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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가치판단에 대하여

연작 에세이 9 : 현대 한국을 위한 임시처방

by 격암(강국진) 2009. 11. 24.

머릿말

 

사회적 차원에서 말했을 때 현대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결국 올바른 문화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러나 문화는 그 자체로서는 개인에게 당장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고 궁극적인 답도 아니다. 그것은 결국 흉내내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대중 문화를 넘어 스스로의 윤리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그 사회에 튼튼한 윤리적 기초가 다져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은 현실에 대한 임시처방을 생각해 보자. 오늘날 우리는 뭘 어떻게 준비해야 살아 나가는 데 문제가 적을 것 인가. 어떤 사람이 높은 시장가치를 가지게 될 것인가.

 

진짜 인간이 드문 시대

 

현대 사회의 문제들은 그런 문제로부터 피해를 적게 받은 인간들이 희소 가치를 가지게 되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에 중독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모두 다리가 약해지면 다리가 튼튼한 사람이 희소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짜 인간들이 너무 많아져서 진짜 인간들이 희소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가치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가치 판단을 하는 능력, 박스 바깥에서 생각하는 능력, 시스템을 넘어서 볼 수 있는 능력이 희소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미디어가 종종 훌룡한 인간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의 특징만 봐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은 입시공부나 회사원으로서의 일상에 찌들어 본 적이 없는 듯한 인간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대인관계에 능수 능란하며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읽는 감수성이 뛰어나다. 그들은 동기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움직이며 주변에 행복을 전파한다. 그들은 진취적이며 창의성이 뛰어나서 남들이 시도해보지 못한 것에 과감히 뛰어든다. 한마디로 그들은 매뉴얼이 없고 지시가 없어도 뭐가 중요한지 재빨리 알아차린다. 그들은 가치판단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역사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는 과거의 어린 청년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때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과 같은 능력을 가지지는 않았겠지만 그걸 고려해도 그들은 지금보다 일반적으로 훨씬 독립적인 사고를 하고 강한 실천력을 가졌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유관순이 3.1운동에 참여하고 재판받아 사망했던 때의 나이는 17살이다. 김구가 동학혁명을 지휘하던 때의 나이는 18살이다. 서재필이 1884년 김옥균, 홍영식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병조참판겸 정령관이 되었을때의 나이가 18살이다. 빌게이츠가 마이크로 소프트사를 설립했을때의 나이는 20살이고 워렌버핏이 주식투자를 시작한것은 그가 26세일때의 일이다.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통령 정부를 세우고 종신통령에 취임했던 때의 나이는 30세였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청년들은 자기 일에 파묻혀 세상일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뭔가를 독립적으로 판단한다고 해도 그 규모가 매우 작다. 일제때는 국가의 독립과 자주를 논하던 중학생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자기가 갈 대학의 과도 자기가 정하지 못하는 고등학생이 대부분이다. 세상에는 커다란 어린아이들이 넘쳐난다.

 

사실 나쁜 예를 들자면 끝도 없다. 대학원이나 사회인이 되어도 자기가 자기 옷을 고르거나 직장을 선택하거나 배우자를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반드시 지적능력이나 학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뛰어난 우등생중에서 오히려 정도가 더 심한 경우도 많다. 그들은 교과서를 공부하고 시험보는 일에만 눈이 집중되어 즉 시스템에 매몰되어 정해진 일 이외에는 매우 취약하다. 

 

한국의 젊은 세대가 수동적이고 정치에 무관심하며 보수적이라 한심하다면서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있다. 자기의 삶에 대한 개인적 책임은 회피될 수 없는 것이지만 한 세대에 정말 어떤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시스템의 문제다. 초등학교부터 바쁘게 학원을 다니며 성장한 세대는 지금의 4-50대 이상의 과거 세대와는 다르다. 신 세대를 위한 교육환경을 만들고 그들을 그렇게 키운 것은 기성세대다. 각자의 인생은 결국은 각자가 책임져야 할 일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구세대가 신세대에게 책임을 말하는 것도 정당하지는 못하다. 신세대가 가졌던 환경이 구세대의 그것보다 모든 면에서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거대해진 시스템은 인간을 작게 만든다. 신세대는 그만큼 더 그런 피해를 입은 것이다.

 

진짜 영재 교육

 

영재 교육이란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영재 교육에서건 그냥 교육에서건 오늘날 교육에서 강조해야 하는 첫번째의 항목은 화목한 가족을 만들고 그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 이전에 종합적 인격의 모범이 될 존재와 인간적 교류를 하는 것이 아이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요즘은 그런 교육의 희소성이 큰 시대다.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자기 욕구를 가지며 일을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 강조된다. IQ보다 EQ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이 이야기다.

 

로보트처럼 일찌감치 부품으로 전문화된 인간은 결국 누군가의 수단이 될 뿐이며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가치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언제나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제외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보통 영재교육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에게 고등학생이나 대학교 수준의 지식과 수학적 기술따위를 가르치는 것을 연상한다. 하지만 얼마간의 재능이 있고 동기의식만 가지고 있다면 지식은 거의 혼자서 습득할 수 있다. 적당한 책만 제공하는 것으로 거의 충분하다. 기술을 강조하는 영재교육은 영재를 싸구려 부품으로 만드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진짜 중요한 능력은 가치 판단의 능력, 결단력이다. 자기의 미래를 스스로 열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진짜로 희귀해진 것이다. 

 

좋은 가족을 만드는 첫번째 해법은 가족들이 서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서로가 생각보다 재미있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가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의무적으로 대하고 부모와 자식이 의무적으로 만날 때 그것은 가족생활이 아니다. 그들은 먼저 서로서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겁다는 것, 서로서로 참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걷기를 생각해 보라. 걷는 것은 차를 타는 것보다 힘들다. 그러나 걷기를 하다 보면 산책도 재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케첩과 마요네즈로 범벅이 된 강한 맛의 정크 푸드에만 길들여진 아이가 채소의 맛이나 고급 요리의 섬세한 맛을 구분하려면 먼저 강한 맛을 주는 음식을 끊어야 한다. 

 

따라서 가족들이 뭉치는 첫번째 방법은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서로가 아니면 즐길거리가 없는 환경을 가끔 인위적으로라도 만드는 것이다. 핸드폰도 티브이도 컴퓨터도 만화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서 가족끼리만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처음에는 따분하기 짝이 없다. 그런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은 불평을 늘어놓는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하게 즐기는 것에 너무 중독이 되어져 있다. 음식을 직접 만들고 간단한 도구로 하는 게임을 즐기고 대화하고 산책하고 수영하면서 노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참다 보면 어떤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육식에 길든 사람이 채식의 맛을 알게 되는 순간처럼, 헤비메탈만 듣던 사람이 클래식의 맛을 알게 되는 순간처럼 가족의 맛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가족의 맛을 느끼게 되면 그것이 정서적으로 훨씬 만족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다. 

 

최고의 허니문은 멋진 낭만적 장소에 가서 낭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허니문은 둘 다 가보지 못한 곳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도와줄 사람 없이 떠나서 계획없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위험한 곳으로 가서는 안되겠지만 두 사람이 의존할 사람이라곤 상대방 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지는 것은 귀중한 경험이다. 이것이 가족을 만들어 가는 첫번째 단계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너무 편한 호화 리조트 같은 곳에 가서 느긋이 며칠 쉬었다 오곤한다. 이런 허니문은 본래 목적과는 조금 다른 여행이 되고 만다. 진짜 가족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부부가 싸움이 나면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가라고 나는 조언한다. 자동차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는 즐길 수 있는 것은 라디오나 음악 정도이기 때문에 부부는 결국 대화를 하게 된다. 서로에게 집중하게 된다. 대화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그런 환경에 있다보면 그래도 대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대화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극단적으로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에 갇혔다고 생각해 보라. 두 사람은 반드시 뭉칠 것이다. 

 

가족이 뭉치는 극단적인 한가지 방법은 우리 가족이 그렇게 했듯이 이스라엘 같은 먼 나라에 가서 몇년 사는 것이다. 부부가, 가족이 뭉치지 않을 방법이 없다. 모든 방면에서 서로 돕지 않으면 되는 게 없기 때문이다. 가족의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유일한 조력자이며 오락이라면 가족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 수가 없다. 단 여기서 도움은 상호 간에 이뤄져야 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환경은 바람직한 효과를 내지 않는다. 가족은 어려움속에서 하나가 된다. 물론 그런 상황에 불만을 품고 거꾸로 관계가 극단적으로 나빠지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시련은 이겨내면 기회고 패배하면 재앙이 된다.

 

자기 판단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은 다시 강조 될 필요가 있다. 남들이 모든 것을 간섭하면서 결정을 대신해 주는 교육은 그저 좋은 노예를 만드는 것뿐이다. 자기 판단력은 단순히 논리적 계산의 문제가 아니다. 논리적 계산은 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하며 항상 세상에는 더 똑똑한 사람들,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느낌을 가지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논리와 지식은 가져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에만 파묻히면 결국 남의 메뉴얼대로 사는 사람이 되고 만다. 아이의 일정을 일일이 부모가 짜주고 있을 때 아이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주는 스케쥴에 따라 사는데 익숙해 진다. 그리고 사회에 나갔을 때도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려달라고 스스로 부탁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적어도 지도자나 중요한 위치에 설 사람으로 가져야 할 특징이 아니다. 자기 판단력도 걷기와 마찬가지다. 미리미리 연습하지 않는다면 능력은 퇴화 될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할 일을 주면 그것을 하는 데에만 익숙해질 것이다. 다른 많은 것들처럼 이것은 아이에게만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여행은 새로운 환경에 우리 자신을 놓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사회가 만들어 내는 독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점심을 짜장면을 먹을지 햄버거를 먹을지를 판단하는 것도 판단의 연습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에 설 것인가도 판단의 연습이다. 다른 사람의 여행 기록을 꼼꼼히 연구하여 계획하거나 그룹을 만들어 누군가가 지휘하는 대로 하는 여행은 이제까지 말한 문맥에서는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그건 그 고장을 소비하는 것이지 자기에 대한 감각을 되살리는 여행을 하는 게 아니다. 이런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나고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모든걸 알고 가고 모든 걸 예측한대로 경험한다면 현대병의 치료효과를 기대할수 없고 판단력의 연습도 되지 않는다. 

 

선진국이란 무엇인가. 

 

선진국이란 대개는 소득이 높은 나라를 말한다. 그럼 왜 소득이 높을까. 국민들이 수입이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수입이 좋을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것은 그들이 전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쉽사리 그들을 대체할 수 없다. 

 

선진국에 전문가만 있다면 비전문가들이 하는 일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는 기계화와 기업화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전문화로 현대적 방식으로 닭을 키운다던가 하는 것이 예이다. 또 한가지 해결방법은 비전문적인 일은 전문성이 떨어지는 인력을 수입해서 해결하거나 외국에서 물자를 들여오는 것이다. 값싼 중국제 제품은 전세계에 퍼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문가라고 해서 공학박사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서비스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커피 한잔을 마셔도 세계최고의 재료로 세계최고의 방식으로 만들어 서비스하는 것 그것이 선진국의 커피숍이다. 그렇게 전문화를 하지 않으면 쉽사리 다른 사람에 의해 시장에서 퇴출된다. 

 

그런데 전문화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선진국이란 결국 사회적 보험장치에 의해 전문화가 가지는 위험성을 많이 제거한 나라일 수 밖에 없다. 어떤 전문가가 되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다른 직종에서 일하려고 한다던가 아니면 영영 실패하여 평생 좋은 걸 하나도 만들 수 없어도 사회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선진국이다. 실패와 패배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 선진국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일 안 해도 먹고 사는 곳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1등이 되는 데 실패하면 바로 죽고 사는 상황으로 떨어지고, 사회적으로 매우 모욕을 받는 상황이 된다면 전문가는 양성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특히 기성 사회의 규격을 넘어서는 좋은 아이디어와 사회적 기여가 나오기 힘들다. 모든 혁명적인 것은 완성되고 대중적 인기를 얻기 전에는 말도 안 되고 무모한 것이다.

 

소설가를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들이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면 노벨 문학상을 받을 만한 수준의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그럴 확률은 지극히 낮다. 그런데 실패하면 평생을 헤어날 수 없는 고통에 빠진다고 하면 그 길을 갈수 있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적을 것이며 훌룡한 소설가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 물론 어떤 사회든 꿈을 쫓는 일에는 위험요소가 있다. 다만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게 하는 쪽이 선진국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이런 면에서 선진국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같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권위주의가 팽배하고 사회적 편견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위아래를 매겨서 경쟁의 승자와 패자를 지독하게 구분한다. 외도를 하고 회사를 떠나 어떤 꿈을 쫓은 사람은 다시 본래의 생활로 돌아오기가 너무 힘들다. 일에 있어서 나이나 경력등이 매우 규격에 맞아야만 한다고 강조된다. 실패나 일탈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다. 

 

꿈을 쫓은 것도 아니고 단순히 사회적 변동으로 어려워진 사람들도 있다. 말하자면 본의 아니게 모범코스를 벗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복권뽑기를 해서 당첨이 안 된 사람은 다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우리 차례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사회분위기가 이러니 전문성을 추구하기 어렵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던가 새로운 꿈을 쫓아가 본다던가 자신의 주장을 펼쳐본다던가 하는 일을 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그러니 진정한 전문가가 크지 않는다. 그러니 사회 각 분야에서 뭐든지 적당히가 통하기 쉽다. 오랜 간 그 분야를 파고 든 전문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전문성으로 다른 나라와 경쟁력을 가지기 어렵고 선진국에게 수출을 하기도 어렵다. 

 

맺는말

 

현대인의 문제와 선진국이 되는 문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꼭 기억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복지를 자선사업으로 안다. 불쌍한 사람들 돕기가 복지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아니다. 돈을 벌고 싶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부자가 된 다음에 파이를 나누자는 둥 하는 이야기는 적어도 지금 한국의 단계에서는 유효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교육비를 못 내고 교육을 못 받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며 결혼을 하지도 아이를 낳지도 못하는데 선진국의 미래가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삼성이나 현대 같은 한국의 대기업은 과연 나중에 사원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엘리트를 잘 선발해서 키운다는 영재 교육의 방식은 선진국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 미래의 엘리트가 필요한 지식이 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뭐가 진짜 엘리트가 가져야 할 재능이 뭔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이다.

 

사실 진짜 지도자, 진짜 천재는 대개 기존의 개념에서는 괴짜나 실패자다. 뭐가 미래의 멋진 기획인지 당대의 사람은 모른다. 영재를 선발하고 계속 평가하는 과정에서 천재는 탈락하거나 떨어져나간다. 그저그런 로보트 영재를 만들어봐야 훨씬 좋은 환경에서 큰 선진국의 인재들과 경쟁해서 이기지 못한다. 그저 그들의 심부름꾼이 될뿐이다.  

 

유태인의 교육은 매우 높게 평가 받고 있다. 최근에 인구가 급증했는데도 전세계에 단지 천삼백만의 유태인이 있다. 그런데 노벨상수상자의 3분의 1이 유태인이다. 그럼 유태인 교육은 뭐가 틀릴까. 유태인들과 접촉하면서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그건 유태인들은 논쟁과 토론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기질상으로 남이 하는 소리를 한 시간 내내 조용히 듣고 있는 일이 없다. 나는 몇몇 국제 여름학교에 참여한 적이 있다. 백 명 규모의 대학원생이나 박사후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여름학교로 전문가를 위한 강의다. 나름대로 수강생을 선발해서 뽑고 이미 박사학위를 받았거나 받기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니 세미나 내용에 사전지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다. 거기에 유태인 학생이 7-8명씩 오는데 강의 시간에 질문하는 것의 반 이상은 이 유태인 학생들이 한다. 너무 질문을 많이 해서 시간 안에 강의가 끝나지 못하게 되는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나는 이스라엘 히브루 대학의 세미나에서도 학부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의것을 여러 번 느꼈다. 그들은 매우 전투적으로 논쟁하고 매우 비권위적이다. 이것이 유태인 교육의 비밀이다.

 

나는 인격적 모델이 될 사람과의 개인적 접촉을 통한 지혜의 전파를 강조했으며 그것도 일종의 교육 시스템이겠지만 진짜 영재고 엘리트라면 기성세대가 가르치려 드는 것부터 중지해야 한다. 그저 동료로서 스스로 판단하고 느껴서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권위주의부터 최대한 없애야 한다. 권위적인 구조아래에서 그들을 키울 때 그들은 그저 교육자의 조잡한 복제판이 되고 만다. 그 교육자의 능력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뛰어난 수준인가를 생각하고 복제판은 원본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들을 구속하는 영재교육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아이들은 좁은 물에 가두게 되는 것 뿐이다. 아이들은 질문하지 않고 외울 뿐이다.

 

교육자가 부모가 된 심정으로 아이를 대한다는 것은 현대의 환경에서 대부분의 경우 옳지 않다. 특히 아이가 초등학생 이상이라면 그렇다. 교육자는 부모가 될 수가 없다. 개개인의 학생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고 장기간에 걸쳐 인간적 유대를 나누는 일을 한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 의미의 스승이나 멘토가 된다는 것은 그냥 좋은 일을 하는 기부행위 같은게 아니라 상당한 책임감을 요구하는 일이다. 나는 해마다 수십명씩 새로운 사람들에게 스승이 된다는 식의 발상을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교육자는 아이들을 모두 구원할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며 이런 경우 권위적 스승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대개 무책임한 것이다. 몇마디의 좋은 문장은 충분치 않으며 결국 항상 오해를 낳는다. 설명도 없이 도덕경의 몇글자를 말하거나 양자역학의 몇가지 사실을 말해서 그걸 절대시하게 만들고 내버려두면 스승을 절대시하는 학생은 반드시 엉뚱한 길로 갈것이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이런 말들은 임시처방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각자가 사회적 보조나 다른 사람의 보조가 아니라 스스로 윤리적 기반을 단단히 갖춰서 홀로 설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그럴때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부축해줄 수도 있는 인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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