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작 에세이들/생명과 환원주의

계속 존재하는 존재로서의 생명

by 격암(강국진) 2010. 4. 20.

2010.4.20

저는 이제까지 생명에 대한 몇개의 글을 쓰면서 왜 물리학적인 시각이 한계가 있으며 생명에 관계된 현실 사회에서는 효율적이지 못한가를 썼습니다. 그 핵심을 잠깐 살펴보면 일단 생명은 어떤 경계를 긋고 그 안의 것에 이름을 붙임으로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생명은 주변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섞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정의는 혼란과 한계를 가져옵니다. 

 

그러한 예로서 저는 풍선을 들었습니다. 풍선이 어떤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풍선안과 바깥의 균형이 이뤄져있기 때문입니다. 풍선이 이렇게 생겼다고 외부와 무관하게 풍선을 정의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 됩니다. 기름과 물이 컵안에서 서로 나뉘어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고 할때 그 경계선을 물부분의 표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틀리지 않지만 맞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물과 기름의 경계선이죠. 즉 생명은 주변환경과 떼어내어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존재를 환경과 무관하게 영원히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소원자라던가 돌맹이 혹은 뉴톤이 상상한 질점같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런 물리학적 시각의 문제점은 환경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아예 무시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 없이 홀로 존재하는 아들을 정의할수 있는 것같은 시각을 주며 따라서 사물간의 관계성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무관심해지게 되며 사물에 어떤 가치를 느낄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은 주변과 소통하고 섞이는 것이며 생명은 바깥세상을 반영하고 그것을 내부적으로 수용하고 거울로 비춘 존재라는 생각을 강조한 것은 물론 생명적 관점과 물리적 관점을 비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관점을 강조하고 나면 약간 우습기는 하지만 다시 환경과 무관하게 홀로 존재하는 존재로서의 생명을 강조해야 하지 않나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어떤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단순하게 외부세계를 수동적으로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면 그런 존재는 지속되지 못합니다. 곧 죽어버리고 흩어져 버릴것입니다. 생명은 외부세계에 반응하고 외부세계와 섞여드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런 이유로 존재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외부의 것이 생명이라 우리가 이름하는 어떤 질서를 삽시간에 파괴하고 지워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맹이는 외부세계에 반응하지 않고 섞이지 않는 대신 자신의 존재를 쉽게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를 지키는 대신 외부세계에 닫힌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생명은 열린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더 자기를 지키는 능력이 중요해 집니다.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존재를 유지합니다. 

 

인간같은 다세포생물은 여러개의 세포로 이뤄져 있습니다.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 같은 것은 분열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데 왜 다세포 생물이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단세포 생물은 환경변화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환경에 변화가 전혀 없다면 의식도 없고 세포하나로 이뤄진 단세포 생물만이 번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세포 생물은 환경이 변화하면 떼죽음을 하고 맙니다. 

 

반면에 다세포생물들은 자신의 환경을 바꾸거나 이동합니다. 그렇게 할 때 사실은 단세포생물보다도 더 약해지는데 그렇습니다. 이제 세포는 혼자서 살 수가 없습니다. 간이나 눈이나 손이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개개로 보면 그들은 환경변화에 더욱 취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세포들이 모이고 전문화한 대신 그들은 강하게 결합해서 환경적 변화를 더욱 최소화하고 최적의 것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환경적 재앙으로 떼죽음하는 것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 모든 변화에서 중요한 것은 계속 존재하는 능력입니다. 생명은 환경을 반영한다고 하지만 누가 내 팔을 당긴다고 해서 내 팔이 쉽사리 떨어져나가버리고 누가 밥을 끝없이 준다고 해서 배가 터지도록 먹어대는 수동적이고 약한 존재라면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한 생명은 긴 시간에 걸쳐서 결국 그 환경을 반영하는 거울이지만 동시에 환경적 변화에 저항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지켜내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래야만 생명은 환경과 소통하면서도 생명으로서 존재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돌맹이 같은 것이 존재를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중요한 과정입니다. 소통을 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인데 생명은 소통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마치 불위에 올라가 타들어가는 고기가 내부적으로 새로운 고기를 끝없이 만들어 내서 계속 존재하듯이 우리는 조금씩 환경에 침투되고 죽어가면서 새로운 우리 자신을 만들어 내고 우리자신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어떤 이유로 그냥 수동적으로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복사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오래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팔은 내팔인데 그 팔이 어디로 날아가서 이젠 남의 팔처럼 행동하고 내 간과 쓸개가 때때로 밖으로 탈출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살 수 있을리가 없지요. 생명은 조립식 장난감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 심장없이 있으라고 하거나 잠시 눈이나 뇌없이 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아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해서 나의 정체성과 존재하는 능력을 파괴하고 나를 분해해서 재조립하려고 하면 그 과정에서 나는 죽어버립니다. 

 

눈치를 채셨겠지만 나는 다세포 생물을 이야기하고 인간을 이야기하다가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슬쩍 넘어왔습니다. 슬쩍이라고 하지만 나는 생명체로서의 사회라는 관점은 유효한 것이며 쓸모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사회를 구성하기전에 채집생활을 하던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국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물로 진화하는 과정을 연상시킵니다. 

 

더구나 오늘날 사회는 너무 빨리 변하고 너무 복잡해 졌기 때문에 중앙에서 모든 결정을 내려서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시각이 비효율적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각을 기계로서의 사회라고 한다면 오늘날에는 생명으로서의 사회라는 시각이 더 효율적이며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뇌가 있듯이 생명도 중앙정보처리장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기계가 아닙니다. 이제까지 말한 생명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환경에 반응하고 자신을 지켜나가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다세포 생물체가 존재를 유지하듯이 우리가 더크고 복잡한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전문가들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우리는 환경적 안정성을 성취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와 다른 어떤 다른 사회가 부럽다고 해서 자동차 수리하듯 부품을 갈아끼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생명체로서 전체가 반응하고 변화해 갈 수 있을 뿐입니다. 각각의 부분이 서로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서로 동기화되지 못하는 생명체는 하나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더 효율적인 소통이 필요하며 더 강한 가치적 공감대가 필요합니다. 가치적 공감대가 없을때 오해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가진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야 합니다. 한국사회를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면 한국 사회가 자기 정체성의 문제에 매달려 변하지 못하게 폐쇄적이 되는 것도 문제지만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변화를 추구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사회의 각부분이 소통이 안되는 것, 소통하지 않는 것, 나만 세상일을 알고 결정하면 되지 다른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 이런 일들도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는 한반도에 존재한 것이기 때문에 한반도의 자연환경을 반영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한반도를 개조하는 4대강 개발에 저는 반대합니다. 인공적 개발이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오랜동안 여기 살았습니다. 어떤 의미로 인공이 아닌것은 한반도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변화와 개발은 충분한 소통과 시간을 두고 인간과 환경이 소통하면서 적응하면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환경을 재앙적으로 바꿔놓고 인간과 동물은 그냥 거기에 적응하라는 식이면 우리는 너무 많은 댓가를 치루게 됩니다. 자연과 사회의 복잡성에 대해 오만해서는 안됩니다. 치적으로 말해지는 청계천도 사실 해마다 백억에 가까운 유지비가 든다고 합니다. 서울시를 흐르는 개천이 이정도 일 때 전국을 어항으로 만들어 재앙이 생기면 얼마나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 할까요. 얼마나 엄청난 유지비를 지불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미 4대강개발때문에 강에 기대에 강주변에 살던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고 있습니다. 강에 얽힌 역사며 기억이 다 지워지고 그저 깨끗한 콘크리트 어항을 만들어 아 보기 좋다고 라고 하겠다는 그 가치적 심미적 무신경함이 저는 참 안타깝습니다. 바로 한국을 아파트 숲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걸 보기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생명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는 기회, 우리가 사회로서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줍니다. 생명으로서의 관점, 기계론적인 관점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