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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가치판단에 대하여

연작 에세이 12 : 시작과 끝

by 격암(강국진) 2009. 11. 24.

소크라테스의 무지

 

<소크라테스의 변명>에는 왜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날 크레테의 한 무녀가 소크라테스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신탁을 받는다. 이 신탁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이 것이 사실일 리가 없다면서 사방으로 지식인, 정치인, 장인과 시인들을 방문하고 다닌다. 그는 신탁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을 발견하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그 신탁이 옳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례들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자신이 아름다운 것, 선한 것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알고 있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장인들은 분명 자신이 알고 있지 못하는 지식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지는 못했으므로 그 자신보다 현명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스스로가 훌룡한 장인이기 때문에 중요한 다른 일에 대해서도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걸 보면 역시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는 자신이 그들보다 현명하다는 것을 소크리테스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가

 

누군가가 우리에게 한국사람은 왜 이렇게 사나요라던가 좀더 개인적으로 당신은 왜 이렇게 사나요라고 묻는다고 해보자. 그럼 우리는 흔히 우리는 지금과 다르게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도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다.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그게 뭔지 알고 있고 그건 대개 우리의 의지에 반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싶으니까 이렇게 산다. 혹은 그냥 이렇게 사니까 이렇게 산다.

 

우리가 사는 모습 같은 복잡한 게 아니라 보다 작고 단순한 것을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우리가 차를 한 대 산다고 하자. 당신은 빨간 밴 하나를 골랐다. 나는 당신에게 질문을 할 수 있다. 당신은 왜 이 차를 골랐는가. 아마도 당신은 나에게 글쎄 그냥 이 차가 좋았어라고 말하거나 어떤 이유를 말해 줄 것이다. 이 차가 힘이 좋아서라던가 이 차가 멋있어서라던가 말이다. 그럼 나는 또 다시 물을 수가 있다. 왜 힘이 센게 다른 것보다 중요한가라던가 왜 이런 차가 멋있어 보이는가 하고. 이렇게 계속 질문해 가다 보면 금방분명해 지는 것은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가치판단과 선택을 하면서 사는데 그렇게 선택한 이유, 그런 가치판단을 내린 이유는 대개 결국은 글쎄 그냥 좋으니까 좋은 거 지라는 식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결국 처음에 글쎄 그냥 이 차가 좋았어라고 한 답과 차이가 없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이유를 모르는 어떤 틀속에 있기 때문이다. 눈 속에 벌거벗고 서있다가 얼어죽어가면서 내가 죽는 이유는 추워서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나는 왜 눈 속에 벌거벗고 서있게 되었는가를 답해야 한다.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가 살아 오면서 내린 많은 가치판단이 누적되어 생긴 결과다. 어떤 것들은 우리가 살면서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 최소한 당신은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선택이 가능한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가치판단을 하고 선택을 한다. 그런데 그것들은 전부 그냥 ‘어쩐지 그게 좋았어’가 아니었던가? 그 ‘어쩐지 그게 좋았어’가 쌓여서 지금의 우리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선택, 즉 매번의 가치판단이 누적되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생각해 봤을 때 우리가 보통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다. 물론 이런 문제를 생각해 봤을 때 당신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생각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중간의 길만 다른 게 아니라 종착지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에 물어야 할 것은 당신은 얼마나 가치판단의 문제를 스스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생각해 보았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뭔가를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어딘가에 갇혀 있지 않은가? 아니 모든 것은 그저 원래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부모가 우리에게 전해준 상식에 따라 살거나, 사회가 우리 머리 속에 넣어준 가치판단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다른 사람도 답을 모르는 것이 분명한 때에도 그저 주변 사람을 모방하며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아무것이나 선택해 버린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런 식의 해결 방법은 복잡하고 변화가 많은 오늘날에는 특히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쌓기만 하면 마음의 평화를 찾을 것인가? 가치는 사실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이렇게 사는게 아니다. 우리가 선택한 대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을 어떻게 내리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남들이 선택해준 대로 산다.

 

이해와 체험

 

나는 가치판단에 대해 여태까지 이야기해 왔다. 이미 사랑과 무지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 거의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나는 진짜 본론을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진짜 본론은 이해하고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의 상당부분은 그 체험을 쉽게 하기 위해 알고 있는 것을 지우는 작업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들도 지식이다. 그것들 자체가 체험과 같은 것은 아니다. 더구나 당신과 나에게는 나의 분명한 능력적 한계로 인해 내가 지울 수 없던 수많은 확신이 남아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형식의 책은 그 성질상 서론 형식에 불과할 수 밖에 없다. 각자의 자기성찰은 자기가 해야 하는 것일뿐더러 관련된 지식은 무한히 넓혀져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체험은 본질적으로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줄 수 있는 체험은 이 책을 처음부터 읽고 나와 대화를 하는 체험밖에 없다.  

 

누군가가 내게 본론을 단지 아는 것,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결론을 말해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아마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결론이라고 말할 것이다. 겸손하고 사랑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책을 처음부터 천천히 읽고 사색하며 그 결론에 도달한 사람과 그냥 결론을 본 사람은 전혀 같은 것을 보게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결론을 알거나 사랑이라고 이름 붙인 것의 이름을 듣는것이 아니다. 이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사랑이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전혀 다르게 쓰인다. 우리는 그것을 개똥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기를 느낀다던가 무엇무엇되기의 철학이라던가 하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해와 체험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아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치열하게 생각한 사람만이 자신의 무지를 안다. 사랑이 뭔지에 대해 아무리 읽어도 실제로 사랑에 빠지는 것과는 다른 것이듯이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름난 철학자들에 대한 지식을 쌓고 그들의 논리에 정통한 것만으로는 가치판단에 도움이 안 된다. 논리나 이데올로기나 개념은 수단이다. 이 책을 포함해서 글로 씌여진 모든 것은 고정된 것이다. 고정된 그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또다시 다른 어떤 시스템이나 기계가 우리를 구원하고 자유롭게 해줄 거라는 생각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잘 정의되고 논리적인 것 안에는 가치가 없다.

 

세상을 바꿀 혁명이 있다면 결국 그것은 개개인으로부터의 혁명이다. 각각의 개인이 모든 지식과 논리는 수단이며 그 자체로 목표가 될 수없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을 하는 것이 진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걸 바탕으로 시스템을 이용하고 기계를 이용해서 사회를 운영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멋진 말들도 실패할 것이다. 그건 결국 남이 내려준 가치판단을 따라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되지 못하고 기계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된다. 고정된 것에는 가치가 없다. 결국은 시스템을 넘어서는 사고를 하는 인간이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험이 필요하다.  

 

무지의 결과

 

우리는 모른다. 너무도 많은 것을 모른다. 우리 자신은 어떤 단어로 간단히 묘사되고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과 논리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나와 너를 구분할 때 우리는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을 그만둘 때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사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조화와 가치를 느낄 수가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순간 나는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답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라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침묵하고 홀로 있으라는 것이 답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 책임은 스스로가 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구원해 줄수 도 없고 그럴 의무도 없다. 구원하고 돕는 것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향하는 것이고 많은 자가 적은 자에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동등하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설 수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같은 것을 원하는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든 돕게 될 것이다. 불안한 사람들을 안심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무지를 느끼는 순간, 사물은 새롭게 느껴지고 신비감이 되살아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를 잊은 상태가 되어 그것과 하나 될 때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가 있다. 그것은 물론 우리 맘대로 선택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어쩐지 그게 좋았어’ 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감정, 주관적인 느낌에 충실할 수 있는 문화를 가지는 것,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차이가 실제로는 아주 큰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새로운 지식들

 

세상에는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이미 우리가 모르는 지식이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뇌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이 어떻게 결정을 내리는가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인간이 자유의지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획기적인 과학적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런 지식을 가지게 되면 이제까지 말해 온 것은 다 달라지게 될까? 우리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게 될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몸이 설탕을 좋아하게 만들어져 있다라는 과학적 사실과 설탕은 좋은 것이라는 가치판단은 서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자기 의지를 가지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남자는 가슴이 큰 여자를 좋아하도록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면 그것은 오히려 가슴이 작은 여자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유전적 성질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물질의 세계에서 의미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던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의식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같은 진짜로 어려운 문제들은 연구를 통해 그 최종적 답이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와 세상이 바뀌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그 질문의 의미를 좀더 잘 알게 될 뿐이다. 즉 의미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의식이란 무엇인가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아는 것은 우리에게 더 많은 힘을 주지만 가치판단을 결정해 버리지는 않는다.

 

내가 만약 지식이 쓸모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과학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그런 오해는 피하고 싶다. 나는 지식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더 많은 지식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사실상 보통 더 많이 배울수록 무지의 범위는 더 크게 늘어난다. 무식할수록 자신이 무식한 줄 모른다.

 

우리가 정말로 어떤 것에서 가치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지식이 필요한 것이라면 말이다. 어떤 여자는 사랑하지만 그 여자에 대한 지식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라는 말은 모순이다. 세상의 신비를 느끼면 세상을 더 많이 알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이 지식을 쌓고 더 많은 경험을 하면서 더 넓은 무지를 배우게 된다. 세상의 것들에서 의미와 가치를 보게 되고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직관에 보다 겸허한 자세를 가지게 된다.

 

우리의 가치 판단이 어떤 과학적 발견으로 크게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떤 지식을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절대적 지식은 이데올로기가 되고 그것에 기반한 윤리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옳은 길이 아니다. 우리가 절대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진실의 작은 일부만이라는 겸허한 생각을 가질 때 우리의 가치판단은 새로운 과학적 사실에 의해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좋은 사회를 만드는 길

 

무지를 느끼는 체험, 사물을 새롭게 느끼는 체험은 간단하다면 간단하지만 어렵다면 한없이 어렵다. 예를 들어 세상에 대한 경험이 하나도 없는 아이들이 아는 것은 도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계를 둘러보지도 않고 선진국은 이렇다는 둥 후진국은 이렇다는 둥 너무 자신만만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자와 사실은 다르다. 관광여행을 가본 것과 거기서 사는 것도 전혀 다르다.

 

과학적 수학적 지식이나 훈련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을 무의미하고 도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공학만 공부한 공학도가 형이상학이나 문학, 예술은 헛소리와 헛짓에 불과하다고 간단히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다.땀 흘려 돈을 벌고 어떤 조직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일을 해본 적이 없으면서 시스템에서 벗어나겠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돈의 가치를 전혀 느껴보지 못하고 돈은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나는 사회 안에서 자신의 몫을 최선을 다해 해내는 사람을 존경하고 그들에게 감사한다.

 

내 개인적 경험에 대해 말해보자면 내가 수학을 배우고 쓴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 전공이 물리학이었으므로 나는 다른 전공을 가진 사람들보다는 수학을 많이 배우고 썼다. 대학원 시절 나는 요약이 50페이지가 넘어가는 수학 계산을 종종 하곤 했다. 나는 연구를 위해 컴퓨터 시뮬레이션도 많이 해왔다. 이런 내가 수학과 논리는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인문학계열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서로 다를 것이다. 

 

엔지니어가 자동차를 바라보는 것과 시인이 자동차를 바라는 보는 것은 둘다 바라보는 것이지만 서로 의미가 크게 다르다. 그 다름은 물론 구체적 세부사항에 더 익숙하다는 뜻도 있지만 그 보다는 자신이 도달할려고 하는 어떤 것을 보는 가 아니면 별 관심없는 어떤 것을 보는가하는 차이가 더 크다. 엔지니어가 저건 그저 수단이죠라고 말하면서 그 한계을 느끼는 경험은 공학적 정밀성과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던 보통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정교한 언어를 구사하려고 노력해 온 작가가 언어의 한계를 말하고 문학의 한계를 말하는 것과 평생 수식만 만지던 이공계 학생이 언어의 한계를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내 경우는 수학적 훈련에서 이것은 모두 수단에 불과하다라는 자각을 하는 경험을 했지만 다른 사람은 다른 방면에서 동질의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농부는 농사에서 운동선수는 운동에서 엔지니어는 기계를 만들고 개량하는 일에서 작가는 창작활동에서 가수는 노래에서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런 걸 느끼고 해방감을 느낀다. 속박이 없으면 해방도 없다.

 

사실은 아이가 자라 어느 정도 경험을 쌓고 지식을 늘리고 세상을 알고 난 다음에는 이번에는 그런 경험, 그런 지식, 그런 배움에서 자유로워지기가 어렵다. 때문에 좋은 공동체,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주관적인 가치판단의 능력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은 실제로 뭔가를 만들어 보여줘야 한다. 그들이 사회의 든든한 윤리적 기둥이 되어줘야 한다. 좋은 노래, 좋은 이야기, 좋은 드라마, 좋은 춤, 좋은 책, 좋은 집, 좋은 거리, 좋은 마을, 좋은 학교가 사람들을 변하게 할것이다. 좋은 문화가 좋은 상식을 만들 것이다. 올바른 가치판단이 사회를 번영하게 만들 것이다. 

 

현대 동양의 문제

  

현대의 동양은 최근의 몇 백년 동안 과학기술 문명을 주도적으로 발전시킨 쪽이라기보다는 서구 과학발전의 결과물을 수입한 입장에 있었다. 이 때문에 동양은 일정 부분 모순적인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과학적 사고방식도 제대로 뿌리내리게 하지 못했는데 과학적 사고방식의 폐해를 극복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과학기술문명을 배척하고 합리주의를 배척하라는 것은 제대로 된 조언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동양인의 문화는 관습에 젖어 비합리적이고 권위주의적일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극한의 과학적 사고방식이 주는 폐해에 대해 경고 하는 목소리는 종종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사람의 핑계로 악용된다.

 

합리주의를 넘어서고 관습과 문화를 벗어던질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고도 스스로 윤리적으로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지 자기와 주변을 마구 상처 주는 이기주의적 행동과 난동밖에는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다. 법 없이도 살수 있는 사람이란 착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무법자로 난동을 부리는 범죄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무조건적 낭만주의로 합리주의를 배격할 때 그 결과는 결코 낭만적이 아니다. 현실의 사회는 이미 냉철한 합리적 사고가 필요한 거대한 기계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로 그런 기계를 만지는 것은 수 없는 피해자를 양산해 낼 수밖에 없다. 그건 어린애가 자동차 운전대를 맘대로 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또한 서구사상의 서투른 도입으로 시대에 뒤진 기계론적 과학절대주의적 사고 방식을 따라 하거나 논리중독에 빠지는 것도 물론 위험하다. 고정된 가치, 즉 실질적으로 가치관적 공백이 있는 주장만 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복잡한 만큼 그런 과학주의적 사고 방식의 폐해도 클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인간사회를 쉽게 수리할 수 있는 자동차처럼 말한다. 보편성만을 강조하면서 엄정한 사회과학적 법칙이 냉혹하게 작동하는 것에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그런 보편적 진리는 어느새 사람들을 숫자로 보이게 만든다. 그런 개혁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그 대안은 거의 없거나 무한한 낙관주의밖에 가지지 못한 가운데 가족제도나 전통윤리를 파괴한다면 그것 역시 무책임한 것이다.

 

서구의 윤리

 

선진국을 따라 배운 다는 입장에서 한국같이 오래 개발도상국의 위치에 있던 나라 사람들은 선진국들의 삶을 진보적 목표점으로 여기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가치나 윤리의 문제는 보편적인 답이 없는 것으로 꼭 그런 식으로 봐야 할 것은 아니다. 사실 의미나 가치나 윤리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생각 자체가 매우 부실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냥 생각없이 사는 대로 산다. 이 것이 삶의 부조리함이며 많은 사람들은 이것때문에 당황했었다. 

 

칼 포퍼는 그의 자서전에서 가치에 대해 논하고 있는 서양의 저술은 만족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며 불평하고 있다. 나이젤 워버턴이 쓴 철학 기초서, <철학의 근본문제에 관한 10가지 성찰>의 4장과 5장에서는 서구 윤리학의 현재 상태를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신에 근거한 윤리학, 공리주의, 칸트 윤리학, 아리스토 텔레스의 윤리학이 얼마나 쉽게 비판될 수 있는가도 보여준다. 저명한 윤리학자인 피터 싱어도 그의 <실천 윤리학>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윤리학 이론들을 나열하면서 그것들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대개는 서구 윤리학의 문제는 단순히 여러 개의 주장들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의 주장들이 너무 큰 결점을 가지고 있어서 비판하기 너무 쉽고 너무 원시적이라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요즘의 서구인들은 미국인을 제외하면 기독교도 잘 믿지 않지만 나는 서구 문명은 기독교의 윤리학을 제외하고 나면 지극히 기계적이고 공허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아래에 잠깐 이야기할 것처럼 그 신 중심의 윤리라는 것도 물론 매우 독단적이며 인간에게 꼭 좋지만은 않은 것같다. 그러므로 서구 문명이 기독교의 전통도 없었던 세계로 퍼져나갈 때 가치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그들의 문명이 부와 성공과 행복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해체와 윤리적 공허를 만들어 내는 예는 세상에 너무 많다. 그 결과 과거에 가난했던 나라들은 지금도 가난하다. 오히려 더 끔찍한 상황에 있는 곳도 많은 것같다. 

 

여러 윤리학적 이론에 대한 비판들을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들은 책을 직접 읽어야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예를 들기 위해 신에 근거한 윤리학적 문제에 대해 소개해 보자. 피터 싱어는 윤리를 종교와 완전히 독립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플라톤의 논증을 인용하고 있다. 만약 신이 어떤 행위가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것이 좋은 것이라서 좋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좋다는 것이란 본래 그 정의상 ‘신이 그렇다고 한 것’인가? 만약 그것이 좋은 것이라서 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하면 좋고 나쁜 것은 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살인이 나쁜 것이라고 신은 무지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뿐이다. 이 말은 신 이전에 좋고 나쁜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러면 윤리학에 신이 등장할 이유가 없어진다. 만약 좋다라는 것은 정의상 신이 그러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 뜻이 무엇이든 좋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들리게 된다. 신이 사람을 고문하는 일이 좋고 이웃을 돕는 것이 나쁘다고 한다면 사람을 고문하는 일이 좋은 일이고 이웃을 돕는 일은 나쁜 일이 된다. 신을 믿는 사람은 신은 좋은 분이므로 그럴 리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경우 신이 좋은 분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물론 이 같은 논의는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논의를 더하면 한없이 복잡하게 나아갈 것이다.

 

문제는 학문의 세계에서 철학자들이 어떤 어려운 난제들을 풀지 못하고 끙끙댄다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공학자나 수학자나 물리학자들도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당장 보통의 개인에게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반면 가치나 윤리는 우리 모두가 날마다 써야 하는 생필품 같은 것이다. 나는 가치관이나 윤리의식 따위는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가 나는 남의 조종을 받는 로봇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단순한 윤리이론들 –공리주의나 칸트의 윤리적 요구같은 것-이 너무도 간단히 논박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것을 개인의 삶과는 관계가 먼 사소한 문제라고 볼 수가 없다. 문제는 오히려 높은 학식을 가진 학자들이 아니라 단순하게 종교를 믿고, 단순한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 크게 발생할 것이다. 그들은 내부적 모순을 의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의 삶을 고통뿐인 상태로 몰아가거나 남에게 속기 쉬울 것이다. 가치 판단의 기반이 매우 부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가지 사실적 주장 사이에 은근슬쩍 끼어들어온 서구적 가치판단에 따라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다른 철학, 다른 종교

 

물론 나는 여러 책들과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 글들 속에 좋은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모두 유사이래의 현인들이 남겨준 지혜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가 쓴것과 그런 것들과의 관계를 논하는 것을 별로 시도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주로 나 자신의 능력때문이다. 나는 철학에 정통한 전공자가 아니므로 이런 저런 철학과 종교에 대해 논한다면 도움을 주기보다는 독자를 곁가지에 빠져들게 만드는 혼돈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게나마 여러 철학이나 종교와의 유사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흥미로울지 모른다. 우선 노장 사상에 익숙한 사람은 이 책에서 노장 철학의 흔적을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의 교훈은 이 책 전체에 흐르고 있다. 나는 색즉시공 공즉 시색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불교의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의 메시지도 이 책에서 말하는 것과 상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유교의 경전인 <대학>과 <중용>에 보면 머무를 곳을 알고 난 뒤에야 일정한 방향이 있다고 나오고 희로애락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고 부른다라고 나온다. 나는 중용의 중이 단순한 양극단의 중간이 아니라 사물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평온한 마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기독교에 관련해서는 기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기도는 조용한 곳에서 혼자하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기도를 하는 행위를 통해 신과 만난다는 것은 우리가 사물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바가바트기타>도 매우 즐겨 읽었던 적이 있다. 따라서 그 영향도 있을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도 이 책에서 말하는 것과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로버트 퍼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메인테넌스>도 매우 감명깊게 여러 번 읽었다. 나는 그 책을 짧게 언급했을 뿐이지만 이 책의 내용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을 한권 꼽으라면 그 책을 꼽아야 할 것이다.

 

맺는 말

 

우리는 합리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배금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그렇게 되는 길은 오직 되도록 많은 사람이 올바른 뜻으로 올바른 문화를 만들어 내는 방법밖에는 없다.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합리적이고 과학적 사고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낭만적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은 수학적 사고, 과학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너무 단순한 구도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를 반성해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교육의 문제, 주거의 문제, 다문화의 문제, 자본주의의 문제, 그리고 현대인의 공허함의 문제까지 모두 돌파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의 문제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시스템이나 형식의 문제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다.  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시스템이라고만 생각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교사당 학생수라던가 시험을 통해 과다하게 경쟁하는 문제라던가, 밤늦게 학원을 가느냐 마느냐라던가 하는 형식의 문제에만 집중한다. 현재의 한국을 봤을 때 내용이 아닌 그런 형식의 차이는 크게 변화를 만들어 낼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잦은 변화로 혼란만 만들어낼 것이다. 

 

예를 들어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녀의 수가 적정선이어야 한다는 말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좋은 가정을 만드는 데 자녀의 수가 압도적으로 중요한 문제일까? 그러면 좋은 학급은 어떤가? 우리는 너무 쉽게 숫자에만 매달린다. 우리가 개인의 내적 개혁이라는 문제에서 등돌려서는 교육개혁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교육의 문제에 있어서 지역공동체, 부모의 문제, 학교 선생님들의 문화가 도외시될 때 형식이란 거의 무의미하다.

 

사람들이 부동산 대박의 꿈만 꾸고, 주거의 형태가 자신들이 삶에 미치는 영향의 가치에 무관심할 때 부동산 투기문제가 해결되고 서울 집중의 문제가 해결될까? 학문을 연구하는 것의 의미가 천박하게 이해될 때 대학교에 돈만 많이 지원하면 세계 최고의 대학교가 만들어질까? 과학을 하는 의미를 돈이나 산업발전과만 연결지어 생각할 때, 과학을 단순한 흥미거리 서커스 같은 것으로 생각할 때 진정 과학강국이 될 수 있을 까? 과학발전을 위해서는 오히려 인문학을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시스템이 문제라면 그걸 고쳐야 한다. 그러나 잦은 시스템의 변경은 그걸 꿰뚫어보기 오히려 어렵게 만든다. 모든 문제는 시스템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 모든 문제는 시스템이 만들고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시스템의 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사람들이 시스템의 노예가 되는 것, 사람들이 시스템을 넘어서지 못하는데 있다. 

 

<대학>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일의 선후를 알면 도에 가깝다.

 

무엇이 우리가 먼저 점검해 봐야 하는 일인가를 우리는 생각해 봐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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