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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가치판단에 대하여

연작 에세이 7 : 기계를 발견하기

by 격암(강국진) 2009. 11. 23.

머릿말

 

우리가 수학공식에 숫자를 넣으면 답이 나온다. 자동차에 앉아서 시동키를 돌리면 시동키는 어김없이 정해진 단계를 따라 엔진에 전기 스파크를 보내고 엔진은 점화된다. 이렇게 논리적 구조물이나 기계는 일단 구축되면 정해진 일을 수행한다. 

 

문명은 기본적으로 수많은 경험의 결과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조합하여 놓은 것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논리적 구조를 느끼고 발견하는 일을 나는 기계를 발견하기라고 부른다. 우리 주변에는 물질로 되어 있는 기계가 많이 있다. 그러나 물질적 기계는 논리적 구조를, 그 설계도에 표현되어 있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낸 것뿐이다. 부품이 고장이 나서 설계도에서 기계가 벗어나면 물질로 된 기계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봤을 때 더 본질적인 것은 논리적 구조다. 그것이 사물을 정의하고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사회는 기계들로 가득 차 있다. 너무 가득차면 그게 보이질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억지로 그걸 보려고 해야 보인다. 

 

기계는 편리한 도구다. 기계를 발견하고 기계가 만들어 내는 불행한 결과들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것을 미워하거나 피해서는 안 된다. 나는 때로는 우리가 더더욱 기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걸 사람들은 합리주의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말로 바꿔 표현한다. 우리는 더 약속을 잘 지키고 더 엄격하고 정밀하게 맡은 일을 해내고 대충대충 일하고 행동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다만 이것을 그 자체로 좋은 것이나 나쁜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윤리적 목표가 아니다. 다만 살아가는 수단이다. 수단이라고 폄하할 것도 없다. 수단은 중요한 것이다. 

 

문명과 지식의 축적

 

우리는 기계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마시는 물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물 없이는 얼마 버티지 못한다.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양의 물이 정화되어 배급되고 있다. 요즘은 사실 시골이라고 해도 대부분 수도물을 먹는다. 마시는 물은 가게에서 파는 생수만 먹는 사람도 있다. 

 

이 물이 배급되는 체계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정교하게 작동한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구하는 노력 따위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지만 손만 뻣으면 물을 구할 수가 있다. 이런 시스템이 바로 문명이고 기계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주변은 기계로 시스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명이란 지식과 물질의 축적물이다. 우리가 살면서 얻게 된 작은 지식들을 수없는 세월 동안 축적한 것이다. 그런데 그 축적은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약해빠진 진흙으로 고층빌딩을 지을 수는 없다. 자체 무게를 못 이기고 붕괴할 것이고 비가 오면 유실되어 무너질 것이다. 

 

축적을 돕는 것에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개념화하는 것이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분류를 하고 정의를 한다. 이것이 더 나아가면 언어가 된다. 정교한 언어가 있으면 지식은 퍼질 수가 있고 집약될 수가 있고 후손에게 물려줄 수가 있다. 따라서 문명의 성장속도 즉 문명적 결과물의 축적은 훨씬 빨라진다. 

 

그러나 그저 통상의 언어로는 불충분하다. 높은 빌딩을 짓기 위해서는 우리는 한없이 튼튼한 골조를 짜야 한다. 그래서 지금처럼 거대한 문명의 축적이 이뤄지기 위해 중요했던 것이 바로 수학이며 논리학이다. 수학을 통해 우리는 그야말로 한치의 틈도 없는 튼튼한 논리의 벽돌로 지식을 축적한다. 그래서 지식은 더 빨리 더 높게 축적될 수가 있다. 

 

그 튼튼함은 놀라워서 수천년 전에 증명된 피타고라스의 정리 같은 것은 아직도 유효하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달에서도 지구 반대편에서도 유효하다. 단지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일반상대성 이론이 나온 이후 그것의 한계가 알려졌을 뿐이다. 뉴튼시대에 미적분학이 만들어졌고 과학은 분류하는 것에서 실험하고 측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물질의 운동을 기술하는 방정식들이 만들어졌고 세계를 기술하는 수학적 이해는 훨씬 더 강력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더욱 광범위한 과학적 관찰의 결과를 일관성있게 설명하는 일이 즉 경험의 보다 단순한 축적이 가능해 졌다는 것을 말한다. 

 

뉴튼은 마술사다. 뉴튼의 물리학이후 그의 손가락이 사물을 가르킬때마다 우리는 거기에서 매우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들을 보게 되었다. 반면에 유령과 정령들은 그야말로 마술처럼 사라졌다. 어둠이 빛에 물러나듯 세상은 한순간에 다르게 보이게 되었다. 

 

수학과 기계 

 

누군가가 칠판에 양자역학의 방정식이라던가 복잡한 적분식 같은 것을 써놓으면 그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 식들은 마치 무슨 마법사의 주문처럼 보인다. 그것에 익숙한 사람에게 그 몇 줄의 수식은 거대한 고층 빌딩처럼 보인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이런 간단한 수학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나 더하기 하나에서 둘이 나오고 둘에서 셋이 나온다. 그리고 계속하면 커다란 수가 나온다. 더하기에서 빼기가 나오고 곱하기와 나눗셈이 나온다. 구구단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아주 작은 논리적 벽돌이다. 우리는 구구단을 증명하고 그 결과를 외운다. 그러면 구구단이 어떻게 증명되는지 따위는 잊고도 그걸 잘 쓸 수가 있다. 구구단을 외우고 나면 이제 여러자리의 숫자를 곱하는 방법을 배운다. 일단 그 방법을 습득하고 나면 역시 그 방법이 왜 통하는가 따위는 이제 잊어버릴 수 있다. 우리가 정해진 방법을 따르면 올바른 답이 나온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0이라던가 -2같은 음수들을 정의하고 도입하고 계산방법을 배울 수가 있다. 하나를 배우고 하나를 습득할 때마다 우리의 능력은 급격히 증가한다. 교육적 목적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들이 왜 그렇게 되는지를 이해하고 아는 게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냥 공식을 외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공식이 바로 논리적 건축이 만들어낸 축적의 결과물 중 하나다.  고급수학에서 이것들은 계속된다. 수열이 뭔가를 배운다던가 방정식이 뭔가를 배우고, 행렬에 미적분에, 텐서에 복소함수로 계속 쌓기는 계속된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는 최종적 결과를 외우기만하면 그 증명을 몰라도 그걸 써먹을 수 있다. 이것은 자동차를 모는 사람이 자동차의 부품을 어떻게 만드는지, 각 부품들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를 알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동키를 돌리면 엔진이 돌기 시작한다는 것뿐이다. 중간에 어떤 경로를 거쳐서 그렇게 되는가는 몰라도 된다.

 

또 각 부품들은 표준화되어 만들어지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 모든 부품을 만들고 조립하는 것도 아니다. 타이어는 타이어 회사에서 만들고 엔진은 다른 곳에서 만들고 조립은 또 다른 곳에서 한다. 수학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복잡한 공식은 수많은 논리적 단계를 쌓아올린 거대한 건축물이지만 그 단계 단계를 모두 한사람이 이루어 낸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여러 개의 논리적 벽돌을 만들면 그것들이 조합되어 복잡한 공식 즉 더 커다란 논리적 벽돌이 만들어진다. 이미 증명된 공식을 가져다 쓸 때는 그게 어떻게 증명된 것인지 몰라도 된다. 타이어를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도 타이어를 부품으로 해서 차를 만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단 논리적 벽돌이 만들어지면 기계가 그러하듯이 그것들은 열심히 본래의 일을 한다. 즉 뭔가가 주어지면 공식에 따라 결과물이 만들어진다. 수학공식은 기계로 말하자면 엄청나게 단단한 부속품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망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동차는 그렇지가 못하다. 물질로 이뤄진 부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낡기 때문이다. 수많은 부품으로 만들어진 자동차는 중요한 부분의 아주 작은 부품 하나만 망가져도 움직이지 못한다. 계속 부품을 교체하지 않는다면 자동차라는 기계의 전체적 사용가능 기간은 모든 부품중에서 가장 약한 부품의 사용기간과 마찬가지다. 

 

정교함에 대하여

 

만약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정교함을 달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거대한 도시는 유지될 수 없다. 사방에서 사고가 날것이고 도시는 사람이 살수 없는 지옥으로 변할것이다. 서울에서 교통신호 체계만 망가져도 지옥 같을 것이며 정전사고만 나도 생명이 위험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부품의 정교함과 복잡성의 관계를 생각해 보기 위해 간단한 산수를 한번 해보자. 여기 부품이 하나 있다. 이 부품의 고장율을 1/2이라고 하자. 둘중 하나는 불량품인 부품이다. 이런 부품 두개를 연결해서 기계를 만든다면 전체 기계가 작동할 확율은 얼마나 되는가.

 

답은 1/2*1/2=1/4이다. 

 

그럼 이런 부품을 열개가 모이면 어떻게 되는가.

 

답은 (1/2)^10 = 1/1024다.

 

백 개가 모이면 어떻게 되는가. 

 

답은 (1/2)^100 =  1/(7.88*10^31)이다.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을 만큼 정상적인 기계가 만들어질 확률이 낮다. 

 

물론 이건 부품의 불량율이 무려 50%나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량율 1%의 기계는 어떨까. 백 개 중의 하나만 불량한 부품이다.  그래도 정상적인 기계가 나올 확률은 36.6%로 약 3대 중 하나만 정상이 된다. 

 

우리 주변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부품으로 이뤄진 기계들이 많이 있다. 자동차, 컴퓨터, 비행기, 핸드폰은 물론 자전거 같이 간단해 보이는 것도 실은 많은 부품들이 조립되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자전거에 있는 부품의 이름만 생각해도 바퀴, 변속기, 체인, 페달, 브레이크, 포크, 안장, 차체, 핸들바 등 가볍게 수십 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 기아도 여러 개의 부품으로 되어 있다고 할 때 자전거의 부품의 수도 나누기에 따라 몇백 개가 되고 마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렇게 보면 엄청나게 많은 부품을 가지고 움직이는 기계들이 위대해 보인다. 물론 이 때문에 복잡한 기계를 만들 때는 부품 하나가 고장난다고 전체가 서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다. 

 

한 국가를 기계로 볼 때 거기에 얼마나 많은 부분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사람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라. 이래서 후진사회가 쉽게 선진사회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볼펜이나 자전거 하나를 만들려고 해도 무수히 많은 것이 필요하다. 단 하나의 구성요소만 없어도 제작이 불가능하거나 이윤을 남길 수 없을 만큼 비싼 값으로 외국에서 부품을 수입하거나 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용케 거대한 기계,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고 굴린다. 그리고 거대한 부를 생산한다. 인간이 부유하게 사는 이유는 이 거대한 기계를 어떻게든 돌리기 때문이다. 

 

사회와 기계

 

세상의 많은 것들이 아니 대부분의 것들이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설계된 기계다. 자동차만 기계가 아니라 법인 같은 회사도 돈을 버는 기계다. 논리적 구조가 있다는 의미에서 학교는 졸업생을 만들어내는 기계고 농장은 농산물을 만들어 내는 기계다. 이 세상에는 이 사실들을 모르거나 이 사실들을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 사실들을 너무 잘아는 사람들은 기계적인 논리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들은 효율성과 생산성 같은 개념으로 시스템을 인정사정없는 기계로 만들어 버린다.

 

반면에 이 사실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종종 세상을 기계로 본다는 것에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문제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지 ‘기계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를 보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논리적 구조를 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지,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이 기계 같으며 기계 같아야 한다고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대부분의 것들은 기계적인 면 즉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한 가정도 내부적 구조가 있고 일의 분담이 있다. 세상의 것들의 기계적 본성을 보고 인식하지 못하면 기계의 희생자가 된다. 학교는 물론 졸업생을 만드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농장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 기계적인 면을 무시하고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그 논리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투명화가 이뤄지고 합리화가 일어나며 사람들이 그 논리를 넘어설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기계화를 피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넘어 설 수 없다.

 

오토바이가 달리다가 멈춰섰다고 하자. 오토바이는 물론 기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오토바이에게 화풀이를 한다. 마치 오토바이가 인격을 가져서 그를 골탕먹이기 위해 멈춰선 것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그는 시동이 걸리지 않는 오토바이를 발로 차거나 밀어 넘어뜨리거나 공갈협박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냉정한 마음을 가지고 그걸 구경하는 사람에게는 재미난 구경거리밖에는 되지 않는다.

 

오토바이라는 기계를 기계로 보지 못하는 이 오류는 현실사회에서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사람들은 사람이 부속품으로 들어간 기계는 기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옛날 한국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다. 형사는 범인을 잡고 변호사는 변호를 하고 판사는 판결을 한다. 일이 분업되면 각각의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할 뿐이다. 그 시스템의 일처리가 비정해 보인다고 해서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그 구성원 중 특정한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온정을 부탁하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될 리가 없다.

 

기업형 슈퍼마켓이 지역으로 들어올 때 그 지역의 작은 상가를 가진 사람들이 단순히 힘쎈 사람들이 너무 한다고 화를 내는 것으로는 대세를 바꾸기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그 구조를 봐야 한다. 회사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돈 버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한 돈이 되는 일은 한다. 때로는 사실 법을 어겨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돈을 못 버는 회사란 가지 않는 자동차처럼 제거 대상이기 때문이다. 회사가 돈을 못 벌면 누군가가 실직할 것이다. 작은 회사의 부속품인 사원은 전체적인 시스템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누가 누구를 봐 주겠는가.

 

나는 구체적으로 무슨 시 무슨 동의 어느 골목에는 기업형 슈퍼마켓이 들어와야 하는가 마는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반론적으로 기업형 슈퍼마켓은 나쁘다던가 작은 슈퍼가 좋다던가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그 골목을 사랑하고 그 골목의 가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직접 답해야 하는 문제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룰 것인가. 그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 지역에 사는 사람 하나하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모두 서로에게 그저 낯선 타인이라면 결론은 뻔한 것이다. 남은 것은 개인의 자유다.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을 선호하는가, 아니면 다르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들이 스스로 답해야 한다. 지역의 주민이 집단이 된다면 교섭도 가능할 것이다. 아니면 변화를 받아들이되 그 상점을 도울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이 개인에 불과할 때 그들은 거대한 돈 버는 기계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은 그 지역사회에 안 좋을 수도 있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그것이 문제다.

 

맺는 말

 

이 논리적 구조를 만들어 내는 일은 매우 유용해서 인간이 달에 착륙하게 만들어주고 하늘을 나는 일이 일상화되고 산을 깍고 바다를 메울 능력이 생길 정도다. 이것은 모두 엄청나게 많은 인간들이 축적된 문명을 이용하면서 협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협력이 가능한 것은 사회를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논리적 구조를 가진다는 것, 기계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반드시 악이 아니다. 하나의 회사만 해도 거기에는 내부적 구조가 있어서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역할 분담이 되는가가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 그런 구조, 이러저러하게 하면 이러저러하게 된다는 생각들이 바로 모두 기계다. 

 

때문에 오늘날은 그야말로 기계가 아닌것이 없다사회에는 기계적 논리가 가득차 있다 인간은 인간적일 있지만 인간들이 모인 법인이라는 시스템은 비정하지 않기가 힘들다거대한 시스템을 누가 혼자 힘으로 조절할 없기 때문이다오늘날의 인간은 이런 사회에서 태어나서 교육받고 살아간다따라서 인간은 기계와 융합되고 기계는 도구 이상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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