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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생명과 환원주의

1. 물질과 생명

by 격암(강국진) 2010. 1. 9.

2010.1.9

 

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에서는 기본적으로 고립계를 가정한다. 즉 어떤 물질은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뉴튼물리학에서 작은 입자 하나를 고려할 때 이것은 아주 작고 질량을 가졌으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 존재다. 수소원자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다른 어떤 것을 떠나 수소원자는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런 생각을 생명체에 적용하는 것은 혼동을 만들거나 별로 적당하지 않은 사고방식이다. 생명체는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거나 정의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는 마치 왼쪽이 없는 오른쪽이나 위가 없는 아랫쪽을 정의할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같은 모순을 만들 수 있다. 생명체와 그 환경은 서로 완벽히 분리 되기 불가능하며 생명체는 어떤 물질이라기 보다는 어떤 서로 대립하는 두가지 혹은 다수의 힘이나 물질이 균형을 이룬 사건에 가깝다.

 

이것은 흔한 시각과 다르기 때문에 좀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인간을 보자. 인간은 혼자 존재하지 않고 끊임없이 물질을 세계와 교환한다. 우리는 먹어야 살고 땀을 흘리고 숨을 쉰다. 물을 마시고 배설을 한다. 생명은 혼자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게 아니라 열린 계이다. 어디서 어디까지 선을 딱 긋고 여기서 여기까지를 '격암'이라고 불리는 인간으로 정의하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정의된 격암은 환경과 떠나서 홀로 존재할 수 있고 홀로 인식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격암은 진공상태에 가져다 놓으면 금방 생명이 아니라 비생명이 된다. 시체가 되고 마는 것이다. 헬륨을 넣은 풍선이 우리가 보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그 안에 들은 헬륨이상으로 풍선바깥의 공기때문이다. 즉 풍선안의 헬륨과 풍선바깥의 공기가 균형을 이룬 끝에 풍선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깥 공기를 제외하고 풍선을 정의하면 모순이 생긴다. 진공에 가면 그 풍선은 터져버릴 것이다. 

 

여전히 혼돈에 빠져 있을 사람들을 위해 세포 하나를 생각해 보자. 우리 몸은 세포로 이뤄져 있고 우리는 이 세포라고 불리는 것을 다시 정의하고 파악한다. 세포막 안에 있는 것들의 구조를 설명하고 그 세포막안에 있는 것들의 총칭인 세포가 어떻게 바깥세상과 교류하는가하는 식으로만 세상을 본다. 그러니 살아있는 것은 세포이고 죽은 것은 세포바깥일까? 실은 세포막 바깥 쪽에 있는 것 모두를 하나의 생명으로 정의하고 그 생명이 어떻게 세포막 안에 있는 것들과 교류하는가하는 시각을 가지고 봐도 세상에 모순될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물안의 공기방울이란 공기들이 모인 것인가 아니면 물들이 없는 공간을 공기방울로 생각하는가의 문제다. 물안에 있으면 그 공기방울이 실체로 보인다. 그러나 그 공기방울 표면에 떠올라 물표면과 하나가 되는 그 찰나의 순간 실체와 환경의 구분이 뒤집어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실체는 이제 물이고 공기방울은 물이 없는 공간이 된다. 

 

생명은 대립하는 힘들이 균형을 이루는 사건이라는 말이 이제 이해가 되는가? 인간은 생명이다. 세포도 생명일까?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한다. 세포는 자유의지가 있을까? 우리는 자동차나 여자친구나 부모님이나 심지어 신고있는 신발은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옷을 모두 벗고 있는 우리의 몸뚱아리 안에 있는 물질의 집합이 '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경계선은 그렇게 그어져야 하는가. 어디에 경계선을 긋건 나는 나 아닌 것들로도 정의된다. 괴상한 그림이지만 우리의 피부 바깥쪽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고 피부 안쪽에 있는 것들이 세상일 수도 있다. 이제 누가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누가 생각을 하고 있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떤 것을 고립된 물질로 보고 어떤 것을 위에서 말한 균형을 이루는 사건으로 보는가 하는 것은 모두 관점이다. 관점들은 모두 불완전하여 경우에 따라서 편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불편하다. 그러나 동등한 수단들이다. 지구나 포탄이나 원자들을 생각할때는 물리학적 시각이 편리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해를 주고 예측의 수단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런 시각을 생명에 적용하면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이해를 주지도 못하고 오해를 만들어 낸다. 시체와 살아있는 사람을 자꾸 혼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경과 분리된 생명이라는 괴상한 개념을 만들어 낸다. 위쪽이 없는 아랫쪽, 왼쪽이 없는 오른쪽, 뜨거움이 없는 차가움을 정의하고 생각을 하면 괴상한 결과만 만들어 질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적 철학적 문제를 만들어 내고 몸과 마음의 이원론 문제들을 풀지 못하고 지성이란 무엇인지 정의하지 못하고 가치관적인 문제, 의미의 문제에 전전 긍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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