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2
앞의 글들에서 나는 물리적 세계관의 문제에 대해 말했습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원리적으로는 물리적 세계관은 생명적 세계관이 그러하듯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무슨 새로운 생명력같은 세상에 없는 힘을 고려하는 새로운 과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관점의 문제이며 과학 자체의 한계라기 보다는 우리가 익숙한 과학의 한계입니다. 과학은 물리학이 먼저 발전했기에 우리는 물리학적 시각에 익숙하죠. 관점은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에 따라 좀 더 편하고 좀 더 불편한 것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이런 관점의 차이가 실질적 상황으로 가면 훨씬 심각해진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다시 물리학적인 시각으로 돌아가 봅시다. 물리학적인 시각에서는 뭔가를 정의합니다. 이 정의는 그 뭔가가 아닌 환경, 주변을 배제한 정의입니다. 즉 예를 들어 수소원자를 정의할때 그 수소원자를 제외한 우주의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도 그 수소원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수소원자를 정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단 그렇게 하고 이 수소원자가 어떻게 주변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는가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먼저 수소원자의 존재를 도입하고 그 것을 둘러싼 환경은 나중에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것은 원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비현실적입니다. 아주 복잡한 환경을 다시 가져다 놓으면 세계는 다시 아주 복잡해 져서 우리는 아무런 이해를 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우 간단한 것부터 보통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고립계입니다. 즉 외부 환경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질량을 가진 입자는 외부의 힘을 받지 않는 고립계에서 움직이던 속력 그대로 계속 움직인다는 것이 바로 뉴턴의 관성법칙입니다.
물론 세계에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구와 달의 움직임을 연구하려고 해도 지구와 달만 있는게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이 있지요. 우리는 일단 그것들을 무시합니다. 사실 지구나 달 자체도 복잡합니다. 설사 지구와 달을 같은 밀도를 가진 완벽한 구체로 생각한다고 해도 우리는 두 개의 구체를 가지게 되지 두 개의 질점을 가지게 되지 않습니다. 뉴튼 미적분학의 큰 승리중 하나는 적분을 통해 커다란 구체간의 상호작용을 마치 모든 질량이 한가운데에 몰려있는 것처럼 생각해서 풀어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지구와 달의 상호작용을 두개의 질량을 가진 질점의 운동으로 근사해도 된다는 정당화가 가능합니다.
자 우리는 이제 세계에는 오직 하나밖에 물건이 없다는 관성의 법칙에서 두 개의 물체가 있는 이체문제로 넘어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충 이런 식으로 점점 더 많은 것을 가져다 놓으면 현실과 똑같은 세계를 다시 만들어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주장은 양자역학같은 것이 등장하기도 전에 무너졌습니다. 바로 3체문제라고 불리는 문제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3개의 입자가 존재하는 고립계, 단지 3개의 질점이 존재하는 고립계에 대한 뉴톤방정식도 푸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것이 발견된 것입니다.
3체문제같은 것이 등장하지 않아도 사실 요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결국 우리의 논리적 해석적 능력이 제약되어져 있기 때문에 처음에 다시 현실같은 환경을 되돌려놓겠다던 '원리적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학적 연구에 있어서 환경은 대부분 간단하게 '근사'됩니다. 이 문제가 앞의 글들에서 말한 생물학적 시각에서 보면 심각해 지는 것이지요. 생명의 경우엔 주변환경을 다 빼고 생명을 정의한 뒤에 나중에 환경을 대충 근사적으로 돌려놓음으로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더 틀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수소원자는 우주공간에 홀로 존재할수 있는지 몰라도 인간은 진공에 가져다 놓으면 죽으니까요.
인간과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사회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즉 사회가 없이도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인간은 이러저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우리는 그 인간을 파악합니다. 이런 단계에서 우리는 이 인간이 놓여질 사회적 환경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떤 사회적 환경을 가져다 놓고 이 인간이 이러저러한 사회적 환경속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연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심리학이나 경제학등에서 흔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사회환경은 대단히 단순화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이해나 실험도 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를 가지고 하는 실험이든 사람을 가지고 하는 실험이든 우리는 잘 통제된 인위적인 환경에서 심리학 실험을 하죠. 현실에서는 온갖 여러가지 요인들이 만들어 내는 효과들이 물밀듯이 닥쳐오지만 그런 상황은 과학적 실험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변수가 너무 많아서 인과관계를 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실험에서는 매우 인위적인 환경을 만들고 그 반응을 봅니다. 그리고 그 이해를 근거로 현실을 이해할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명백하게 환경과 독립해서 정의되고 존재하는 것이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민물고기를 매우 인위적인 환경, 예를 들어 바닷물에 가져다 놓고 실험을 해봅시다. 그럼 민물고기는 죽어서 바늘로 찔러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과학적 실험의 결과는 민물고기는 바늘로 찔러도 움직이지 않는다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까지 바보같은 사람은 과학자로 부르지 않지만 인위적으로 정의된 환경의 영향을 우리는 잘 모른다는 것은 솔직한 과학자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이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물리적 시각은 실제로 매우 안정성이 뛰어나서 변하지 않고 주변과의 소통이 전혀 없어보이며 환경이 매우 단순한 상황에서 잘 들어맞고 정확해 집니다. 예를 들어 한개의 원자, 지구와 달의 움직임 같은 것입니다. 집단간의 상호작용이 큰 경제학이나 생물학에서는 기본적 대상을 먼저 정의하는 방식이 한계가 큽니다. 현실적으로 현실과 비슷한 환경을 되돌려 놓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런 물리적인 시각은 소위 개인주의라는 생각의 뿌리입니다. 사회는 개인을 원자로 해서 구성되어지며 개인은 사회라는 존재없이도 정의되고 존재할수 있다는 생각은 오랜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어졌습니다. 사회계약론이란 개인이 먼저 존재하고 그 개인들이 계약을 해서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때로 개인은 사회없이 중대한 의미를 상실합니다. 프로야구선수나 탤런트가 사고로 더이상 일을 못하게 될 때, 자식이나 배우자가 사망했을 때 사람들은 종종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충격을 받습니다. 야구선수나 탤런트나 남편이나 아버지가 아닌 자신을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몇십년쯤전에는 프로게임선수라는 직종이 없었습니다. 개인은 사회없이도 존재한다는 생각은 틀리지 않고 성스러운 것으로 강조되지만 진실은 완전히 그 반대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개인의 정체성은 아주 깊이 사회적 연결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나를 찾자고 하는 생각은 어쩌면 가장 부적절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거듭말하지만 물리적 관점과 생명적 관점은 모두 세상을 보는 관점중의 하나일 뿐이며 그 자체로는 서로 틀린게 없습니다. 다만 모든 관점은 장단점이 있는 법인데 어느 특정관점이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도 세상을 그렇게 보게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떤 방면에 대해 완전히 장님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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