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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가치판단에 대하여

연작 에세이 11 : 무지와 신비감

by 격암(강국진) 2009. 11. 24.

머릿말

 

오래 전 좋아했던 여자를 오랜만에 만나본 사람이 있을까? 어릴 적 첫사랑이나 대학 신입생 시절에 좋아하던 이성을 말이다. 그런 경우 종종 사람들은 내가 왜 저 사람을 그렇게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단순히 세월이 흘러 그녀가 전과는 달라져 버렸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 더 많이 변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변했기 때문에,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고 그녀를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에 그녀는 달라보인다. 

 

그녀를 볼 때 무엇보다 달라보이는 것은 그녀에게 있다고 생각하던 신비로운 분위기, 어떤 광채다. 전에는 그녀가 웃거나 말을 하면 그녀가 마치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알지 못하는 전혀 이질적인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그런 것을 볼 수 없다. 거기에 있는 것은 그냥 한 여자다. 그것도 별다른 특징이 없고 뭔가 뻔하다는 느낌이 드는 여자다. 

 

신비함을 느낀다는 것은 뭔가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도시의 신비감

 

나는 주말이면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을 산보하고는 한다. 몇 주 전에는 우리집 앞의 공원을 가로질러 그 건너편의 오이즈미 공원을 관통하고 다시 거기서 전에는 가 보지 못했던 거리를 따라 걸었다. 집을 나와 공원으로 들어서니 뜻밖에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하나에 몇십 엔하는 것부터 몇백 엔 몇천 엔 하는 것까지 다양하게 있다. 돌아오는 길에 벼룩시장에 다시 들러서 아이들은 백 엔어치씩 장난감을 사고 따로 보드게임을 두 개 더 샀다. 아내는 긴 중고 부츠를 사고 메밀국수를 먹는 그릇세트를 샀다.

 

모르는 길을 따라 걷는 것의 가장 큰 즐거움은 이렇게 기대하지 않던 것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 날만 해도 우리는 벼룩시장 말고도 멋진 카페며 커다란 전자상가며 아주 아름다운 일본과자를 파는 가게를 발견했더랬다. 우리집에서 걸어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이런 가게가 있었는지 전에는 알지 못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더욱 늘리고 싶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는 일부러 복잡한 주택가 골목길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순전히 방향감각을 따라 걸었다. 우리는 그 길에서도 감이 열린 나무라던가 멋진 채소밭이라던가 대문 앞에 놓인 예쁜 개인형 따위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아는 길을 찾았을 때 우리는 길을 찾았다는 성취감에 즐거웠다.

 

일본은 고층아파트가 별로 없다. 우리나라는 대표적 주거 형태가 아파트이지만 일본은 저층 건물이거나 단독주택이다. 큰 길을 벗어나 뒷 길을 따라 걸으면 아주 다양하게 생긴 여러 가지 집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길을 걸어도 왠지 저기 모퉁이를 돌면 뭔가 아주 괴상한 집이 나타날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본에서 귀신 이야기를 하면 믿기가 쉽다. 이렇게 다양한 집들이 있으니 어딘가에 귀신이 나오는 괴상한 집, 버려진 집, 괴상한 가게가 있을 법도 한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가게, 몇몇 사람들만 알고 방문하는 조그맣지만 따스한 분위기의 가게도 어딘가 구석에 있을 법하다. 주택가를 걷다가 보면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서 중고차 가게가 있다던가 까페가 있다던가 아주 멋진 과자가게가 있다는 식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신비감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뻔한 것에 대해서는 제 아무리 엄청난 것이라도 금방 흥미를 잃는다. 생떽쥐베리가 <어린 왕자>에서 이야기했던 것도 그것이다. 그저 수많은 별들만 있는 것과 그 별들 중의 하나에 나만의 장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보는 밤하늘은 다르다. 우리는 왜 일등을 한 사람, 불패의 운동선수에 그렇게 열광하는가. 신비감 때문이다. 2등은 그 한계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등은 그 한계가 어디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신비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고층 아파트 숲이 점점 더 싫어진다. 모든 집이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이 생긴 집들이다. 게다가 사방으로 뚫려있기만 해서 거기에는 뭔가 신비가 숨어있을 만한 것이 없다. 아주 멋지게 조경을 해서 산책로를 만들어 두었다고 한들 신비감이 없다면 그 산책로는 조깅머쉰 위를 걷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저 운동을 위해 기계적으로 걷는 것이다. 뭔가 걸어도 걸어도 숨은 비밀이 있는 듯한 뒷산을 걷는 것과는 같은 맛이 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사랑

 

도시 같은 사물뿐만이 아니라 나무나 사람 같은 생명체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사랑은 거의 우리가 그것에 대해 느끼는 신비감의 정도와 비례하는 것 같다. 그 신비감을 증폭시키는 것은 두 가지 깨달음이다. 하나는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사물은 모두 변해 왔고 또 변해 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확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 자신은 전혀 변해가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우리 자신은 스스로에게 신비감을 잃어버린다. 우리 자신은 이제 변하지 않고 모를 것도 하나 없으며 어떤 미래에 대한 가능성도 닫혀 있는 그런 존재다. 이런 존재는 지루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없으며 가치가 없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종종 기계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을 주문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종종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수 없고 그들은 어제처럼 오늘을 오늘처럼 내일을 살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 때문에 놀라게 되는 때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못한다. 

 

신비감을 말한다고 해서 우리는 과학적 관찰이 보여주는 사실을 부인하라는 뜻은 아니다. 눈을 감고 환상을 펼친다고 호박 같은 얼굴이 절세미인으로 변하지 않고 구부러진 다리가 튼튼한 다리로 변하는 것도 아니다. 갑자기 천재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돈이 떨어져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없는 부모님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 모든 현실을 현실 그대로 인정해도 세상일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은 무한히 많다. 우리는 변해 왔고 변해가고 있다. 변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최악의 순간에도 거기에는 변할 수 있는 스스로가 있다. 보는 관점이 변하면 행복의 정도가 달라진다. 많은 유명한 위인은 불행한 순간과 좌절을 겪어서 능력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기에 남들보다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부당하게 투옥되었기에 거기서 공부를 하고 지혜롭게된 사람이 있고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남들보다 훌륭한 정신을 소유하게 된 사람도 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뭐가 될지는 모른다. 어떤 경우건 우리가 스스로에 대한 가능성을 믿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가 있다.  

 

우리가 이제 우리는 더이상 변할 것도 할 것도 경험해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탐구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꿈을 추구하는 인간이라고 종종 말한다. 그들은 지루하지 않게 삶의 다른 측면을 계속해서 탐험한다. 어떤 사람은 책속의 세계에서 탐험의 세계를 발견한다. 어떤 사람은 역사에서 어떤 사람은 사업에서 탐험의 세계를 발견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매일같이 보는 똑같은 정원에서도 무한히 많은 새로움을 발견한다. 평범한 봄비, 평범한 밥과 반찬, 거울에 비친 평범한 자신의 얼굴에서 무한한 신비를 본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끝없이 사랑하고 일없이 지루하지 않게 살 것이다. 그들은 사물의 뒤에 끝없는 신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에 대한 신비감

 

신비감을 포착하는 데에도 전문가가 있다면 그들은 예술가들이다. 우리는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그렇게도 즐겁고 흥미롭고 진기한 경험을 하는 것을 부러워 하지만 실은 그들은 같은 것을 봐도 일반인과는 전혀 다르게 본다. 그들은 사물을, 사람을 고정된 존재로 분석하지 않고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비감이란 핵심적인 가치다. 신비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예술가들에게는 아무 가치가 없다. 산은 그냥 산이어서는 안 되고 풀 하나도 그냥 풀이어서는 안 된다. 산은 신령해야 산이고 풀은 생명의 기적을 보여주어야 풀이다.

 

예술가는 자신이 만들어 낸 작품을 보고 자신이 감탄한다. 가장 훌룡한 작품은 의도하고 계산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힘이 나의 손에 작용해서 이런 것을 만들어 냈는가. 그것은 신비하게 느껴진다. 그들은 사물에서 숨겨진 의미를 발견해 낸다. 그러나 그것에는 여전히 무한대의 숨겨진 비밀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제 아무런 신비를 가지지 않은 가치없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많은 예술가들은 과학자들을 싫어한다. 과학자들은 신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손에 닿은 것들은 신비가 파헤쳐지고 이제 뻔한 것이 되고 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은 흉물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실은 진짜 과학자나 진짜 수학자야 말로 신비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과학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신비함이란 말에 질색을 하지 모른다. 역시 세상은 다 분자와 원자로 되어 있지 신비가 다 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런 사람도 E=mC^2라는 공식은 들어보고 무게도 없는 에너지가 입자를 만들어 낸다던가 시공간이 닫히는 블랙홀이 있다던가 전자는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양자역학의 이야기는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것은 전혀 관념적이지 않은 이야기다. 그리고 세상은 확실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진짜 과학자에게는 세계는 여전히 신비한 곳이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꼽힐 뉴턴은 스스로를  바닷가에서 놀면서 예쁜 조개껍질이나 작은 돌을 주어모으는 소년에 비유했다. 진리의 바다에는 무한한 진리가 남아있지만 자신은 그저 작은 사실들을 알게 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비감을 좋아하지 않으면 좋은 과학자도 될수가 없다. 자연의 신비를 느끼지 않는 과학자는 그냥 단순 기술자일 뿐이다.   

 

수학자가 어떤 문제를 풀려고 노력하고 있다. 시도해 볼 수 있는 가능한 가설은 거의 무한대이므로 단순히 가능한 답을 하나 하나 고려해 보는 것으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어떤 영감이 수학자에게 답을 가르쳐 준다. 이에 대해서는 프랑스의 수학자 포앵까레가 말한 적이 있다. 수학자는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는가. 수학자가 찾아내는 답은 어디에서 오는가? 치열한 논리적 분석과 증거들인가? 본질로 가면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직관에서 온다. 그 답을 발견한 경험, 눈앞에 이해의 문이 열리는 순간의 그 체험은 신비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예술가의 영감이나 수학자의 영감이나 본질적으로는 비과학적 비논리적인 것이다. 아인쉬타인은 이것을 두고 나는 답의 냄새를 잘 맡는다고 했다. 

 

진화론이 계속 의구심을 받는 이유는 그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수많은 부분으로 이뤄진 복잡한 시스템이 그저 무작위적으로 변태를 일으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수학적으로 말해 지수적으로 증가하므로 금방 실질적으로 거의 무한대가 된다. 그런데 많은 개체의 수, 많은 시간이라는 것은 늘려봐야 선형적으로 증가한다. 따라서 진화가 일어나기는 난 것 같은데 그것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비하게 보인다. 자연은 어떻게 답을 찾아냈는가?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도 신비를 느낀다. 어떤 집 나온 노숙자가 실의에 빠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집에 두고온 아이들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차마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갈등하는 그 순간 막내 딸이 항상 부르던 노래가 그가 서 있는 거리에 크게 울려퍼진다. 그에게 그것은 집으로 가라는 계시처럼 느껴진다. 그의 등을 떠미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을 그는 기적이나 계시라고 느낀다. 

 

모두가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사회문제에 참여하지 않는 것 같은 시대에도 우리는 이따금씩 사람들이 모이고 참여해서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을 목격한다. 역사의 진보, 사회의 진보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그런 순간 모두 감격의 놀라움에 빠진다.

 

신비란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모든 것이 어떤 거대한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한다. 모든 것이 조각조각나 있다고 말하는 과학적 논리는 그것이 착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장 훌룡한 과학자도 자신의 영감이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에 대해 의문을 표할 것이다. 과학의 발전을 만들어 내는 영감도 그런 일에 시간을 쓰게 만드는 동기도 신비감에서 나온다. 냉철한 논리밖에 없는 과학자라면 애초에 과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감의 현실적 유용성

 

내가 앞에서 한 말을 들을 때 신비감에 대한 이런 관념적인 이야기는 다 비현실적이며 듣기 좋은 철학적 문학적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말 신비감 따위는 돈 안 되는 헛소리이며 낭만주의자의 몽상일까? 그렇지 않다. 신비감은 오히려 가치의 핵심이다. 3백년 역사의 위스키를 판다고 할 때 팔리는 것은 단순히 맛과 품질이 아니다. 그 가격의 상당 부분은 신비감이다. 그 돈 안 되는 헛소리 같은 신비감 때문에 관광산업이 이루어지고 물건들이 팔려나가는 것이다. 

 

어떤 물건이 싸구려냐 아니냐를 정하는 것은 오히려 신비감이다. 신비감이 없는 것은 저질의 것이다. 선진국에서 대개 아파트가 싸구려 거주지로 생각되어지는 것이 이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신비감에 낼 돈이 없다. 더구나 사회가 덜 조직화되고 개발되지 않은 그들의 나라는 대부분 신비함이 넘친다. 그래서 신비감의 중요성이 덜 느껴지는 것이다. 선진국 사람들은 신비감에 지갑을 연다. 조직화와 개발이 흔해진 선진국에서 신비감은 가장 값비싼 것이다. 그들은 싸구려 모조품으로 똑같은 것이 무한대로 존재하는 그런 상품에는 돈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종로의 피맛골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커다란 도시의 한복판에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보석처럼 숨어있는 허름한 맛집 골목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 서울이란 도시가 가지는 신비감을 크게 증진시켜주었을 것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청계천처럼 콘크리트로 물길을 내서 단지 1분만 보면 신비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그런 장소를 만들었을 때 서울의 사랑스러움은 사실 그만큼 감소하고 만다. 그냥 뻔한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전국의 강들을 깍고 다듬어 단순한 어항으로 만들어 버리면 강도 또한 그 신비감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와 사연을 다듬은 장소가 아니라 그저 몇 년 전에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공원이 되고 만다. 죽어 없어지는 것은 단순히 자연과 그곳에 적응하여 사는 사람들의 삶뿐만이 아니다. 국토의 신비감이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그런 산천을 사랑하게 될 것인가. 

 

맺는 말

 

우리는 어떻게 세상의 신비를 느끼게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하는 능력을 가지게 될 수 있을까. 그건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가 세상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지루한 삶을 살 수가 없다. 매순간이, 매일이 진기함과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일 것이다. 

 

사실 아이들은 이렇게 산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은 낙천적이고 항상 웃고 있다. 작은 것에도 정신없이 웃느라고 말릴 수가 없을 정도다. 그들은 대단한 리조트 시설이나 해외여행이나 호화로운 음식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그들은 떨어지는 낙엽에도 웃는다. 그들의 세상은 아직 선입견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았다. 

 

어른들, 특히 나이가 많이 들어 이제 은퇴하고 생활의 변화도 없는 노인들에게는 종종 아이들이 필요하다. 늙는다는 것은 나이가 드는 것 이상으로 모든 것이 굳어지고 자리가 잡혀서 모든 것에서 신비감을 느낄 수 없다는 뜻이다. 젊다는 것은 아직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노인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행복이다. 빈 방에서 아무 궁금증도 없이 사는 사람은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 어제와 오늘은 같고 오늘도 내일과 같을 것이며 이미 아무런 할 것도 해 보고 싶은 것도 변화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이 날마다 다르게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은 그래서 큰 기쁨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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