역할을 바꾸기 쉽지 않다. 직업의식을 가진 인간은 변화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그 직업이 바로 그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시야가 국경선을 넘어 세계로 퍼졌을 때 사회는 새로운 부품을 외국에서 발견한다. 예를 들어 농산물은 외국에서 생산해서 가져오는 쪽이 더욱 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렇게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기술산업 쪽에서도 이른바 아웃소싱이라고 해서 외국의 인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아니면 아예 외국으로 공장을 옮긴다. 

 

어떤 전공이, 어떤 직업이 전망이 좋다고 해서 그걸 위해 전력을 다해왔는데 그 사람이 졸업을 할 무렵이 되니 세상이 전부 바뀌어서 그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사람들은 큰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그런 일이 요즘에는 늘상 일어난다. 누구도 10년 20년 후의 일을 예측할 수가 없는데 하나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교육은 장기간의 투자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 복잡성쪽은 어떤가. 복잡성은 시장경쟁의 결과로 증가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더 커다란 시장이 하나로 통합되기 때문에 변화가 없다면 일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니콜라스 타레브는 <블랙스완>에서 이런 예를 소개한다. 축음기가 나오기 전에는 이탈리아의 도시마다, 식당마다 가수가 있었다. 아무리 인기 좋고 목소리 좋은 가수라도 같은 시간에 여러 곳에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보통 실력의 가수도 작은 도시의 작은 식당에서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축음기가 나오자 대개의 가수들은 퇴출되고 만다. 최고의 가수의 노래를 축음기로 듣는 것이 더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흔해지고 인터넷이 나오기 전에는 동네마다 장사를 각자 할 수가 있었다. 가격비교가 어렵고 먼 곳까지 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인터넷이 가격을 모두 비교해 주고 자동차를 타고 가면 되기 때문에 정확히 같은 서비스라면 단 한 곳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시장에서 퇴출된다. 더구나 인터넷 주문이 가능한 상품이라면 이제 장소는 그리 상관없어진다.

 

퇴출된 사람들은 뭘 할까? 그들은 세상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 살아남는다. 이제 보험도 몇 가지가 아니라 수십수백 가지로 보험설계를 한다. 자동차 타이어만 파는 게 아니라 세차 서비스와 합치고 휴게소를 운영한다. 수박도 그냥 수박이 아니라 유기농 수박이고, 유기농 수박중에서도 여러가지로 다르게 키워진 수박이 시장에 나온다. 생존을 위해서 우리는 차별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이런 과정은 전문화와 세상의 복잡성을 급격하게 증가시킨다. 무선통신과 인터넷의 발달, 세계화등으로 이런 과정이 최근에 아주 급격하게 일어났다. 즉 전문화로 가는 더욱 심한 압력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더욱 전문화되고 더욱 사회적 변화에 취약해진다. 아이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죽자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 교육비는 날로 비싸진다. 그러나 작은 사회적 변화에도 그런 교육의 효과는 크게 변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복권뽑기 같아진다. 잠 안 자고 공부해서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명문대학에 들어가거나 자격증을 획득하는 것으로 인생을 보장받을까 했지만 그런 계획은 종종 좌절된다. 많은 사람들은 사기당한 것같은 느낌을 받고 실험재료로 쓰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떨어지는 인간의 희소가치 

 

오늘날, 특별한 기술이 없이 쉽게 대체가능한 사람의 시장 가치는 날로 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세계무역을 통해 어딘가에 있는 후진국의 국민들이 훨씬 더 싼 값에 우리가 하는 일을 해서 우리를 대체할 때 우리의 시장적 가치는 떨어지고 만다. 외국인 노동자도 한국에 들어와서 주로 전문 기술을 요하지 않는 자리를 놓고 한국인과 경쟁을 벌인다. 빈부격차가 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대체가 쉬운 사람의 시장 가치는 상대적으로 보았을 때 더더욱 날로 떨어진다.

 

오늘날에는 기계화와 자동화도 급격히 이루어지고 있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전에는 수십 명이 하던 일을 한 사람이 해낸다. 아예 사람이 없어지고 기계로 대체되는 경우도 있다. 한 사람이 수십 명분의 일을 한다고 해도 일거리와 시장이 수십 배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 노동력의 희소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회라는 기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것은 더 좋은 부품을 구한 것이다. 이것은 더 싼 비용으로 할 일을 해내는 부품이고 인간이 부품역할을 하던것을 기계로 바꾸면 그 기계는 지치지도 않고 밤낮으로 일을 한다. 퇴직금을 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개인적 인간으로서의 가치도 떨어지고 있다. 이것이 더 심각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단순히 돈과 직장으로 해결하지 못 한다. 오늘날의 사회는 수없이 많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은 단순히 편리함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각자 개인으로서 가지는 존재 의미를 축소시킨다. 

 

전에는 집에서 밥을 다 해먹어야 하고 심지어 옷도 집에서 만들던 시절이 있었으며 새 걸 사더라도 기우고 수선해서 살던 시절이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이웃이나 가족만이 유일하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족과 가문이 중요시 된 이유는 그들에게 버림받으면 사회적으로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편리함을 얻은 대신 서로서로가 개인으로서 가지는 의미를 대부분 상실했다.

 

엄마와 자식간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자. 직장을 가지는 엄마, 편리한 시대를 사는 엄마는 종종 이렇다. 밥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해주거나 외식을 하거나 슈퍼에서 사오는 매우 간단한 것이다. 따라서 소위 엄마의 요리라는게 없다. 옷은 당연히 좋은 것으로 사다주고 돈은 벌지만 바쁜 엄마가 수선을 하거나 할 리없다. 그때그때 새 것으로 사준다. 집안의 청소도 아이와의 대화도 엄마는 할 시간이 없다.

 

이것저것을 모두 제외하고 나면 엄마는  (아빠도 마찬가지다) 결국 아이에게 있어서 돈을 지불해 주는 사람 이상의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 돈조차 직접주는 일이 없이 대개 통장에서 자동적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아이는 자신이 받는 교육에 엄마가 돈을 댄다는 자각도 약하다. 결국 엄마는 아이에게 의미가 거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엄마가 이런 현실을 싫어해서 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해도 문제다. 엄마는 컴퓨터나 오락기, 책, 영화, 연예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친구와 경쟁해야 한다. 한마디로 엄마는 지루하고 아는 것도 없다. 아이는 당연히 엄마에게 별관심을 두지 않으며 자신에게 최대한의 자유만을 주기를 바란다. 선물이라도 아이에게 안겨주지 않는 이상 부모는 따분한 존재이기 쉽다. 주말에 모처럼 가족끼리 한 집에 있어도 각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거나 어서 빨리 이 시간이 끝나고 각자의 시간을 가지기를 바란다. 엄마는 드라마를 보고 아빠는 골프를 치거나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아이는 오락을 하거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거나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웃도 친구도 연인도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더 좋은 조언과 도움을 사회적 서비스로 받을 수가 있다. 연인들은 종종 잠재적으로 연예인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천사같은 -종종 컴퓨터 조작과 수술의 도움을 받는- 여자들의 모습에 빠지는 남자를 보면서 여자들은 좌절감에 빠진다. 재벌도 실제로는 하지 않거나 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꿈속의 남자친구들을 티브이에서 보면서 남자들은 움츠러든다. 

 

이웃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핸드폰으로 인터넷으로 자동차로 우리는 언제나 먼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 우리는 대화보다 즐거운 오락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다. 차를 타고 먼 곳에 있는 보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만 사귈 수도 있다. 이웃은 거추장스럽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은 도둑처럼 몰래 나가고 몰래 들어온다. 이웃과 얼굴을 마주치면 당황스러워한다. 

 

서비스를 쓰는 게 다른 내 주변의 사람들을 대하는 것보다 편하고 만족스럽다는 사실은 주변 사람들이 내게 의미가 없어진다는 사실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쌍방향적인 것이다. 우리 자신조차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의미가 없어진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일본의 오타쿠 같은 사람이 되어 사회적 서비스에 둘러쌓인다. 우리는 대인접촉이 없이 자기 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오타쿠를 보면서 불쌍해하지만 자기 스스로가 거의 그 단계에 이르러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스크린 속의 연예인이 아니라 현실 속의 연인을 만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을 온갖 사회적 이미지 속의 존재로 인식하면서 만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마치 롤프레잉 게임 속의 두 게이머가 연극을 하듯이 만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두사람은 진정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서비스를 파는 영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결국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연인들의 복제품일 뿐이며 따라서 파트너는 쉽게 교체될 수 있다. 상대방이 나를 보면서 웃어도 그녀가 보고 웃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내가 행하고 있는 내가 아닌 행동들에서 연상되는 어떤 남자 연예인이라면 진짜 나는 그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단지 그녀에게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두 연인은 각각 연애 게임이라는 게임의 부속품이 되어, 사랑이라고 생각되는 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쉽게 소비되고 쉽게 교체된다. 

 

맺는말

 

전문화, 세계화, 복잡성의 증가는 피할수 없는 추세로 보인다. 그리고 엄청나게 복잡해진 시스템은 이제 한 인간의 이해력의 한도를 넘어선다. 비인간적인 결과가 발생해도 전체 사회라는 기계를 꺼버리지 않는 한 어떻게 그런 비극을 막을 방도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사회전체를 정지시킨다면 그거야말로 대비극을 불러올 것이다. 

 

이것들이 만들어 내는 비극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로 부터 탈출하자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즉 농촌으로 돌아가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살자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 이것은 좋은 답이 아니다. 그 공동체는 진정으로 사회로부터 분리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분리된 사회라면 그 사회는 첫째로 온통 미숙련공으로 가득찬 원시사회일 것이다. 둘째로 그 사회는 커지는 강대한 외부 사회라는 기계들의 침략에 아무런 방어능력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역으로 현실사회에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즉 돈은 현실사회에서 유산을 통해 받았든, 어떤 예술작품을 팔아서 벌든 다른 곳에서 공급받고 사는 모습만 마치 사회로부터 독립된 것처럼 사는 것뿐이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해결이 필요하지만 본질적인 해결이 안된다면 임시처방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이런 추세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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