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기대하고 바라는 대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가 많다. 항상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거나 너무 늦게 일어나고 모든 기대를 접을 때 쯤에나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우리는 살면서 무수한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우리는 종종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불안해지고 절망한다. 우리의 삶이란 나비처럼 가볍게 아니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별똥별처럼 재빠르게 저기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 버리는 데 땅 위에 있는 우리는 느릿한 거북이 같은 신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 신세는 왜 이럴까. 우리는 뭘할수 있을까. 느릿한 거북이에 불과한 우리가 삶을 따라 잡고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며 행하는 선택에 대해 무엇보다 첫번째로 주목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선택은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 더욱 많은 지식을 얻게 되면 더욱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생각이 옳다면 우리는 각각의 문제에 대해서, 예를 들어 대학을 선택하고, 친구를 선택하고, 아이와 놀아줄 것인가 말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각각 더 많은 지식을 쌓으면 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문제는 각각 다뤄져야만 하며 선택이나 가치판단이라는 주제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는 필요없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선택하는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할 것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그의 선택은 나의 선택보다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옳을까?
1902년 빈에서 태어난 칼 포퍼는 20세기 철학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하나이며 반증가능성을 가지고 사이비과학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칼 포퍼의 자서전 <끝없는 탐구>의 마지막장은 ‘사실들의 세계에서 가치의 지위’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그는 한가지 당연한, 그러나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바로 가치는 사실로부터 유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뭐뭐는 뭐뭐이다라는 것이 뭐뭐가 좋다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올바른 선택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능성들에 대해 올바른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즉 좋은 게 뭔지 아는 것이다. 뭐가 좋은 것인가 하는 문제는 스파게티를 먹을 것인가 피자를 먹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윤리와 상식의 문제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다. 그런데 바로 이 뭐가 좋은가 하는 문제는 사실에서 유추되지 않는다. 즉 가치는 사실로부터 유추되지 않는다. 그러니 더 많이 알게된 지식이 가치판단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종종 우리가 그 문제를 지식으로 해결한 것처럼 속게될 뿐이다.
세상에는 인과관계의 순환이라고 불리는 문제가 있다. 즉 A가 B때문이라고 하면 B는 무엇 때문이냐고 물을 수 있고 인과관계의 순환이란 이런 질문을 무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A는 B때문이고 B는 C때문이고 C는 D때문이고 하는 식이다. 이 무한대의 인과관계의 고리에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은 이것이 신의 존재, 즉 제1원인으로서의 신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가 못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가치의 문제도 똑같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여기서는 중요하다. 게다가 그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우리가 어떤 것은 이러저러해서 좋다라고 어떤 사실과 논리로 '설명'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이유들에 대해 그럼 그것들은 왜 좋냐고 물을 수 있다. A는 B라서 좋은데 B는 C라서 좋고 하는 식으로 나가는 것이다. 단순 인과관계는 그것이 무한대라고 해도 그냥 좀 불편할 뿐일지 모른다. 가치관계의 무한 사슬은 결국 우리는 우리가 왜 뭔가를 좋아하는지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우리는 따지고 보면 결국 별 근거없이 나는 이게 좋다라고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실기술도 가치판단에 이르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논증이 요구된다는 것은 흄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흄은 사람들이 종종 무엇무엇이다라는 것에서 무엇무엇이어야 한다는 논의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게 좋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거식증에 걸려 굶어죽는 환자도 있다.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먹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가치를 저절로 만들어내지 않는다. 살자면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먹는 행위의 가치는 생명의 중요함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생명은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우리는 또 던질 수 있다. 전쟁터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는 사람, 사형수를 사형시키는 문제, 낙태의 문제등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원칙을 무한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예는 많이 있다. 가치는 사실로부터 자명하게 나오지 않는다.
내가 대학에 가는 것이 좋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학에 대해 나보다 엄청나게 많이 아는 어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결정을 내려줄 수 없다. 왜냐면 가치는 사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뭐가 나에게 좋은가 하는가는 사실이 아니라 가치를 판단하는 것에서 나온다. 당연히 이쪽이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알고 보면 봉급이 많은 직장은 무조건 좋은 직장이라는 가치판단을 가정하고 있는 지 모른다. 나는 시끄러운 환경이 죽을 것처럼 싫은데 시끄러운 것쯤은 별거 아니라는 가치판단을 가정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인생의 고비에서 결단을 내리는가, 여러 가지 일들에서 의미를 찾고 가치를 평가하는가. 너무나 중요한 이 문제. 사실상 삶의 핵심적 과제인 이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가 뭘 가르쳐 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거의 없거나 그 가르침이 매우 교조적이며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좋은 게 뭔지를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으며 그저 어떤 일련의 규칙이나 교훈을 제시해서 그걸 따르라고 한다. 그 규칙들에는 뭔가 자명한 이유가 있는 것같지만 결국 엄숙한 얼굴로 이건 신의 계시니까 그냥 따르라고 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것이 규칙이다. 이것이 관례다. 이건 원래 그렇다. 이건 상식이다. 종종 이런 식이다. 우리는 자라나서면 사방에서 그런 말을 계속 듣는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종종 윤리의 문제가 그저 마음먹기의 문제라고만 생각한다. 즉 옳고 그른 것은 이미 다 정해져 있고 우리는 모두 그걸 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악한 생각에 속지 않고 유혹당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것, 이것이 윤리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노예나 로보트의 윤리다. 윤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좋고 나쁜 것은 전부 다른 사람이나 기존의 사회로부터 제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님이나 사회의 상식을 따르는 것은 많은 경우 올바른 일이다. 그 상식이라는 것은 많은 경험이 한 개인적 시간을 넘어 세대에서 세대로 누적되어진 결과라는 사실과 인간은 대개 비슷한 것을 좋은 것으로 느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것을 무시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윤리에 대해서, 좋고 나쁜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는 생각이 그게 전부라면 우리는 로보트나 노예밖에 안 된다. 누군가가 가치판단을 전부 대신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자기 발로 서야 하지 않을까? 결국 자기가 가치판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나다. 그러니 좋고 나쁜 것에 대해 내가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회로부터 윤리적 기준에 대해 배운 게 뭐가 있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두 가지가 생각난다. 하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한다는 공리주의고, 또 하나는 모두가 나처럼 행동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매일의 일상에서 수많은 가치판단을 내려야 하는 우리에게 기준점을 거의 주지 못하며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사회는 그저 자유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너 좋을 대로 해라. 학교는 뭔가 도움이 될 것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굴면서 실은 우리가 따라야 할 규칙만 권위적으로 죽 나열하고는 정작 가장 중요한 것, 개인으로서 어떤 게 좋고 나쁜 것을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면 그냥 무책임해진다. 자유다. 네 맘대로 해라. 물론 내 자유다. 그러나 좋고 나쁜 걸 판단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조언과 안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는 선택의 문제, 가치판단의 문제에 관련이 있는 여러 가지 책들이 나와 있다. 예를 들어 자기개발서들은 우리가 인생의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고려하면 좋은 원칙들과 지식들을 소개한다. 예를 들어보자면 긍정적으로 살아라라던가, 선택의 폭을 넓혀라라던가 가정을 소중히하라,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소중하다 같은 것이다. 이런 교훈들은 일종의 실험적 지식들이다. 실험 결과 좋다고 주장되어지는 원칙들이다. 다만 대개 그런 교훈들은 종종 자잘하고 개인적인 가치판단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너무 애매모호하다.
세상에는 심리학자가 쓰는 책들도 있다. 이들은 선택에 대해 인간 심리를 연구한 것을 설명하는 책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무의식 중에 이런저런 판단을 내리는가, 우리의 이성은 얼마나 비합리적인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사람을 판별하는 데에는 첫인상이 중요하다던가 가격을 흥정할 때는 처음에 값을 아주 크게 내리깍아야 도움이 된다던가 하는 것들을 소개하고 보다 일반적인 심리학적 법칙들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보다 개인적인 선택의 경험을 말해주는 책들도 있다. 바로 개인적인 성공담을 담은 책들인데 이런 책들은 말하자면 이러저러한 행동과 선택을 해서 내 인생에서 나는 성공을 했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내가 쓰는 것도 역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위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것을 언급하고 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보다 단순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에도 말할 것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대체 뭘 모르는가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칼 포퍼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그는 철학자가 되는 것을 꿈꾸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자 도제 생활을 했다. 그의 자서전 맨앞에서 그는 이 도제 생활을 언급하며 이런 말을 한다.
(그 목수는) 내가 열망해 마지 않는 지혜는 오로지 나 자신의 무지가 무한하다는 것을 완전히 깨달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우리의 지식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의 무지는 우리가 사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우리의 지식이 사물에서 의미를 빼앗아 버리는 경향이 있고 우리의 무지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할 때 모든 일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없게 되고 우리가 아는 것이 없을 때 우리는 무능해진다. 예를 들어 합리주의적 과학적 정신은 더 많은 이해와 지식을 추구하는데 이것은 과학이 모든 것의 의미를 빼앗아 버린다는 느낌을 주게 만든다. 그렇지만 이런 현실에 대해 저항하는 단순한 낭만주의는 종종 현실적으로 매우 무능하고 무책임한 것같으며 배부른 사람들의 투정쯤으로 보이기 쉽다. 가장 훌룡한 경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무한한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는 사람, 자기가 뭔가를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가장 나쁜 경우는 얼마 알지 못하면서도 이 세상에는 기본적으로 더 이상 자신이 알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아무런 곳에서도 신비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행복과 불행의 비밀이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는 에세이들을 통해 위에서 말한 것들 보다 자세히 설명해 보려고 한다. 나는 포퍼의 두가지 문장 – 지혜는 나자신의 무지가 무한하다는 것을 자각하는데서 나온다, 가치는 사실로부터 유추되지 않는다 –를 이 글들을 읽는 사람들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지만 어떤 것도 이것이 옳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저 선택과 가치판단에 대한 몇가지 사실들을 환기시키고 우리가 어떻게 선택을 하고 가치판단을 하는가를 같이 생각을 해볼 것을 권하는 것뿐이다. 다만 스스로 생각해보기를 바랄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고 그걸 넘어서자는 이야기다. 그렇게 함으로서 가치를 보는 능력을 일깨우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발휘하게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에세이들은 자연히 나의 개인적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오랜간 내적인 긴장과 고민을 겪어 왔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고민들이었다. 그런데 그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저런 개인적 관심사에 대한 추구를 하면서 살아오는 동안 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가지 문제들의 근원에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이며 사회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만약 내가 어릴 때부터 가치판단에대해 조금 이라도 더 알고 있었다면 나는 나의 긴장과 고민의 시간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글들이 과거의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을 것 같은 사람들, 즉 가치판단의 문제와 관련되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어떤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은 아니다. 그렇게 접근하는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이 글들이 말하는 것중의 하나다. 그보다 우리는 이 글들을 간단한 도구처럼 접근해야 한다. 땅을 파는 도구가 여러가지가 있듯이 판단의 문제에 대처하는 도구도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내가 하려는 것은 가능한 도구중에서 한가지 간단한 도구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최고의 것인가 아닌가와 상관없이 써보니 쓸만하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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